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독한 술도 얼리는 독한 추위의 땅

영하 30℃ 넘나드는 혹한의 대명사,

빈약한 가을걷이로 체감온도 더 낮은 강원도 철원 강추위 르포
등록 2011-01-26 14:46 수정 2020-05-03 04:26

겨울철 지방 출장의 기본은 옷차림이다. 출장 지역이 북쪽이냐 남쪽이냐에 따라 껴입을 옷의 가짓수와 종류를 결정해야 한다. 속옷은 물론 요즘 유행한다는 발열 내복, 그 위에 홑겹의 긴팔 티셔츠를 입었다. 그 위에 다시 모자 달린 카디건을 겹쳐 입은 뒤 오리털 패딩점퍼를 걸쳤다. 마지막으로 두꺼운 털실 목도리를 둘둘 감고 장갑까지 꼈다. 손난로를 하나 준비할까 싶었으나, “시베리아 가냐”는 선배의 핀잔에 거기에서 그쳤다. 겨울철 혹한의 대명사, 한파의 고장 철원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기상청 기록보다 더 추운 이유

1월18일 해질 무렵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인근 저수지에 쇠기러기와 가창오리가 날아들었다. 기상청은 이날 철원의 최저 기온이 영하 20.6℃라고 발표했다.한겨레 강원도 철원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1월18일 해질 무렵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인근 저수지에 쇠기러기와 가창오리가 날아들었다. 기상청은 이날 철원의 최저 기온이 영하 20.6℃라고 발표했다.한겨레 강원도 철원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이번 겨울 강원도 철원군이 기록한 최저기온은 1월16일 오전의 영하 24.3℃였다. 생각보다 덜 추웠다, 라고 말하기에는 이르다. 우리가 흔히 방송의 일기예보에서 접할 수 있는 ‘철원의 최저기온’이란 철원기상대 기온, 그러니까 기상대가 있는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기온에 불과하다. 갈말읍에서도 기상대가 있는 군탄리보다는 북쪽의 정연리가 더 춥다. 그리고 신철원에 속하는 갈말읍보다 구철원으로 불리는 북쪽의 동송읍이나 민간인통제선 안쪽 ‘진짜 철원’(원철원)의 추위는 그 이상이다.

실제로 기상청이 철원의 최저기온을 24.3℃로 발표한 16일, 정연리 자동기상관측장비(AWS)의 눈금은 영하 27.1℃를 기록했다. 기상청이 발표한 철원의 ‘공식’ 최저기온보다 약 3℃ 더 낮았던 셈이다. 지난해 1월6일에는 정연리의 최저기온이 무려 영하 30.5℃를 기록했지만 역시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기상청은 이날 철원의 최저기온을 영하 26.8℃로 기록했다.

철원기상대에서는 철원 기온 측정 지점인 신철원보다 구철원이나 원철원이 더 춥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정연리 등 철원 북쪽의 기온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무인시설로 운영하는 자동기상관측장비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다. 숨은 이유도 있다. 바로 철원 주민의 불만이다.

“날씨가 아주 추운 날이면 이따금 철원 주민들로부터 항의가 들어와요. 철원은 인구가 4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군 소재지인데, 왜 일기예보 맨 처음에 소개되거나 서울 바로 뒤에 나오냐 이거죠. 철원의 추위를 너무 도드라지게 소개하면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라는 인상을 주니까 철원군민은 그게 싫은 거죠.”

철원기상대 관계자의 설명이다. 기상청이 전국 50여 곳에서 유인시설로 운영하는 지방 기상청과 기상대의 ‘공식’ 자료 이외에는 최저·최고 기온 소개를 꺼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겨울 한파가 절정에 이르렀던 1월 중순, 철원군 동송읍의 북쪽 양지리나 이길리에서는 아예 영하 30℃가 넘었다는 증언까지 속출했다.

“지난 주말 TV를 보니까 저쪽 영하 24℃ 얼마가 나왔다고 하던데, 여기는 엊그제 영하 33℃가 나왔어. 아들이 차에 있는 온도계로 실외 온도를 재보더니 아, 영하 33℃라고 그래. 방송에 나오는 철원 날씨보다 여기는 훨씬 더 춥다고 봐야지.” 1월18일 동송읍 양지리에서 만난 한국두루미보호협회 철원군지회장 전춘기씨는 영하 24℃의 추위에 코웃음을 쳤다.

“나는 얼마 전에 담근 천마 뿌리주가 있어요. 그거 하나를 바깥에 내놓았는데, 며칠 전 추울 때 나가보니까 절반쯤 얼어 있더라니까. 소주는 뭐 아예 꽝꽝 얼었지. 뿌리주는 알코올 도수 30도가 넘는데 뚜껑으로 알코올이 좀 빠졌다고 해도 그게 얼려면 아마 영하 30℃는 넘어야 할걸.” 양지리 주민 이준호(51)씨가 전씨 옆에서 거들었다.

냉기 빠져나가지 못하는 지형
1월19일 철원군 동송읍 동송시장은 추위의 여파로 한산한 모습이었다.한겨레 강원도 철원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1월19일 철원군 동송읍 동송시장은 추위의 여파로 한산한 모습이었다.한겨레 강원도 철원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양지리는 민통선 너머에 있는 마을로 현재 80가구 200여 명의 주민이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원래 햇볕이 잘 든다 해서 양지리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해발고도가 높은 동송읍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보니 철원에서도 가장 추운 곳으로 꼽힌다.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지역이라 겨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어. 날씨가 너무 추우니까 비닐하우스 재배는 못하는 거고, 주민 연령도 대체로 많은 편이라 이래저래 겨울에는 ‘추우니까 꼼짝 마’ 하고 있는 거지, 뭐.” 겨울 한파를 극복하는 요령을 묻자 전씨는 싱겁게 대답했다. 대신 “겨울은 원래 추운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강조했다. 이날 오후 양지리에서는 사람의 흔적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창백한 태양이 산 너머로 사라지자 인적이 끊긴 양지리에 두루미 몇 마리가 날아들었다.

철원의 혹독한 겨울 한파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무엇보다 지형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철원 지도를 펼쳐놓으면 이해가 쉽다. 우선 철원의 대부분은 벼농사에 적합한 평야지대로 이뤄져 있다. 대신 해발고도가 200m 안팎의 분지인데다 철원의 동쪽에는 화천~양구로 이어지는 높은 산악지형이 자리잡고 있다. 남쪽으로도 광덕산과 명덕산이 버티고 있다. 겨울철 드넓은 철원 분지로 북쪽의 시베리아 찬 공기가 스며들면 동쪽과 남쪽의 산에 가로막혀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이다.

“위도로 봤을 때 강원도 철원과 화천, 양구 등 북쪽이 다른 지역보다 추운 것은 상식이죠. 여기에 철원은 주위의 산악지형 때문에 찬 공기가 한번 유입되면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밤사이 복사냉각이 심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아침 일출 직전 하루 최저기온을 기록했다가 해가 뜨면 비로소 기온이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정길운 철원기상대장의 설명이다. 복사냉각이란 공기 순환에 의한 대기와 지표면의 냉각 현상을 가리킨다. 바람이 없고 날씨가 맑은 야간일수록 복사냉각이 활발해 다음날 아침 날씨가 더 추워진다. 2010년 1월부터 철원기상대 근무를 시작한 ‘날씨전문가’ 정 대장에게도 철원의 추위는 매서웠다.

“내가 전라도 광주와 충북 모두 다녀봤는데, 확실히 철원이 춥긴 춥습디다. 평생 내복 한번 안 입어봤는데 지난해 철원에 홑바지 하나로 왔다가 안 되겠더라고요. 내복 가게에서 당장 한 벌 사입었는데도 사무실만 들어오면 무릎이 시려워서 온풍기를 더 틀어달라고 했죠.”

1월16일 공식적으로 영하 24.3℃를 기록한 철원의 강추위도 17일부터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절기상 ‘큰 추위’라는 뜻의 대한인 1월20일에는 영하 18.1℃까지 올라갔다. 최저기온은 그렇지만 철원 사람들이 느끼는 추위는 여전하다. 곳에 따라 영하 30℃를 넘나드는 혹독한 철원 추위를 생각하면 영하 18.1℃는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이번 겨울 철원의 날씨는 지난해 12월29일부터 올해 1월20일까지 23일 연속 영하 10℃ 미만을 기록하고 있다. 최저기온 영하 20℃ 미만 일수도 벌써 7일이나 됐다. 날씨가 꾸준히 추웠다는 이야기다.

1월19일 철원읍 대마리 마을회관을 찾은 김용만(55)씨는 이번 겨울 철원에서는 ‘삼한사온’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대마리는 6·25 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바로 아래에 자리잡은 이른바 ‘향군 재건마을’이다. “춥기야 작년 겨울이 되게 추웠지. 영하 30℃가 넘는 날이 있었잖아. 집 앞에 심어놓은 호두나무가 다 얼어죽었단 말이야. 과수 농가가 피해 많이 봤어. 그래도 며칠 호되게 추우면 며칠은 따뜻했는데, 이건 내리 추우니까 생산활동은 아무것도 못하는 거지, 뭐.”

1월 중순 절정에 이르렀던 철원의 강추위로 ‘한국의 나이아가라’로 불리는 동송읍 장흥리 직탕폭포가 완전히 얼어붙었다.한겨레 강원도 철원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1월 중순 절정에 이르렀던 철원의 강추위로 ‘한국의 나이아가라’로 불리는 동송읍 장흥리 직탕폭포가 완전히 얼어붙었다.한겨레 강원도 철원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텅 빈 주머니에 스며드는 찬바람

“내가 여기 대마리를 포함해 철원에서만 40년을 살았는데 아무리 추워도 살 만했던 게 가끔씩은 날이 풀렸거든. 그런데 올해는 심지어 눈이 내리는 날까지 추워. 날이 계속 추우니까 집에 보일러는 계속 켜둬야지 어떻게 해. 싸다고 심야전기보일러를 설치했는데 난방비가 한 달에 40만~45만원이 나와요, 참나.”

대마리에는 도시가스 시설이 돼 있지 않아 심야전기보일러를 쓴다는 최덕섭(58)씨의 날씨 불만은 난방비 걱정으로 이어졌다. 겨울철 난방은 철원 사람의 최대 고민 가운데 하나다. 외부 기온이 워낙 낮다 보니 실내 온도를 20~22℃로 설정해놓아도 엄청난 기름값이나 전기요금을 각오해야 한다. 1인 가구인 김용만씨 역시 겨울철이면 난방비로 매달 약 30만원의 전기세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200여 가구 670명의 주민이 모여 벼농사를 짓고 있는 대마리 주민에게 이번 겨울이 더욱 추운 이유는 또 있다. 지난가을 쌀 수확이 시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근용(55) 대마1리 이장은 “주머니가 비어서 더 춥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 날씨가 오락가락한데다 일조량도 부족해 쌀농사 수확량이 확 줄었어. 우리는 20% 정도 감소했다고 보는데, 여기에 쌀값은 15% 떨어졌잖아. 게다가 농사 비용은 또 늘었으니 손해가 얼마야.”

김용만씨가 덧붙였다. “주머니가 두둑하면 날이 추워도 보일러 좀 팍팍 돌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 겨울에는 그게 어려운 거지.”

과거보다 빈약했던 가을걷이는 유독 춥고 긴 겨울 대마리 사람들의 얼굴에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추위를 이기는 지혜를 묻자 최덕섭씨는 “그런 것 없다”고 말했다. “우리라고 뭐 추위를 이길 별다른 방법이 있나. 만날 마을회관에 소주 한 병 사와서 불 피워놓고 100원짜리 고스톱 치면서 이렇게 지내는 거지. 근래에 보기 드문 긴 겨울이 될 것 같아.”

철원=글 최성진 기자 csj@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추위와 비만의 상관관계?
전국에서 비만율이 가장 높은 곳

철원 사람의 겨울나기 비법을 밝히는 열쇳말 가운데 하나는 ‘지방층’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철원은 전국에서 가장 추운 곳이기도 하지만 비만율도 가장 높은 지역에 속한다.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의 ‘지역사회건강조사’ 자료를 보면, 철원의 비만율은 2008년 조사를 실시한 이후 지금까지 전국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지역사회건강조사는 우리나라 국민의 건강 상태와 건강 결정 요인을 파악하기 위해 2008년부터 매년 기초자치단체 단위로 실시하고 있는 설문조사다.
조사 결과를 보면, 철원의 비만율은 2008년부터 2년 연속 전국의 253개 시·군·구 가운데 최고치를 보였다. 2008년 조사에서 철원의 비만율은 34.7%로 나타나, 최저 지역인 서울 강남구(13.9%)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2009년 조사에서도 철원(30.4%)의 비만율은 경기 성남시 분당구(14.8%)의 두 배를 넘었다. 2010년 결과는 1월21일 현재 나오지 않은 상태다.
김미숙 철원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지난 1월18일 과 만나 “3대째 철원에 살고 있는데 주위를 보면 특히 중·장년층 여성의 경우 살찐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철원 사람이라도 젊은 층은 아주 날씬한 편이에요. 그런데 40대 후반 이후 뚱뚱해지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나도 어릴 때는 날씬했는데, 최근 2~3년 사이 겨울만 한 번씩 지나면 이렇게 몸이 부푸는 것을 느꼈거든요.”
추운 지역일수록 포유동물의 체구가 작고 뚱뚱해진다는 사실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날씨가 추울수록 열손실을 막기 위해 손발과 눈, 코, 입 등 신체 부위는 작아지고, 고칼로리 음식으로 혹한을 견디려 하다 보니 몸 안의 지방층이 두꺼워진다는 논리다. 이른바 ‘베르그만-알렌의 법칙’이다.
물론 베르그만-알렌의 법칙만 갖고 철원의 혹한이 비만을 키웠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질병관리본부 지역사회건강조사가 2008년 처음 시작된 터라, 비만율과 기후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김윤아 질병관리본부 만성병조사과 팀장은 “비만율의 경우 철원뿐만 아니라 강원도 지역이 대체로 높은 경향을 보인다”며 “그동안 비만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신체활동량과 식습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비만율 등 건강지수와 기후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서 새로운 분야로 남겨져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