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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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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 벗기려 오늘을 기다렸다”

무죄받고 2차 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 재판에서 또 증인 진술 번복
검찰은 객관적 자료 강조하지만 여전한 표적 수사 논란
등록 2010-12-29 16:50 수정 2020-05-03 04:26

“저의 허위 진술로 저에겐 존경의 대상이었던 한명숙 전 총리님이 서울시장(선거)에서 낙선하고 기소까지 돼, 제가 한 짓으로 감당이 안 되는 죄책감에,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 했는데… 이대로면 의혹을 벗겨드릴 수 없어… 손꼽아…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불이익 겁박해 허위 진술했다”

한명숙 전 총리가 지난 6월27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검찰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제기하고 자신에게 2차 소환 통보를 한 것과 관련해 검찰의 부당한 수사에 결코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한명숙 전 총리가 지난 6월27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검찰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제기하고 자신에게 2차 소환 통보를 한 것과 관련해 검찰의 부당한 수사에 결코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급기야 그는 울먹였다. 그를 사이에 두고 왼쪽 검사석에 앉아 있던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 검사들의 표정은 얼어붙었고, 오른쪽 변호인석 변호인들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한명숙(66) 전 총리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지난 12월20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510호 법정. 형사합의22부(재판장 김우진) 심리로 열린 한 전 총리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사건의 2차 공판에서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준 사람으로 증인석에 선 ㅎ건영의 한아무개(49·수감 중)씨는 검찰에서의 진술을 ‘완전히’ 뒤집었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인도 놀랐다. 한 전 총리와 함께 기소된 한 전 총리 지역구 사무실 관리인인 김아무개(50)씨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법정 밖으로 끌려나갔다.

한씨는 작정한 듯 말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사기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이 확정돼 수감된 뒤) 검찰에 70차례 이상 불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일관되게 9억원을 한 전 총리에게 줬다고 했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한 전 총리 집에 갔던 경험과 (평소) 정치인에게 인사차 가면 하는 멘트들로 스토리를 엮었다. 3억원은 김씨에게 빌려줬고, 6억원은 공사 관계자 2명에게 성과급으로 지급하고, 일부는 내가 썼다. 그 사람들을 보호해야 회사를 되찾을 수 있고, 이 사건 제보자가 검찰에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불이익이 올 거라고 겁박해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한 전 총리가 시장 선거에서 낙선하고 기소까지 되면서, 죄책감에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려고 기다렸다.”

“와…, 어이쿠….” 방청석이 들썩였다. 법원에 출입한 지 얼마 안 되는 기자들도 “무슨 법정 드라마 같다”며 흥분해 웅성댔지만, 지난봄부터 법원을 담당했던 기자들의 반응은 달랐다. ‘또….’ ‘곽영욱의 저주냐.’ ‘올해의 시작과 끝은 한명숙 재판이구나.’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번 재판에서 계속 방청석을 지키고 있는 곽영욱(70·수감 중) 전 대한통운 사장의 부인과 ‘봄부터 있던’ 기자들은 순간 어색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시즌 2가 시작됐다.’

지난봄, 한 전 총리 지지자와 곽 전 사장 쪽 관계자, ‘재밌어서 그냥’ 구경하러 온 사람 등 방청객 100여 명은 법정 드라마 ‘시즌 1’을 생생히 지켜봤다. 이는 지난 3월11일 곽 전 사장이 ‘5만달러를 한 전 총리에게 건넸다’는 검찰 공소장의 내용과 달리 “의자 위에 놓고 왔다”고 진술한 데서 시작됐다. 이때도 딱 2차 공판이었다. 곽 전 사장에 대한 검찰의 무리한 조사로까지 심리는 확대됐고, 1심 재판부는 “돈을 줬는지 여부에 대한 (곽 전 사장의) 진술이 계속 바뀌어 일관되지 못해 신빙성이 의심스럽다”며 한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올 4월9일이었다. 하루 전날, 지검 특수1부는 ㅎ건영을 압수수색하며 2차 기소를 예고했다.

‘핵심 인물들의 진술 번복’이라는 상황도 비슷하지만, 이에 ‘당황한’ 검찰의 ‘다급한’ 법정 대응도 지난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1차 기소 당시 총리 공관의 경호원 윤아무개(37)씨가 “총리 공관 오찬이 끝나면 항상 총리가 먼저 나왔다”며 공소사실과 다른 증언을 하자, 검찰은 증인이 2명 더 남아 있었는데도 “일이 있어 밤 9시 반 이후에는 재판을 할 수 없다”며 양해를 구한 뒤 서둘러 재판을 끝냈다. 그리고 이튿날 오전 공판에서 검찰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듯 자리에서 일어나 “윤씨 말이 검찰 조사 때와 달라 어제 경호원들을 추가 조사하니 원래 말이 맞았다”고 했다. “일이 있다”고 양해를 구한 뒤 밤에 급히 경호원들을 불러 추가 조사를 한 것이다. 법원 안팎에서는 ‘얼마나 다급했으면…’ 하는 반응이 나왔다. 검찰은 윤씨를 위증죄로 기소하겠다고도 했다(그러나 아직까지도 기소하지 않았다).

다급한 검찰, 급조된 증인 신청하기도

이번에도 한씨가 진술을 번복한 날 검찰은 법정에서 갑작스레 ‘재정증인’을 신청했다. 재정증인은 미리 소환되지 않았는데 법정에서 바로 선정되는 증인이다. 한씨가 한 전 총리가 아닌 다른 2명에게 돈을 줬다고 했는데, 그 둘이 법정 밖에 와 있으니 바로 대질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검사는 재판 중간에 나가 전화 통화를 하기도 했고, 수사관은 헐떡이며 달려와 검찰석에 쪽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증인이 (갑자기) 어떻게 오게 됐냐”는 판사의 질문에 검찰은 “저희가 연락해 왔다”며 “여기서 1시간 걸리는 일산에 사는 사람들인데 달려왔다”고 했다. 재판부는 거부했다. ‘검찰 쪽과 달리, 변호인 입장에서는 전혀 증인 신문 준비가 안 돼 절차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취지였다. 검사의 표현은 비장했다. “저 법정 문만 열면 진실이 있습니다. 저 모퉁이만 돌면 바로 눈앞에 진실을 얘기해줄 사람이 있는데, 너무나 부당합니다.” 검사의 항변을 잠자코 듣던 판사는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오늘 당장 나올 의사가 있는 사람들이면 다음에도 나올 것입니다. 10m 달리기인지 1천m 달리기인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페이스 조절을 해야죠.”

지난봄과 이번 겨울을 데자뷔처럼 겹쳐 보는 이가 적잖지만, 검찰은 “이번엔 회계장부 등 객관적 자료들이 있어 다르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다시 진실은 법정 공방 과정에서 밝혀지게 됐다. 한 전 총리 쪽은 “1·2차 기소 모두 ‘표적’ 수사에 무리한 수사여서, 법정에서 하나하나 따져보면 승산이 있다”고 말한다. 실제 1차 기소 때 검찰의 수사 내용을 하나하나 법정에서 따져본 형사합의27부(재판장 김형두)의 재판은 법조계에서 ‘공판중심주의의 진수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법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후 이 재판부 공판을 수업의 일환으로 방청하고 감상문을 내기도 한다. 이번 재판도 그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재판이 흥미진진한 법정 드라마 같다’는 말 자체가 공판중심주의와 맞닿는다.

특수2부 ‘표적’ 기소장 또 들고 나오나

그러나 재판 결과를 떠나 ‘표적 수사’라는 비판은 검찰이 지고 가야 할 짐으로 보인다. 현재 검찰은 한 전 총리의 지역구였던 경기 고양 식사지구의 인허가 비리를 수사하고 있다. 이번엔 다시 1차 기소를 했던 특수2부다. 또다시 ‘한명숙’이라는 이름이 새로운 공소장에 등장할지 주목받고 있다. 표적 수사 논란은 ‘그랜저 검사’ ‘민간인 사찰’ 등 사건에서 부실 수사로 뭇매를 맞은 검찰로선 더욱 무거운 짐이다. 연달아 ‘진술 번복’이라는 철퇴를 맞은 검찰 쪽에서는 “이러다 ‘한명숙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자조까지 새나온다. 한명숙 전 총리의 눈가는 붉었다. 다음 공판은 2011년 1월4일에 열린다.

송경화 기자 한겨레 법조팀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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