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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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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모독’이라는 이름의 ‘국민모독’

정적·언론 길들이기에 활용되는 타이의 왕실모독법…

탄압 심해지면서 되레 왕실의 절대 권위에 대한 저항 불러
등록 2010-12-15 16:07 수정 2020-05-03 04:26

타이에 거주하는 한 한국인의 기고를 싣는다. 타이의 왕실모독법을 다룬 글로, 이 글 자체가 왕실모독법에 저촉돼 필자에게 불이익이 생길 수 있어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_편집자

112.

범죄신고 번호도, 간첩신고 번호도 아니다. 언제부턴가 타이 사회에서 이렇게 불리고, 웬만하면 그 뜻을 알아듣는 이 숫자는 타이 형법 112조, 왕실모독법을 가리킨다.

국왕도 법 남용 반대했지만…
지난 12월5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83살 생일을 맞아, 시민들이 기념행사장으로 향하는 국왕에게 사진 등을 들어 보이며 환호하고 있다.연합

지난 12월5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83살 생일을 맞아, 시민들이 기념행사장으로 향하는 국왕에게 사진 등을 들어 보이며 환호하고 있다.연합

입헌군주제의 나라 타이에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에 대한 백성의 경외감이 지난 수십 년 세월 동안 남달랐다는 건 알려진 대로다. 12월5일 치른 국왕의 83살 생일잔치도 여느 해와 다름없이 성대한 국가 행사였다. 생일을 전후로 거리 곳곳에는 국왕 혹은 국왕 부부의 대형 사진이 빽빽이 자리잡았고, 2007년 국왕이 입고 나와 유행시켰던 분홍색 셔츠를 입은 시민들의 총총걸음이 눈에 들어왔다. ‘방콕의 한강’인 짜오프라야 강 위로 화려한 배 수십 척이 축하행진을 했는가 하면, 999개의 폭죽과 99개의 풍선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12월6일치 현지 언론은 “국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900만 명의 메시지를 담겠다던 인터넷 사이트(9forking.com)에는 170만 개 메시지가 남겨졌다”고 전했다. ‘9’는 라마 9세인 푸미폰 국왕을 상징하는 숫자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향한다’는 진취적 의미까지 담고 있다.

그런데 왕실을 보호한다는 명목의 형법 112조는 이런 진취적 의미에 부응하지 못하는 대표적 사례다. 최근 몇 년간 이 법은 국내외 인권단체와 언론단체가 꾸준히 비판해왔다.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는 “이 법이 남용되거나 너무 광범위하게 적용되지 않도록 경찰 국장에게 일렀다”고 면피성 발언을 한 바 있다. 균형적 시각을 보여온 출라롱꼰대학 띠띠난 퐁수디락 교수(정치학)는 “이 법이 개혁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 법의 남용이 야기하는 인권침해에 침묵하던 국제앰네스티도 올해 초 “타이 정부는 왕실모독법 위반 사례 급증이 반영하듯, 표현의 자유가 퇴보하는 현실을 뒤집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푸미폰 국왕이 2005년에 이어 이번 생일상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법은 평화를 유지하려는 것이지 누군가를 강제하려는 게 아니다. 만일 누군가에게 강요한다면 그건 독재나 다름없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타이 독립 인터넷 언론 국장 치라눅 프렘차이폰은 이 법의 남용이 낳은 대표적인 희생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라눅은 지난 9월24일 헝가리에서 개최된 언론자유 국제포럼을 마치고 오는 길에 여권을 검사하던 이민성에 연행됐다. 이민성 경찰은 타이 동북부 콘캔 지역 경찰서로 그를 데려가다가 중간 지점인 코랏 지역에서 ‘마중 나온’ 콘캔 지역 경찰들에게 범죄인을 인도하듯 그를 ‘넘겼다’. “무슨 혐의로 연행하는지 어리둥절해했는데, 이민성 경찰은 연행하는 임무만 수행할 뿐 아무것도 모르더라. 밤 11시30분께, 콘캔 지역 경찰서에 도착한 뒤에야 왜 연행됐는지 설명을 들었다.”

댓글 삭제 안 하면 징역 70년?

그가 연행된 이유는 2년 전 가 게재한 인터뷰 기사에 붙은 댓글 때문이다. 영화관에서 ‘왕국가’가 연주되면 모두 기립해야 하는데,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실모독법 위반에까지 이른 청년을 인터뷰한 기사였다. 댓글 200개 가운데 5개가 왕실모독법과 컴퓨터범죄법(CCA) 위반으로 걸렸다. 콘캔 지역에 사는 한 부동산업자가 치라눅을 고발한 것이다. 치라눅은 “충격을 받았다. 이 문제가 영원히 갈 것 같다는 생각에 서글펐다”고 말했다.

이미 2008년에 치라눅은 의 또 다른 기사 댓글로 컴퓨터범죄법 위반 소송에 휘말렸다. 사이트 책임자로서 문제의 댓글을 ‘빠르게 제거하지 않았다’는 게 죄목이었다. 첫 번째 소송은 내년 2월부터 재판이 진행될 예정이고, 유죄로 판결나면 최대 20년형을 받을 수도 있다. 이번 건은 최대 50년형을 받을 수 있다. 별개로 진행되는 두 소송 모두에서 지면 최대 70년형도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왕실모독법과 컴퓨터범죄법이 정적이나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데 효율적으로 악용돼온 배경에는 ‘국가안보’ 논리가 있다. 컴퓨터범죄법은 국가안보를 강조하고, 112조가 보호하려는 왕실은 국가안보의 관점으로 이해되는 타이 최고기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컴퓨터범죄법 14조와 15조는 댓글을 단 당사자뿐만 아니라 사이트 운영자까지 똑같이 처벌받게 해놓았다. 기자는 기자대로 자기검열에 열심이고, 댓글은 운영자까지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라 언론의 자유는 구석구석에서 도전받고 있다. 컴퓨터범죄법이 도입된 2007년 7월 이래 모두 7만4686개 사이트가 차단됐는데, 왕실모독으로 차단된 곳이 5만7330건으로 가장 많다.

“(부정부패 혐의로 해외 도피 중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정권이 민간독재였다면, 지금은 민간 정부가 있다 한들 사실상 군부독재다. 탁신은 밀착 감시나 교묘한 언론 조종을 이용했지만, 지금은 총을 쏘고 검열이 넘쳐나는 등 아주 노골적이다.”

두 건의 고발에 말려든 치라눅의 거침없는 비판이다. 지난 4월 이래 접근이 차단된 는 12월 초 현재 서버 제공 통신사에 따라 불규칙하게 열릴 뿐 여전히 폐쇄 중이다. 폐쇄가 부당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권력의 손을 들어줬다.

치라눅은 그나마 보석금 20만밧(약 760만원)을 내고 석방됐다. 이 돈이 없거나 보석이 거부된 이들은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한 예로 2년 전 방콕 사남루앙 광장에서 2006년 쿠데타에 대한 비판 연설을 하다 왕실모독법으로 18년형을 선고받은 찬촌실파쿨(47)은 보석이 계속 거부된 채 비공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이처럼 국가안보와 왕실보호를 명목으로 사법권이 남용되면서 이제 진정한 반왕실 정서까지 낳고 있다. 지난 4~5월 90여 명의 희생자를 낳은 ‘레드셔츠’(친탁신 반정부 시위대) 유혈 진압도 변수가 됐다.

왕실 존중하던 반정부 시위대의 변화

지난 9월19일, 4개월 전의 ‘5·19 유혈 진압’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4년 전 (탁신을 축출한) ‘9·19 쿠테타’를 규탄하며 수도 방콕의 중심가 라차프라송에 몰려든 시위대 일부는 5월 진압 당시 불타올랐던 건물의 건설 현장에 “망할 X가 살인과 사격을 지시했다”등 왕실모독으로 해석될 만한 낙서들을 남겼다. 불가침의 성역으로 여겨지는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예상치 못한 낙서에 당국은 무척 당황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이 정치 분쟁을 누구보다 깊이 취재해온 독일 사진가 닉 노스티츠의 말을 들어보자.

“타이 왕실에 대한 공개적 비판이 증가하는 요즘 상황은 타이 사회의 정치 대립이 한계점 넘어섰음을 보여준다. 군부와 정권의 최후 대응이 어떻게 갈지 예측불허고, 아주 우려스러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레드셔츠 공식 조직으로 활동해온 반독재민주주의연합(UDD)의 권한대행 티다 타원사테 토지라칸은 최근 영자 일간지 과의 인터뷰에서 “레드셔츠 내에 반왕정주의자는 단 5%도 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레드셔츠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페이스북 등 온라인 공간에 ‘그의 개인 생각일 뿐’이라는 댓글이 달릴 만큼 좀처럼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언론인의 말은 왕실의 권위가 도전받는 오늘날 타이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국민이 더 이상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데) 두려움조차 느끼지 않는 지경에 이르면 왕실모독법 같은 조처들이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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