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좍 가면 좋겠어. 왜 자꾸 주저하는 거야? 아 마흔 살…. 빨리 끝내고 분장실 가서 김밥이나 먹으려고 하는 거야?”
연출가 기국서씨가 화가 났다. 남자 주연배우 하성광씨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다. 기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연습 중인 공연장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고 몇 마디를 이어갔다. “죽 가란 말이야, 그냥. 광기 있잖아. 에너지. 그냥 스트레이트로 가는 거야. 지금 통째로 에너지가 떨어지고 있잖아.”
9월3일 오후 서울 혜화동 창조아트센터 6층 공연장. 다음날부터 공연을 시작하는 연극 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모두 모여 리허설 직전 마지막 연습이 한창이다. 모두 극단 ‘76’ 멤버다. 평소 배우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이기로 이름난 연출가 기국서씨가 서슴없이 연기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자 공연장에는 일순 긴장감이 감돈다. 그리고 다시 연기가 이어진다.
철거민인 주인공들이 시대를 향한 불만을 여지없이 드러내야 하는데, 자꾸 배우들 연기의 톤이 낮아지는 순간 기씨는 어김없이 끼어들었다. 공연 중 관객의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려면 이 부분에서 잘 들어야 그 다음에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괜히 비유하고 은유할 필요 없다. 작품 제목은 이미 관객에게 작품의 성격이 무엇인지 선전포고를 한다. 제목에서 용산 다음에 ‘참사’라는 단어를 덧붙이면 된다. 작품은 묻는다. “발생한 지 200일을 훌쩍 넘긴 용산 참사, 넌 도대체 뭐냐?” 그러고는 추궁한다. “그걸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우리는 또 무슨 생각을 갖고 이 세상을 사는 거냐?”라고.
작품은 용산 망루에 오른 50대 부부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시골에서 올라온 남자는 이미 한 차례 산동네 철거민을 경험했다. 개발독재 시절 용역 깡패들에게 쫓겨나보기도 했고, 가족들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뻗는 걸 지켜보는 경험도 했다. 그리고 돈 좀 벌자고 장사를 하다, 어쩌다 보니 망루에까지 올랐다.
이 부부는 참사와 연관된 이들을 계속 무대에서 맞이한다. 서울 강남의 복부인부터 시작해 경찰청장, 시공을 맡은 재벌 건설사 회장, 독립영화 감독, 기자들, 심지어 대통령도 차례차례 등장한다. 물론 그들은 가상의 존재이자 환영 속 인물이다. 새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들을 위한 의자가 하나둘 늘어난다. 마지막에 의자는 총 18개다. 주연배우들은 그 가상의 존재들을 앉혀놓고 일종의 마임을 한다. 마지막 순간 철거민들은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무대에는 의자가 남는다. 의자는 네발 달린 목재가 아니라, 개별 존재를 형상화한 생물이 된다. 부부의 아들이자 대변인이 무대에 등장한 바로 뒤다. 하지만 그 대변인은 말을 하지 못하는 인물임이 밝혀진다. 그래서 세상은 부조리하다.
고립과 소외 다룬 이오네스코 원작로 유명한 사뮈엘 베케트와 함께 현대 부조리극의 대표 작가로 손꼽히는 루마니아 작가 에우제네 이오네스코(1909~94)의 희곡 을 연출가 기씨가 각색했다. 이오네스코는 와 같은 작품을 통해 전위적 형식의 극을 무대에 올려 주목받았다. 은 원작 의 형식을 그대로 빌린다. 원작은 외딴 섬에 사는 노부부가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의자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을 하나둘 불러모으는 형식을 통해 발산한 뒤 자살하는 줄거리로 돼 있다. 섬이 표상하는 고립과 소외. 2009년 1월20일 새벽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용산구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불탄 망루처럼 절묘하게 이를 상징하는 공간이 또 있을까.
무대 구성은 복잡하지 않다. 양철로 만든 망루와, 시너·휘발유가 담겼을 소주병 등이 전부다. 작품의 주제의식과 이를 소화하는 배우의 연기로 승부를 거는 작품이다.
영화 이나 에서 보던 것처럼, 살아 숨쉬는 대사의 힘이 느껴지는 공연이다. “아파트는 고향이 아니야”라거나 “서류는 법이니까요” 같은 대사는 우리 시대에 얼마나 절묘하게 받아들여지는가. 사회 기득권층을 불러놓고는 던지는 “대학도 같은 대학이라네” “교회도 같은 덴가 봐요”와 같은 대사에서는 이 작품이 사회의 모순을 굳이 에둘러 가려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경찰청장을 가리키면서 내뱉는 대사, “저 양반은 법 위에 있다니까 그래”를 들으며 기자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이 대목에서 강희락 경찰청장이 시비를 건다면, 한바탕 토론 난장을 벌일 수도 있겠다).
연출가 기씨는 에둘러 가고자 하지 않았다. 원작이 가진 말의 유희와 과장된 몸짓이 주는 재미를 다소 포기하더라도, 예술은 어느 정도 사회상을 반영해야 한다는 기씨의 고집이 그대로 투영됐다. 따라서 한국의 기득권층이 보기엔 불편할 것이다. 기씨는 “아주 갖다대자고 했다”고 말했다. 기씨와 배우들은 용산 남일당 건물을 찾아 직접 참배하고 유가족을 만나는 과정을 통해 극의 리얼리티를 살렸다. 유가족도 공연에 초대했다. 유가족보다는 용산 참사의 배경을 이루는 시대적 문제에 동감하는, 아니 오히려 동감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관람을 권한다.
조·중·동 기자는 가족 동반 삼가길공연은 9월4일부터 10월11일까지 계속된다. 평일 오후 8시, 토요일 오후 4시30분·7시30분, 일요일 오후 5시(월요일은 쉼). 문의 02-747-7001.
P.S. 이른바 ‘조·중·동’ 기자들은 정신 건강 측면에서 가족과 함께 보는 일은 피하는 게 좋겠다. 힌트를 주자면, 극중에 ‘조 기자님’과 ‘중 기자님’과 ‘동 기자님’이 등장한다. 그리고 또 하나, 마지막 극적 반전을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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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브 차용이 절묘하다.
=원작으로 2월에 연습했다. 작품의 주제가 고립과 소외다. 1월20일 벌어진 용산 참사의 망루가 떠오르더라. 원작의 대령은 경찰서장으로, 황제는 대통령으로 변환이 됐다.
-리얼리티를 살리는 문제와 작품이 지극히 현실 반영적일 때 일어나는 공연한 정치적 논란 사이에서 고민했을 것 같은데.
=연극은 시대상을 반영해야 한다. 요즘 그렇지 않은 게 너무 많다. 괜히 웃기려고만 하기도 하고. 이런 일이 있으면 책도 영화도 현실과 연결해야 하지 않나? 그나마 연극은 제작이 (상대적으로) 쉬우니까….
-현실 속 사건이라 희곡 구성이 부담스러웠을 것 같은데.
=원작의 미학적 관점은 두 가지다. 언어의 유희와 몸으로 관객을 웃기는 파스(farce·해학을 기발하게 표현함으로써 관객을 웃기는 연극 혹은 기법)다. 또한 (작품 원제대로) 의자가 많아야 한다. 이 작품은 의자가 생명력을 가짐으로써 미학이 발생한다. (이번처럼) 작은 공연장에서는 구현하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모두 쉽지 않은 상황에서, 뉘앙스로 에둘러 표현하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위치를 떠나 자연인 기국서로서 용산 참사를 어떻게 판단하나.
=이런 비극이 어디 있는가. 희생자들이 냉동고에 들어간 지 200일이 넘었다. 좌우 이념을 떠나 휴머니즘적 측면에서 이게 말이 되는가. 한국 사람들은 감정적 측면이 강하다. 법치주의를 떠나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될 일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한이 깊어지고 있다. 왜 풀지 못하는가. 이게 대인(大人)이 갈 길인가.
-‘관객의 눈물을 뽑겠다’고 했는데, 신파로 가는 것 아닌가.
=우린 다큐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멜랑콜리, 이런 것 좋아하지 않는다. 3월 공연 때도 우는 관객이 많았다.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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