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내 9개월의 기록을 헤집고 다닌 ‘바퀴벌레’

전자우편 압수수색당한 YTN 기자 기고
“마음껏 뜯어보고 공개해도 된다고 생각한 잔인함과 가벼움에 분노”
등록 2009-07-07 14:41 수정 2020-05-03 04:25
#장면1

정병두 서울중앙지검 1차장검사가 문화방송 〈PD수첩〉 수사 결과를 발표하던 날, 사실 수사 결과는 미리 조금씩 알려져왔기 때문에 김 빠진 맥주에 가까웠습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PD수첩〉 제작진의 전자우편 공개였습니다. 정 차장검사는 작가의 전자우편을 거침없이 공개했습니다. ‘〈PD수첩〉 수사 결과’ 발표가 아니라 ‘〈PD수첩〉 제작진 전자우편 내용’ 발표장이 돼버렸습니다. 검찰은 제작진이 현저하게 공평성을 잃은 것이 맞는지에 대한 국민의 판단에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PD수첩〉 제작진의 사상과 양심을 국민들이 심판해달라는 얘깁니다.

지난 3월22일 전국언론노조 YTN 지부 노조원들이 노종면 노조위원장 등 조합원 4명의 체포에 항의하며 총파업 출정식과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지난 3월22일 전국언론노조 YTN 지부 노조원들이 노종면 노조위원장 등 조합원 4명의 체포에 항의하며 총파업 출정식과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PD수첩〉 수사인가, 제작진 전자우편 수사인가

법정에서 증거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내용을 수사 결과 발표장에서 공개한 것은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었습니다. 1년 만에 수사 결과를 내놓으면서 여론에 호소해야 할 만큼 급했나 하는 측은함마저 들었습니다. 공개 여부를 놓고 내부적으로 고민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그랬을 겁니다. 사생활 침해 논란은 물론 통신비밀보호법을 어기는 일인지도 알아봤어야 했을 테니까요. 대한민국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실정법을 위반하는 경우가 있어선 안 될 테니까요.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도 아닌 개인의 전자우편을 수사기관이 마음껏 뜯어본 뒤 이를 마음대로 공개해도 된다고 생각한 잔인함과 가벼움입니다. 전자우편 압수수색이라는 쉬운 방법으로 피의자의 정신세계를 마구 해체해 입맛에 맞는 부분만 매스컴에 공개하다니요…. 제게도 그런 상황이 생길 수 있었기에 가슴이 꽉 막혔습니다.

#장면2

저는 지난 2월부터 서울중앙지검에 출입하고 있습니다. 매일 이곳에 출근해 기사를 씁니다. 그런데 지난 6월 제 전자우편을 검찰에서 들여다봤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검찰은 아니더군요. 경찰이었습니다. 경찰이 압수영장을 신청했고 검찰은 그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해 법원에 청구해준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YTN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 과정에서) 선후배 20명과 함께 업무방해 혐의로 회사로부터 고소된 적이 있습니다. 여하튼 제 문제는 지난 5월 종결됐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전자우편을 수사기관이 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말로만 듣던 전자우편 압수수색.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제 전자우편을 훑고 지나간 겁니다. ‘왜? 언제? 무슨 내용을?…’ 아무것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바퀴벌레 한 마리가 제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 듯한 느낌이랄까. 경찰이 뒤진 제 전자우편은 지난해 7월부터 올해 3월까지, 자그마치 9개월치나 됩니다.

기사 원고도 압수수색당할까 걱정

그들은 제 인생의 9개월을 마치 녹화된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화면을 재생하듯이 들여다봤을 겁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을 흥미롭게 봤을까요? 재미있는 내용이 있긴 있었을까요? 경찰은 제 전자우편 중에서 어떤 부분을 보고 싶었을까요? 누군가와 은밀한 지령을 주고받은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제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였을까요? 아니면 별 관심은 없지만 혹시 뭐 하나 걸릴지도 모르니까 무턱대고 제 인생 9개월의 기록을 일단 압수해놓은 것일까요? 특별히 수사에 필요한 건 아니지만 너무나 쉽게 YTN 기자들의 행적과 사상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에 전자우편을 압수한 건 아닐까요? 혹시 모르니까 일단 챙겨둔 게 아니냐는 겁니다. 저희 생각과 저희 사생활과 저희 취재 정보와 저희 스케줄을 말이죠.

수사기관에 묻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을 이렇게도 간단히 무시했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뭡니까? 그래도 누구처럼 전자우편 내용이 매스컴에 공개된 건 아니니까 다행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검찰이나 경찰이 너무나 당연하게 피의자들의 전자우편을 매스컴에 공개하는 인권 상실의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 제 전자우편에서 보내질 이 원고도 언젠가 압수수색 대상이 될까 걱정됩니다.

신호 YTN 사회부 기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