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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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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앞에 사죄한 18년 전의 진실

‘군 의문사 남현진씨 사건’ 당시 부대 고참들 “구타와 모욕이 그를 자살로 내몰았다” 고백
등록 2009-05-22 15:21 수정 2020-05-03 04:25

연두색 소나무꽃을 타고 흐른 봄비가 흐느끼듯 대지를 적시던 5월12일 낮.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 묘지의 한 무덤 앞에 무거운 표정의 40∼50대 사내 4명이 나란히 섰다. 그들 앞에는 수박과 떡, 산적, 과일 등 제수용 음식이 차려져 있다. 향에서 피어나는 연기가 무거운 정적 속에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두 번의 큰절과 한 번의 반절을 마친 그들이 돗자리 위에 둘러앉았다. 제를 지내고 남은 청주가 작은 종이컵에 담겨 한 잔씩 돌았다. 웃음 한 점 찾을 수 없는 얼굴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하지만 되새겨야만 하는 기억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이들의 낯이었다.

5월12일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 묘역의 고 남현진 이병 묘소에서 당시 같은 부대원이던 이들이 절을 하고 있다(서 있는 이는 김학철 진실화해위 조사팀장). 이들은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18년 전 남 이병을 구타하고 이런 사실을 은폐했음을 털어놓아 진실이 밝혀지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5월12일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 묘역의 고 남현진 이병 묘소에서 당시 같은 부대원이던 이들이 절을 하고 있다(서 있는 이는 김학철 진실화해위 조사팀장). 이들은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18년 전 남 이병을 구타하고 이런 사실을 은폐했음을 털어놓아 진실이 밝혀지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이제 40~50대가 된 네 사람 모여

그들의 머릿속은 18년 전 어느 날에 맞닿아 있었다. 무덤의 주인인 고 남현진(사망 당시 21살)씨와 네 명의 중년 남성은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다. 황아무개씨는 중대장, 서아무개씨는 소대장이었다. 홍아무개씨와 김아무개씨는 당시 일병 계급이었다. 그리고 이 무덤의 주인인 고 남현진씨는 당시 갓 자대 배치를 받은 이등병이었다. 청주를 몇 잔 마시고 상기된 낯빛의 황씨가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제가 불교도인데요. 사실 오늘 포항에서 올라오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안 오면 나중에 저승 가서 현진이 볼 면목이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사건이 난 건 1991년 2월3일이었다. 오후 3시께 경기 북부의 한 전방 사단 소총부대에서 남현진 이병이 부대 울타리 바깥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아 숨진 채로 발견됐다. 일반 전초(GOP) 근무를 앞두고 미리 체험해보는 이른바 ‘친숙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바로 다음날이었다. 부검 결과, 남 이병 몸에서는 일부 피부가 까진 흔적과 멍자국, 그리고 손가락 끝에서는 누군가에게 맞는 상황에서 막다 생긴 듯한 상처도 발견됐다. 하지만 타살로 볼 만한 정황은 없었다. 같은 내무반의 부대원들도 헌병대 조사에서 딱히 그가 자살할 만한 일은 없었다고 진술했다. 결국 부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남 이병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결론났다.

군대 의문사 사건이 늘 그렇듯, 유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다. 멀쩡했던,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던 아들이자 동생이자 오빠가 어느 날 단순한 적응 문제 때문에 본인 목에 줄을 걸었다는 부대의 설명을 받아들일 유가족은 없다. 남씨는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88학번에 입학한 뒤 총학생회 간부 활동도 하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통일선봉대로도 뛰는 등 의욕에 찬 삶을 살던 중 입대했다. 방학 때면 공사판 막일을 해 용돈을 벌었으니, 체력이 허약하지도 않았다. 유가족들과 외국어대 학생들이 남 이병의 시신이 안치된 벽제병원 영안실에서 20여 일 농성을 벌이기도 했으나 군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달 25일 결국 장례를 치렀다.

당시 조사 때 “구타 관행 침묵하라” 지시

2남1녀 가운데 둘째아들의 억울한 죽음은 가족들에게 크나큰 시련이었다. 그러나 눈 위에 또 서리가 내렸다. 경북 예천의 고향 마을에서 수군거림이 들렸다. “저 집 아들이 학생운동 하다 군대 갔는데 죽었대….” 그해 10월 가족들은 허둥지둥 고향을 등졌다. 경기 안산에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는 심장병을 얻어 앓아눕기도 했다. 남 이병보다 6살 위 맏형인 준진씨는 “일이 벌어지고 나서 (주변의) 시선이 상당히 차가웠다고 하더라”며 “부랴부랴 정리하는 둥 마는 둥 고향을 떴는데, 나는 그게 가장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시간은 무심히 흘렀다. 억울한 죽음은 금세 잊혀졌다. 김대중 정부 들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생겼다. 유족들은 진상을 밝혀달라고 위원회에 신청했다. 하지만 부대 관계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진상규명 불능 결정이 났다. 유족들은 재심을 요청했지만, 같은 결론이 또 나왔다. 왜곡된 한국 현대사의 피해자가 어디 한둘이랴.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했다. 가슴에 누군가를 묻고 살던 이들은 너도나도 달려갔다. 남 이병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3월 위원회는 당시 남 이병의 부대에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구타 관행이 있었고 남 이병도 그 희생자였음을 밝혀냈다. 동시에 “국가는 사망한 남현진의 사망 구분에 관한 사항을 재심의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명예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유가족을 위로하고 화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이런 결과를 얻는 데 황씨 등 4명의 진술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 특히 당시 직속 고참이던 홍씨의 고백이 얽힌 실타래를 끊는 가위가 됐다. 홍씨는 사고가 난 날 본인도 상병들에게 얻어맞았고, 그 뒤 자신이 직접 남 이병을 구타하고 욕을 했다고 인정했다. 남 이병이 주검으로 발견되기 불과 두세 시간 전의 일이다. 당시 소대장과 중대장도 자신들의 지휘 책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헌병대 조사에 앞서 “구타 관행에 대해 침묵하라”는 지시를 내린 사실도 털어놓았다. 자칫 영원히 묻힐 뻔한 또 하나의 진실이 어둠을 뚫고 밝은 햇살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고 남현진 이병의 아버지와 여동생이 당시 부대원들과 마련된 속죄와 용서의 자리를 빠져나오고 있다. 진정한 용서까지는 고통의 시간이 더 필요함을 확인한 자리였다(왼쪽). 남 이병 영정 사진에 이날 용서를 구하러 온 부대원들의 얼굴이 투영됐다. 이들은 남 이병의 명복을 빌었다(오른쪽).

고 남현진 이병의 아버지와 여동생이 당시 부대원들과 마련된 속죄와 용서의 자리를 빠져나오고 있다. 진정한 용서까지는 고통의 시간이 더 필요함을 확인한 자리였다(왼쪽). 남 이병 영정 사진에 이날 용서를 구하러 온 부대원들의 얼굴이 투영됐다. 이들은 남 이병의 명복을 빌었다(오른쪽).

학생운동 이유로 요주의 대상에

고백이 드러낸 진실은 이랬다. 당시 부대에는 상병-일병-이병으로 이어지는 계단식 구타 관행이 뿌리 깊었다. 일부 다른 부대에서도 그랬듯, 바닥조·군화조·침상조·식기조 등 서열화한 역할 분담 속에 군기교육이 실시됐다. 신병들은 군가, 병영수칙, 근무수칙, 고참서열, 관등성명 등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주먹을 맞고 얼차려에 시달렸다. 대걸레나 각목으로 머리 등을 얻어맞거나 정강이를 까이고, 치약 뚜껑에 머리를 박는 것도 구타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남 이병은 학생운동을 하다 왔다는 이유로 내무반에서도 요주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친숙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예전에 구타당한 무릎이 좋지 않아 행렬에서 낙오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홍씨도 상병들에게 쥐어터진 뒤 남 이병을 똑바로 교육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홍씨는 위원회 조사에서 “남현진에게 PX에서 음식을 사갖고 와서 오물장에서 대기하라고 했는데, 오물장 철조망 밖 영외로 나가 있는 걸 보고 화가 나서 정신없이 구타하면서 인격모독적인 말을 한 뒤 나 먼저 혼자서 영내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조사 과정에서 ‘일단은 이 사건이 타살은 아닌 게 맞다’고 선을 그어주고, 그들이 예전에 했던 진술의 모순을 끈질기게 추궁한 결과 고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백은 외롭고 괴로운 것이다. 가슴에 묻어둔 응어리를 끄집어내기에 18년은 긴 시간이다. 이들은 조사 과정에서 고백에 이어 유가족에게도 사과의 뜻을 밝혔다. 홍씨는 “가슴이 아픕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고…. 남현진이 군에 와서 저를 만나고… 이렇게 돼서 미안한 마음입니다. 유족에게는 사죄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 것이 더 죄송스럽고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역시 남 이병을 구타한 경험이 있는 김씨도 반성했다. “솔직하게 마음이 많이 아프고, 남현진이 우리로 인해 죽었다면 우리는 크게 반성해야 하며, 저도 자식을 키워보니까 알 것 같은데 마음이 더욱 아프고, 이 일로 오라고 할 때마다 남현진을 구타하고 가혹행위를 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위원회에서 자리를 마련해준다면 용기를 내서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받는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5월12일 모란공원 묘역에 이들 네 명이 마주 선 데는 이런 사연이 숨어 있었다. 17∼18년 전 군을 제대한 뒤 이들이 얼굴을 마주하기는 이날이 처음이라고 했다. 네 명은 함께 차에 올라타고 위원회로 향했다. 이제 가족과의 대면이 기다리고 있다.

사죄받은 유족들의 침묵과 흐느낌

사죄는 고백보다 힘들었다. 오후 3시 서울 필동 진실화해위원회 대회의실에 유족들이 하나둘 입장했다. 남 이병의 아버지와 형 준진씨, 그리고 여동생. 안병욱 위원장이 “이 자리가 어려운 자리임이 틀림없습니다. 오랫동안 조사한 결과 숨겨진 진실이 밝혀졌습니다”라며 사과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중대장이었던 황씨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그때 부대를 좀더 열심히 관리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91년 이후 계속 마음의 짐을 갖고 있었습니다.” ‘흐흑∼.’ 남 이병의 여동생 입에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소대장 서씨도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우리가 마음으로나마 속죄하고 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모기만 한 소리로 말했다. 얼굴을 들지 못하던 홍씨와 김씨도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죄가 고백보다 어렵다지만, 역시 가장 어려운 건 용서다. 형 준진씨는 “동료·상사분들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한꺼번에 이해하고 용서하기는 유가족 입장에서 쉽지 않습니다. 잘못을 빌 수 있는 용기가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대화보다 침묵의 시간이 더 길었던 만남이 끝나자, 조용히 앉아 있던 남 이병의 아버지가 일어서 네 명과 소리 없는 악수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가족들에게 이날 자리는 용서의 시작일 뿐이었다. 국가가 남 이병의 죽음을 순직으로 인정하고, 국립묘지에 이장하는 한편, 진심 어린 사과를 할 때 용서는 마무리될 수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김준곤 상임위원은 “우리 위원회가 처리한 군 의문사 사건에서 가해자의 고백으로 사건이 해결되고 이렇게 화해의 자리까지 만들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해자는 자기 주변의 가족, 친구 등에게서 신망을 잃고 싶지 않아 번번이 거짓말을 한다”며 “진실을 이야기한 이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5월18일께 이번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 내용을 공개하고 국가 차원의 사과를 촉구할 계획이다. 개인의 힘겨운 고백으로 드러난 진실과 진심 어린 사죄로 마련된 화해의 씨앗에 물을 주고 볕을 쐬는 건 국가의 몫이다.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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