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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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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잔 마신 ‘촛불’의 다음 진화는?

시흥 시장 낙선한 ‘촛불후보’ 최준열…
풀뿌리 시민단체는 정당정치에 대한 고민을 어떻게 풀어낼까
등록 2009-05-13 02:58 수정 2020-05-02 19:25

지난 5월6일 만난 그의 얼굴은 까맸다. 선거운동의 흔적이다. 입가 근육엔 피로가 뭉쳐 있다. 내미는 명함에 ‘산부인과 전문의’ 직함이 적혀 있다. 그는 경기 시흥시에서 ㅈ병원을 운영한다. 서민들이 모여사는 이 도시에서 산부인과로는 가장 오래됐다. 그래도 오늘은 ‘명의’ 최준열이 아니라 ‘촛불 후보’ 최준열을 만나는 자리다.
“선거 때 쓰신 명함은 없나요?”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전부 태워버렸어요. 혹시 아내가 몇 개 갖고 있는지 모르겠네….” 그 말에 담긴 사연을 이해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는 비정이 지배하는 정치의 생리를 새롭게 체득하고 있었다. 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 만에 선거용 명함을 모두 없애면서, 아마 그는 자신의 혈관을 돌던 낭만적 적혈구의 일부를 뽑아내려 했을 것이다.

최준열 원장

최준열 원장

13.5%, 0.9%, 9.9%… 3:0 완패

최준열 원장은 지난 4·29 재보선에서 시흥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법적으로는 무소속, 통칭으로는 시민 후보, 맥락으로 보면 촛불 후보였다. 지역 풀뿌리 시민단체들이 그를 옹립했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그를 지원했다. 1년 전 촛불집회 이후 시·군·구 단위로 스며든 ‘일상정치’의 동력이 그의 출마로 귀결된 셈이었다.

그러나 낙선했다. 그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출마한 다른 지역의 시민 후보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민희 서울시의원 후보(광진구)는 13.5%의 지지를 얻었지만 한나라당(46.5%)과 민주당(40.0%) 후보에는 미치지 못했다. 채수범 경북 경주 국회의원 후보는 0.9%를 얻어 출마 후보 7명 가운데 최하위에 머물렀다.

재보선 결과를 두고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심판했다”는 해석이 나왔지만, 선거에서 진 것은 한나라당만이 아니었다. 국회의원 선거구 5곳에서 모두 패한 한나라당을 비꼬아 “히딩크 스코어(0 대 5)로 졌다”는 말이 나돌았는데, 촛불 후보 3명을 기준으로 잡으면 3 대 0의 완패다. 그 가운데 한 명이던 최준열 원장은 9.9%의 지지를 얻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당선은 기대하지 않았지요. 그랬다면 기적이고 신화가 됐겠지만. 무소속 후보로서 의미 있는 득표를 하겠다고 도전한 것이지 꼭 당선돼야겠다는 것은 아니었어요. 다만 10%는 넘을 것으로 봤는데, 거기엔 조금 못 미쳤어요. 그게 좀 아쉽지요. (10%에) 몇십 표 모자랐어요.”

28만3천여 명의 시흥시 유권자 가운데 투표 참여자는 5만5997명(19.8%)이었다. 최 원장은 5496표를 얻었다. 당선자인 민주당 김윤식 후보는 2만5천여 표, 경쟁자였던 한나라당 노용수 후보는 2만4천여 표를 얻었다. 무소속으로 출마해 기성 정당 후보가 얻은 표의 20% 정도를 얻었으니 선전한 셈인가.

다른 잣대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선거 직전 여론조사에서 최준열 시민 후보는 최고 14.5%의 지지율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 득표는 이에 미치지 못했다. 주민소환운동 참여자의 규모도 살펴야 한다. 지난해 여름, 부패한 당시 시장의 주민소환운동에 참여한 시흥시민은 4만6천여 명이었다. 그 운동 덕분에 이번 보궐선거가 실시됐다. 최 후보는 그 운동의 지도부였다. 그러나 그가 이번에 얻은 5천여 표는 당시 주민소환 서명자의 12%에 불과하다.

“재산 신고, 우리 모두 ‘초보’라서 그랬어요”

“실수를 했어요. 회계사에게 맡겨 선관위에 재산 신고를 하게 했는데, 이 병원 건물이 (신고 내역에서) 빠져버렸어요. 순전히 실수예요. 건물 대지도 신고했고, 건물에 대한 세금도 꼬박꼬박 냈어요. 어디 숨겨둔 땅도 아니고 시내에 버젓이 서 있는 건물을 굳이 감출 이유가 없지요. 우리 모두 ‘초보’라서 그랬어요. 나중에 보완해서 신고했습니다. 땅투기 의혹도 나왔는데, 200평 정도의 주말농장을 합법적으로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 때문에 시민 후보 자격에 대한 내부 논란이 있었죠.”

“가장 큰 위기였다”고 그는 회고했다. 후보를 사퇴해야 한다 안 된다, 내부 논의가 분분했다. 갑론을박하느라 한나절 동안 선거운동을 접었다. 이 대목에 관해 그는 ‘비보도’를 전제로 긴 이야기를 했다. 자신을 주저앉히려고 다른 정당 후보 쪽에서 흑색선전을 펼쳤고, 이것이 시민 후보 선거운동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줬다는 취지였다. 그는 후보 사퇴 논란이 선거운동의 기세를 많이 약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제가 뇌물을 받았다면 사퇴했을 겁니다. 그런데 아니잖아요. (재산 신고와 관련된) 잘못이 드러나면 5년 동안 피선거권을 제한당한다고 누군가 염려했는데, 저는 상관없다고 했어요. 정치를 안 해도 좋으니까,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되잖아요.”

그의 설명은 설득력과 일관성을 갖추고 있었다. 억울하고 분한 심정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정치판에서는 ‘초보자’라 하여 양보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기대했다면 잘못이다. 양심적인 시민운동가였던 그의 ‘안전’을 상대 정당과 후보들이 고이 지켜줄 이유는 없다. 상처 입은 사슴처럼 헐떡이는 그는 다음 선거에도 출마할 것인가.

“장고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선거에 출마하더라도 무소속 후보는 아닐 겁니다. 저는 진보 정당에 후원비 한 번 낸 적이 없는데, 이번에 보니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사람들은 정말 ‘뜻’으로 움직이더군요.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은 돈을 넣어야 돌아가는 ‘자판기’거든요.”

그는 정당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듣기 좋은 말의 자리에 ‘시민’을 넣건 ‘촛불’을 붙이건, 무소속 후보는 무소속에 불과하다는 선거 정치의 장벽을 절감한 귀결이기도 하다.

그의 출발은 소박했다. 지방 국립대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는 인천의 종합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했다. 서민들이 모여사는 작은 도시인 이곳에 산부인과 병원을 연 것이 1991년이다. 병원이 자리를 잡을 무렵부터 지역 신문에 칼럼을 썼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 빈민운동을 펼쳤던 고 제정구 의원실 쪽에서 연락이 왔다. 지역 시민운동을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시흥YMCA를 만드는 일의 ‘총대’를 멨다. 시민운동에도 돈은 필요한데, 그에겐 돈이 있었고 뜻도 있었다. 1999년 창립한 시흥YMCA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시흥에서 4명의 시장이 잇따라 부패 혐의로 사법처리되는 일을 겪으면서 그의 사회적 더듬이는 더욱 예민해졌다. 부패의 고리를 끊고 깨끗한 정치를 시작하겠다는 이번 선거 출마의 결심까지, 그는 정치 공학보다는 시민적 감성에 더 크게 기댔다.

그러나 선거판은 달랐다. 그를 마중나온 것은 촛불 후보에 대한 환대가 아니었다.

“그냥 지긋지긋해하더라고요. 인사를 하면 ‘나는 투표 안 한다, 찍어주면 결국 다 똑같다’고 하더군요. 어떤 사람은 명함 주는 내 손을 탁 치면서 ‘시장 필요 없어’ 하더군요. 나중에 돌아와서 ‘정당 후보인 줄 알았다. 미안하다’고 했지만, 결국 정치인이라면 아무도 믿지 않는 거죠.”

최 후보의 새 명함은 내년에 등장할까

시흥 시민들은 주민소환운동으로 부패한 시장을 끌어내렸다. 그러나 누구를 새로운 시장으로 지지해야 할지에 대해선 믿음이 없다. 다음 선거에선 그런 믿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지역 풀뿌리 운동에 참여하면서 이번 선거 과정을 지켜본 하승수 제주대 교수는 “여러 교훈을 잘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좋은 정당’ 건설의 전망을 이야기했다. 영·호남 지역에선 기성 정당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드셀 텐데, 현재의 진보 정당 틀로는 이를 모두 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수도권에서는 여러 풀뿌리 단체들이 시민 후보를 낼 것이 확실한데, 이 역시 기성 정당 후보들과의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모든 진화가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적응·변화를 택했는지에 따라, 종은 완전히 사라지기도 하고 번성하기도 한다. 1년 전 광장에 모였던 촛불 시민들은 지금 정치를 고민하고 있다. 진화의 표징이다. 그러나 과연 광장의 촛불이 정치의 냉혹을 길들이면서 또한 거기에 적응하면서 성공적인 진화를 이어갈지는 알 수 없다. 최준열 후보의 새 명함이 내년 지방선거에 다시 등장할지도 아직은 미지수다.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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