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를 잘 만나 좋은 고등학교를 가는 특혜를 받는다면? 감수성이 풍부한 청소년이 학교에서 계층간 위화감을 느낀다면?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학교가 곧 세워질지 모른다.
2010년 3월 서울 은평뉴타운에 들어서는 자립형 사립고 ‘하나고등학교’가 그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이 학교 설립 주체인 하나금융지주의 임직원 자녀를 20%까지 특별전형으로 선발하는 안을 서울시교육청이 확정했기 때문이다. 기업의 직원 복지를 위해 공교육을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12월31일 하나금융의 학교법인인 하나학원이 신청한 ‘하나고 설립계획’을 최종 인가했다. 서울에선 처음이자, 국내에서 일곱 번째 자립형 사립고가 나오는 것이다.
하나고는 개교 첫해 1학년 8개 학급으로 시작한다. 학급당 인원은 25명이다. 2012년에는 24개 학급에 600명의 학생이 공부하게 된다. 하나금융은 하나고에 매년 약 25억 원의 법인전입금을 투입해 우수 학교로 키울 계획이다. 교육과정은 국제 경제와 금융 분야를 특성화하고, 수업은 영어와 한국어를 병행할 방침이다. 교사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2010년부터 3년 동안 우수 교원 65명을 확보하기로 했다. 수업료는 일반고의 3배 정도인 435만 원 정도다. 하나고와 서울시는 사회적 배려 대상자 등을 위해 각각 정원의 15% 정도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문제는 입시전형이다. 하나고는 개교 첫해 학급당 25명씩 200명을 뽑는다. 이 가운데 60%(120명)는 일반전형으로, 나머지 40%(80명)는 특별전형으로 선발한다. 특별전형 가운데 40명(전체 모집 정원의 20%)은 하나금융 임직원 자녀 중에서 뽑는다. 즉, 이 학교가 문을 열면 학생 5명 가운데 1명은 하나금융 임직원 자녀로 채워진다. 애초 하나금융은 자사고 설립 신청을 할 때 계열사 자녀에 대해 30%의 특례 입학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하나고 학생 모집 지역을 서울권으로 제한하도록 한 것과 달리 임직원 자녀는 전국에서 선발할 수 있도록 했다. 지방에 있는 하나금융 임직원 자녀를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애초 10%였던 사회적 배려 대상자 모집 비율을 15%로 높였다. 사회적 배려 전형은 국민기초생활수급자 및 차상위계층, 소년·소녀 가장, 환경미화원 자녀, 군인 자녀, 다문화 가정 등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전형이다. 성적 우수자, 예체능 특기자, 올림피아드 수상자 등을 대상으로 했던 ‘성적 우수자 전형’은 사교육 조장 우려에 따라 폐기됐다.
하나고는 이명박 대통령이 2003년 서울시장 시절 뉴타운 개발을 하면서 우수 학교 설립을 위해 추진했다. 하나금융은 지난해 4월 학교 설립자로 선정됐다. 시교육청은 법인 설립 요건을 검토해 10월31일 설립을 인가했다. 하나금융은 올 11월께 신입생 모집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임직원 자녀 특별전형은 사실상 기여입학제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공교육이 기업의 ‘사원 복지용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자신의 능력보다 부모의 지위를 이용해 아이들의 미래를 담보 받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내 주요 대학들도 기여입학제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김정명신 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공동대표는 “기업의 직원 복지를 위해 공교육을 이용하는 것이 문제다. 국가가 공교육을 민영화하는 틈새를 하나금융이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은행고, △△그룹고 등이 또 생기게 된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과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의 부절절한 ‘돈거래’도 최근 불거졌다. 김 회장은 지난해 서울시교육감 선거 때 공 교육감에게 후원금을 건넨 사실 등으로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하나금융이 자사고 인가권이 있는 공 교육감에게 건넨 돈의 대가성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조연희 전교조 사립위원장은 “김 회장이 공 교육감에게 300만원을 후원했는데, 공 교육감은 당선되자마자 하나고를 허가해줬다. 앞뒤 관계를 봤을 때 거래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하나금융은 기업이 돈을 내 학교를 지었다면 당연히 그 기업 임직원 자녀에게 일정 부분 입학을 허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하나금융 쪽은 “학교를 짓는 데 수백억 원의 공사비와 매년 50억 원의 운영자금이 들어간다. 회사는 주주나 이사회 멤버들에게 큰돈을 투자해야 하는 당위성을 얘기해야 한다. 투자 금액은 직원들이 번 돈이다. 투자 금액의 일정 부분은 직원 만족을 위해 직원에게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포항제철고 “서울과 지방은 달라”하나금융과 서울시교육청은 같은 자립형 사립고인 포항제철고와 광양제철고가 임직원 자녀를 중심으로 전형을 하고 있는 점을 감안했다고 강조한다. 현재 전국적으로 자사고는 포항제철고, 광양제철고, 민족사관고, 전주 상산고, 부산 해운대고, 현대 청운고 등 6곳이 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출연을 하나금융그룹에서 했다. 자사고 6개 중 포항제철고(60%), 광양제철고(77%)도 임직원 중심으로 운영된다. 하나고는 임직원 중심으로 신청이 들어온 학교다.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 인가해줬다. 하나금융에서 학교를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런 취지에 따라 허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하나고와 포항제철고는 태생부터 다르다. 포항제철고는 1981년 지방에서 설립됐다. 처음부터 자립형 사립고였던 게 아니다. 하나고는 교육 수요가 많은 서울에서 만들어지는 첫 자사고다. 포항제철고는 경북 지역의 포스코 임직원 자녀를 입학 대상으로 하지만, 하나고는 전국의 하나금융 임직원 자녀를 대상으로 한다. 김홍규 포항제철고 교무부장은 “하나재단에서 포항제철고를 걸고 넘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80년대만 해도 포항제철 직원들은 아이들 교육 때문에 시골인 포항에 내려오기를 꺼려했다. 심지어 우수한 인재들이 자녀교육 문제 때문에 입사를 꺼릴 정도였다. (하나고와 포항제철고는) 비교 대상이 적절치 못하다”고 말했다.
금융권 내부에서도 하나금융의 하나고 투자가 과연 순수한 사회공헌을 위한 것인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한 한 은행 임원은 “하나은행이 고등학교를 세우는 것이 순수한 교육 목적 때문은 아닐 것이다. 사회공헌에 허투루 쓰는 것보다 한곳에 집중해 효과를 보려는 전략, 금융권 우수 인재를 선점한다는 전략 등 다목적 전략이 녹아 들어가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은행들은 마케팅 비용을 사회공헌 비용으로 둔갑해 발표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지난 2007년 4월 전국은행연합회는 ‘은행 사회공헌 활동 보고서’를 냈다. 18개 국내 은행이 사회공헌 활동에 모두 3512억 원(은행당 평균 195억 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은행권이 공동으로 사회공헌 활동 보고서를 발간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은행들은 마케팅 성격이 강한 활동까지 모두 사회공헌에 포함시켜 ‘눈속임’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사회공헌 비용 가운데 문화·예술·스포츠의 경우 주로 공연 후원과 예술단체 지원, 스포츠팀 운영 등에 쓰였다. 이런 지원은 은행의 이미지와 브랜드를 높이는 데 활용된다. 순수하게 사회공헌 활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학술·교육 분야에서 은행들은 학교발전기금에 469억 원을 냈다. 전체 학술·교육 분야 지원액의 63%에 이른다. 그러나 학교발전기금의 경우 은행들이 교내 지점을 설치하기 위해 학교 쪽에 ‘보험금’으로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교 안에서도 위화감 조장 우려지난 2004년 삼성전자는 충남 아산시 탕정면 일대 98만여 평에 대규모 주거단지와 학교 등 공공복리시설, 상업시설 등을 두루 갖춘 ‘기업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삼성전자는 이곳에 약 1조5천억 원을 들여 1만1천여 가구의 주거단지와 초·중·고교 9곳을 포함한 공공시설, 상업지역 등으로 이뤄진 기업도시를 2009년까지 건설할 계획이었다. 당시 삼성의 기업도시 개발계획은 막대한 개발 및 분양 이익을 특정 기업에 몰아줄 수 있다는 점에서 특혜 논란이 일었다. 이와 함께 문제가 된 것이 교육이었다. 삼성은 지방에 우수 인력을 데려오기 위해 좋은 학교를 지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나, 교육계에선 삼성이 투자한 학교가 ‘삼성 직원을 위한 귀족학교’로 변질될 것을 우려했다.
하나고가 현대판 카스트의 현장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문화가정 등 사회적 배려 대상 자녀들이 금융회사 임직원 자녀들과 위화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연희 위원장은 “서민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의 자녀를 자립형 사립고에 안 보낸 경우도 있다. 감수성이 풍부할 나이에 계층 간 위화감 속에서 잘 적응할까, 일반계 고등학교 보다 더 힘들게 학교생활 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장은숙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장은 “20%의 아이들이 하나은행 임직원 자녀라고 했을 때, 이들은 이 학교에서 귀족이지 않겠나. 요즘 드라마 에 나오는 학교처럼 아이들 사이에 서민과 귀족이 나뉘는 거다. 연간 학비 540만원인 자사고와 일반 학교 간 서열화도 그렇고, 학교 내 서열화도 생기게 될 것이다. 공교육의 틀이 무너지는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하나고에는 서울시가 650억 원에 해당하는 학교 터를 제공하도록 돼 있다. 결국 공교육 붕괴에 정부가 뒷돈을 대주고 있는 격이다. 김정명신 대표는 “만약 기업들이 다 자기 회사 직원 복지를 위한다며 과거 직장조합아파트를 분양하듯 학교를 세우고 자사 직원 자녀만을 입학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성기선 가톨릭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하나고의 임직원 자녀 특혜를 인정해줄 경우 공고육의 틀이 무너진다. 교육을 통해 계층 문제를 완화하려는 그동안의 노력들이 수포가 된다. 교육이 공공재가 아닌 사유재로 전락하면 교육제도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사립학교 설립자가 자기들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는 것은 사회적 형평성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헌법소원을 통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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