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세월은 그날로 끝인 줄 알았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입대하던 날, 5년 내내 마음 졸였던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더 이상 막내아들이 경찰에게 얻어터지거나 쫓겨다니지 않아도 됐으니 말이다. 속 썩이던 아들이 바라던 직장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고생 끝’을 선언하셨다. 기자가 됐다고 좋아하셨다. 그랬던 어머니가 20년 전 입에 달고 사셨던 말씀을 다시 한다. 너무 앞장서지 말라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전국언론노조 한겨레지부 관계자들이 낙하산 사장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는 YTN 노조원들을 지지 방문했다. 오른쪽 두 번째가 김보협 위원장. 한겨레 신소영 기자
최근 책 정리를 했다. 이명박 정부의 국방부가 보면 깜짝 놀랄 ‘불온서적’들을 집에서 몽땅 치웠다. 움츠려든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의 건강한 시민으로, 혹은 언론노동자로 사는 것만으로도, 저들이 제멋대로 해석하는 현행법이나 새로 만들려고 악을 쓰는 온갖 악법들에 저촉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언제 잡혀갈지 모르고, 언제 집 뒤짐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든다. 2008년 겨울은 그렇게 처연하다.
2007년 가을 노조위원장에 나설 때만 해도 이럴 줄은 몰랐다. 와 노동자의 삶만 고민하면 그만인 줄 알았다. 기대하는 만큼은 아니어도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고 있었다. 그해 겨울 대통령이 바뀌었어도 도도한 물줄기의 흐름은 어찌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내용적 민주주의를 갈망할 정도로 민도가 높아졌는데 예전처럼 독재를 할 수 있을까, 산업구조가 바뀌고 자본시장도 국제화됐다는데 관치경제를 할 수 있을까, 갖가지 이유로 북쪽 땅을 밟는 사람이 한 해에도 수만 명인데 남북관계를 냉전시대로 되돌릴 수 있을까,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을 애써 위로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틀렸다. ‘설마’를 ‘현실’로 인정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타임머신을 탄 것도 아닌데 세상은 너무 빨리 과거로 돌아가버렸다. 촛불을 들고 예전의 그 거리에 다시 섰다. 광장의 정치는 즐거웠다.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겨레신문지부 깃발을 들고 광화문을 휘젓고 다녔다. 주말에 아이들 손을 잡고 나가면 그곳은 말 그대로 ‘민주주의 학교’였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말했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 을 들으며 후회를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요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생각하면 이런 정도가 아니었을까.
‘내가 정말 잘못했어. 일의 순서가 틀렸단 말이야. 언론을 먼저 때려잡았어야 해. 박통·전통도 알았던 그 단순한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문화방송만 없었더라도, 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 좀 잠잠해지면 시중이 형님 시켜서 한국방송·YTN 사장부터 갈아치우자. 정기국회 때 방송법·신문법 고쳐서 문화방송은 조·중·동이나 삼성한테 줘버리고. 음…, 꼴 보기 싫은 신문들은 살짝만 목 졸라도 망하겠지, 뭐.’
그랬을 거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다. 최고 권력자의 명을 받은 군인들같이 움직인다. 한나라당은 매체융합 등 미디어 환경 변화에 따라 미디어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법을 고쳐야 한다고 온갖 미사여구로 분식을 한다. 정말 그렇다면 “두 번의 대선은 한국방송·문화방송 때문에 졌다”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위해 만든 방송통신위원회의 수장이라는 사람은, 문화방송의 잔칫날(최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창립 기념식)에 “MBC의 정명이 무엇인지 냉엄하게 돌아봐야 한다”고 재를 뿌린다. ‘방송통제위원장’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그가, 정명(正名)이란 말뜻을 알면 스스로의 정명부터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헛소리를 하면 엄히 꾸짖어야 할 텐데 조·중·동은 맞장구를 친다. ‘공정언론시민연대’라는 듣도보도 못한 시민단체를 인용해가며 “문화방송 문제를 정면으로 따져볼 때가 됐다”고 부르댄다. ‘야당지’ ‘비판언론’이 정명이라던 족벌신문들이, 과거에 익숙했던 ‘정권의 나팔수’로 돌아가는 데는 정말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가졌던 민주주의는 너무 허약했던 것일까. 피 흘리고 고문당하고 죽어가면서 싸워 따낸 열매들을 야금야금 빼앗기고 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표현의 자유, 말할 권리마저 빼앗길지도 모른다. 사주들이 원하는 대로 지면을 만들고 돈을 주고 독자를 사는 신문들이, 부정한 방식으로 비자금을 만들고 정치권을 주무르는 재벌들이 ‘방송 뉴스’를 장악하게 된다면, 그들은 시민들의 생각을 지배하려들지도 모른다. 한나라당과 조·중·동과 재벌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다.
저들은 이미 다수의 방송사를 소유하고 있다. 드라마나 각종 재연극 등 오락물도 만들고 다큐멘터리 등 교양물을 사와서 방영하기도 한다. 저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보도 영역이다. 영향력이다. 세상을 향해 나 있는 창을 가리려 한다. 시민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내용을 바꾸고 싶어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광우병이 의심되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해도, 대한민국 1%를 위해 세금을 깎아주는 법을 만들어도 세상이 조용하리라 기대한다. 족벌신문이나 재벌이 지상파나 종합편성 케이블 방송을 사실상 소유할 수 있게 되는 방송법·신문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세도 군사작전처럼 밀어붙이는 이유다.
그래서다. 언론노동자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것은. 문화방송을 포함해 전국의 언론노동자들이 12월26일 총파업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은. 월급을 더 받기 위해서,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파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펜과 카메라를 들고 공익을 위해 기사를 쓰고 프로그램을 만들 때 가장 행복하다. 그런 우리를 저들이 자꾸 전선으로 불러낸다.
꼭 이겨야 하고 이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질지도 모른다는 방정맞은 생각도 든다. 제대로 된 언론들이 그토록 비판하던 이가 ‘잘살고 싶다는 욕망’에 부합해 대통령이 되는 세상이니까. 하지만 저들이 바라는 대로 된다고 해서 세상이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질긴 것이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할 테니까.
그런데 언론이 진실의 편에 서지 않았을 때의 불행한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가 억압받을 때, 민주주의가 지하로 숨어들 때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화를 통해 풀어야 할 모든 사안들이 격렬한 양상을 띠게 된다. 그땐 2008년 겨울을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진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이 많지 않다. 일을 열심히 하고 끝마치면 소주 한잔하면서 동료들과 정담을 나누고 싶다. 주말엔 산에 가고, 겨울방학엔 들뜬 아이들을 데리고 스키장에 가고 싶다. 그런데 이 작은 행복마저 이젠 사치가 돼버렸다. 그런 시간에는 으레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어 누구에겐가 미안해진다. 그런데 다 빼앗겨도 절대 빼앗길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내 청춘의 날들을 우리 아이들이 다시 살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다시 전선에 선다.
김보협 기자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겨레신문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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