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밤 10시50분에 떠난다. 여수가 종착지인 서울 용산발 무궁화호다. KTX는 출장 가는 도회인의 얼굴이고 무궁화호는 5일장에 나서는 할머니의 얼굴이다. 뭉툭한 코에 흙먼지의 더께를 얹은 얼굴을 하고서도 부끄럼조차 없이 플랫폼에 들어온다.
사람 섞이는 풍경, 무궁화호 재발견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속에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그리스 민중가요 )
그리스의 ‘김민기’,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노래 속에서 기차는 이별의 자리를 날카롭게 갈라놓는다. 기차의 본성은 만남과 이별에 있다. 인생의 본질은 만남과 이별로 날을 지새우며 죽음을 향해 달리는 데 있다. 연말을 맞아 일출 여행을 소개하자고 편집회의에서 결정된 뒤부터 나는 무조건 기차를 타겠다고 결심했다. 인간의 본성과 기차의 본성은 서로 닮았다.
남도 끝의 섬으로 가는 해돋이 기차여행은 기차와 인생을 애틋하게 음미하는 시간이다. 여수 향일암 해돋이 구경이 ‘무명의 관광코스’인 것은 아니다. 동해 정동진 해돋이만큼은 아니지만 꽤 이름이 높다. 그래도 동해 정동진이 잃어버린 어떤 것이 조금 남아 있다. 여수 향일암을 가는 기차여행 상품은 따로 없다. 정동진이 ‘주류’라면 향일암은 ‘비주류’다. 정동진 해돋이는 ‘맞춤여행’이지만 향일암 해돋이는 ‘제 알아서 여행’이다. 여수 향일암 해돋이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아들을 깨워 꼭 새해 첫 일출을 보게 했다. 포항 감포, 경주 토함산, 동해 정동진,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대구의 앞산(산 이름이 그냥 ‘앞산’이다)에라도 올라 새해 첫 일출을 보게 했다. 1960·70년대 개발과 성장의 시대를 온몸으로 헤쳐온 아버지는 그의 아들 역시 해마다 새로운 결심을 굳게 다지길 기대했다. 아들은 그때부터 석양을 더 좋아했다.
“상처의 시절은 단단히 기억하지/ 밀려온 진눈깨비조차/ 참 따뜻한 나라라고”(김명인 ‘여수’) 따뜻하지만 상실의 기억을 지닌 남도라면, 해가 지는 곳이지만 뜨는 해 역시 맞이할 수 있는 여수라면 아버지와 아들이 혹시 화해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심이 아니라 의심이 필요하고, 성취가 아니라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아들들의 과거도 잠시 아버지들의 과거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차는 익명의 승객들이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협소한 공간이지만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문학평론가 김미영은 기차가 문학의 단골 모티브가 되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버스와 택시에서 사람들은 좌석에 묶인다. 비행기는 아예 유배지다. 사람들이 서로 섞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선상에서도 사람들은 움직이지만 배는 오직 거대한 바다만 보여줄 뿐이다. 기차는 끊임없이 변하는 사람과 풍경을 제공한다.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을 등에 지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움직이고 대화하고 스며든다. 기차는 풍경과 내면을 동시에 발견하게 한다.
여수행 무궁화호에선 대학생, 등산객,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등이 뒤섞인다. 연인이 올라타고 부부가 내린다. 술 취한 사람은 당연히 있고, 전화기에 대고 언성을 높이는 중년도 있다. 공연히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겠고, 친절하게 귤을 건네는 사람도 있다. 남자들은 연방 곁눈질을 하고 여자들은 그냥 모른 체하는데, 각자 잠에서 깨어 다시 옆자리를 살피는 것은 마찬가지다.
바다에서 심장으로 차오르는 태양요즘의 무궁화호는 제법 좋아졌다. KTX와 새마을호에 승객을 내주는 바람에 오히려 여유 공간이 더 많아졌다. 속도를 내려고 객차를 날씬하게 만든 KTX에 비해 통로도 넓고 좌석도 넓다는 놀라운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됐다. 옛날의 식당칸 자리는 ‘열차 카페’라는 새 이름을 달고 면모를 일신했는데 전자오락기, 컴퓨터, 안마방 그리고 노래방까지 갖추고 있다. 용산역을 떠난 지 10여 분도 안 됐는데, 어느 청춘남녀가 노래방에 들어가 꼭 끌어앉고 있다.
“나는 익명의 개개인이 지닌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오묘한 힘을 느낀다.” 소설 의 후기에서 작가 신경숙은 익명성이 주는 위안을 높게 평가했다. 기차는 그런 익명의 존재들이 만나 서로의 슬픔을 내보이고 위로를 기대하는 곳이다. 우연한 만남과 예측하지 못한 풍경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환상하는 곳이다.
술 취한 남편이 아직 기차에서 안 내렸다며 어느 아주머니가 떠나려는 무궁화호를 붙들고 있다. 승무원은 부부의 실랑이가 끝날 때까지 잠시 기다려준다. 지리산에 가려는 등산객들은 산더미 같은 짐을 챙기느라 발걸음이 더디다. 승무원은 아주 오랫동안 기차를 역 플랫폼에 세워뒀다. 에누리를 두고 달려온 무궁화호는 몇 분의 연착이 그다지 미안하지 않다. 새벽 4시30분께 종착지인 여수역에 도착했다.
해를 향한 암자, 향일암에 가려면 역에 닿자마자 111번, 113번 시내버스를 타야 한다고, 역 앞 삼거리의 뼈다귀 해장국집 아주머니가 일러준다. 여수역에서 향일암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시내버스가 역 앞에 선다. 몸 좀 녹이겠다고 잠시 지체하면 꼼짝없이 택시를 타야 하는데, 2만원 정도의 차비가 더 든다.
향일암은 서기 644년 원효대사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용맹정진하던 곳이다. 원효대사는 이곳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났다. 지금도 원효대사가 좌선하던 자리가 남아 있다. 4대 관음성지 가운데 하나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아픔을 살피고 듣는 분이다. 그러니까 향일암은 삶이 고단한 사람들이 와서 관음보살을 친견하는 곳이다. 기암괴석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작은 동굴을 만들었다. 거대한 바위에는 거북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것들을 때로 지붕 삼고 때로 기초로 삼아 작은 암자들이 들어서 있다. 대웅전을 황금 단청으로 꾸미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그것만큼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향일암 일출은 3차원적이다. 눈높이의 수평선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명치 아래의 광활한 바다에서 심장을 향해 해가 치받아 올라온다. 한쪽에선 눈부신 별들이 어둠을 몰고 퇴장하는데, 다른 한쪽에선 태양이 몰고 오는 붉고 푸른 광선이 끝도 없는 파문을 만든다. 황톳빛 대지를 닮은 바다는 하늘이 기묘한 재주를 모두 부리는 동안, 파도를 담담하게 몰고 다니며 먹빛에서 은빛으로 소리 없이 단장을 한다. 밤과 낮, 땅과 바다, 해와 별이 어우러져 서로를 인내하는 장엄한 광경이 좌우상하의 공간에서 펼쳐진다. 당연히 12월31일이 되면 그 소문을 듣고 향일암으로 인파가 몰려드는데, “여그 사람들은 쩌그 오동도로 가지라” 하고 여수 아저씨가 귀띔한다.
“여그 사람들은 오동도로 가지라”“오동도의 동백나무들은 언제나 나무껍질 위로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아요.” 한강의 소설 에 나오는 여주인공 자흔에게도 오동도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돌산대교를 건너 다시 시내로 나와 오동도에 가면 ‘뚝뚝 눈물을 흘리는’ 동백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붉은 눈물 같은 꽃을 피운다. 햇볕 드는 자리마다 봉오리째 떨어진 동백꽃이 함부로 굴러다닌다.
10대라면 20대를 꿈꾸고, 40대라면 30대를 추억하며, 60대라면 오지 말았으면 하는 70대를 아련히 마음에 새겨두게 되는 고즈넉한 산책로가 오동도 전체를 감싸고 돈다. “오동숲에 금빛 봉황이 내려와 오동잎을 먹고 살았다. 봉황이 깃든 곳에 새 임금이 난다는 소문이 났다. 왕명으로 오동숲을 베어버렸다.” 산책로 구석의 작은 비석에 오동도 동백나무들에 얽힌 전설이 적혀 있다. 권력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예로부터 이곳을 거닐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오동도에 가면 섬 전체가 해돋이 보는 자리다.
해수탕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장어와 서대회와 게장백반으로 배를 채우고 나면, 새벽에 보았던 해돋이가 꿈결 같아진다. 돌아가는 길에서도 무궁화호는 나를 흔들어 잠재울 것이다. 다 잊고 쉬라고 덜컹이는 자장가를 불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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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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