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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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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가정법 과거

추가보상협약 가입했더라면 배상액 1조 넘어… 정유사 부담 의식해 지금도 미적
등록 2008-12-09 14:46 수정 2020-05-03 04:25

‘역사에 가정법은 필요 없다.’
지나간 과거를 두고 아쉬운 후회의 한숨을 내쉬는 이들에게 던지는 쓰디쓴 충고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도 한편으로는 과거에 대한 집착을 쉽게 떨치지 못하는 게 사람의 본모습이기도 하다. 과거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큰 화가 되어 돌아올 때, 부질없더라도 ‘그때 우리가 만약 ~했더라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인 게다.
그런데 이런 부질없는 가정법이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바로 12월7일로 한 돌을 맞은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다. 해당되는 가정법 문구는 “그때 우리가 ‘1조원 클럽’에 가입했더라면…”.

지난 2005년 정부가 국제유류오염배상기금(IOPC) 보상 한도를 1조원 이상으로 높였더라면 지금 와서 수천억원의 혈세가 지출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12월4일 고려대에서 이 학교 부설 국제공익법률상담소가 ‘1조원 클럽 가입 타당성’ 특별 강연회를 개최했다(왼쪽/<한겨레21> 류우종 기자).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가 일어난 지 3일 뒤인 지난해 12월10일 만리포해수욕장 인근에 새카만 기름띠가 밀려와 있다. 연합 김현태

지난 2005년 정부가 국제유류오염배상기금(IOPC) 보상 한도를 1조원 이상으로 높였더라면 지금 와서 수천억원의 혈세가 지출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12월4일 고려대에서 이 학교 부설 국제공익법률상담소가 ‘1조원 클럽 가입 타당성’ 특별 강연회를 개최했다(왼쪽/<한겨레21> 류우종 기자).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가 일어난 지 3일 뒤인 지난해 12월10일 만리포해수욕장 인근에 새카만 기름띠가 밀려와 있다. 연합 김현태

1조원 클럽은 무엇일까? 이번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에서 보듯이 대형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하면 그 피해액은 천문학적이다. 사고에 책임이 있는 선박회사가 자신의 모든 자산을 팔아도 배상액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 때문에 선박 사고와 관련해서는 일종의 국제적인 보험제도가 운용되고 있다. 국제유류오염배상기금(IOPC)이 그것인데, 해당 선박회사가 부담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기름 수송으로 이득을 얻는 정유사들이 함께 분담금을 내어 피해보상 기금을 마련해주는 제도다.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세계 100여 개국이 가입돼 있다. 기금 부담률은 석유 운반량에 따라 결정되는데, 우리나라의 기금 부담률은 전체의 8% 수준이다. 대신 우리나라 해역에서 대형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하면 약 3천억원까지 IOPC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다(액수는 IOPC의 보상액 지원 비율이 결정된 지난 3월의 원-달러 환율인 1천원 수준을 기준으로 함·이하 동일). 그런데 기름 유출 사고가 대형화되면서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보상한도를 1조원 이상으로 높인 추가보상협약이 2003년에 도입돼 2005년부터 시행됐다. 일본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스페인, 독일, 네덜란드 등 기름 수요와 수송량이 많은 21개 나라가 현재 가입돼 있다. 이를 두고 흔히 1조원 클럽이라고 부른다.

수송량 많은 21개 나라 가입

그런데 세계 4위 유류 수령 국가이자 6대 유류 소비국인 우리나라는 여기에 가입하지 않았다. 지난 2005년 추가보상협약 가입을 검토했지만 정유사들이 분담하는 분담금이 늘어날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에 밀려 가입이 유보된 것이다. “우리나라 해역에서는 기름 유출 사고가 날 가능성이 (외국에 비해) 낮다”(한국해양수산개발원 2005년 보고서)는 ‘이상한’ 해설도 덧붙여졌다.

그렇다면 당시 추가보상협약에 가입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나라 정유사들은 추가보상협약 사무국 1년 운영비(28억원가량)의 12%가량(가입국들의 유류 운송량 비율에 따른 우리나라의 부담률)을 나눠 내야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개별 정유사들이 1년에 수천만~1억원가량의 돈을 내놔야 했을 것이란 말이다. 대신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로 IOPC로부터 받을 수 있는 배상한도액은 3천억원 수준이 아니라 1조1천~2천억원 수준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물론 배상액의 일부를 우리나라 정유사들이 부담해야 했겠지만 늘어난 ‘보험금’에 비하면 소소한 정도다. “그때 추가보상의정서에 가입했더라면…”이라는 가정법이 자연스레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 10년간 대형 기름 유출 사고 현황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대형 기름 유출 사고 현황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추가보상협약은 일종의 상호부조 보험제도인 만큼 다른 가입국에서 사고가 났을 경우 우리나라 정유업체들이 기금을 더 내야 한다. 하지만 기름을 운송하다 발생한 사고인 만큼 운송한 기름을 팔아 이익을 남기는 정유사들도 피해 구제에 동참하자는 것이 우리나라를 비롯해 100여 개국이 가입해 있는 IOPC의 취지다. 여기에 추가보상협약 가입 때 늘어나는 ‘보험료’의 절반은 선주 상호책임보험조합이 부담한다. 가입국 정유사들의 몫은 나머지 절반뿐인 셈이다. 1조1천~2천억원의 자금이 지원되는 최대 규모의 사고가 났을 때 우리나라 정유사들이 부담할 보험료는 600억원가량(5~6% 수준)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더라도, IOPC 가입 뒤부터 태안 앞바다 사고 이전까지 우리나라 정유사가 낸 기금은 모두 670억원가량이지만,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해 지원받은 금액은 900억원이 넘는다. 결국 보험료는 조금 더 부담하되 보험금은 훨씬 큰 추가보상협약을 기름 유출 사고가 비교적 빈번하게 발생한 우리나라가 거부해온 셈이다(표 참조).

정유사들 순익 비춰 보험료 감당할 만

아쉽지만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소 잃고 난 뒤라도 외양간을 고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움직임이 없지는 않다. 국토해양부가 추가보상협약 가입을 검토하는 중이며, 지난달에는 각계 의견을 듣는다며 공청회도 열었다. 한국해양산업개발원에 추가보상협약 가입의 경제적 타당성을 주제로 한 용역보고서도 발주해, 이달 안으로 보고서가 나올 예정이다.

최고 보상한도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최고 보상한도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여기서 아무래도 가장 큰 걸림돌은 ‘보험료’를 부담해야 하는 정유업계와의 조율이다. 하지만 십수 년 만에 한 번 일어나는 초대형 사고 때 우리나라 개별 정유사들이 부담할 최대 금액은 100억~200억원 수준이다. 순익 1조원을 넘나드는 정유사들로서는 큰 부담이라고 할 만한 액수는 아닌 셈이다. 물론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석유협회 관계자는 추가보상협약 가입과 관련해 “아직 공식적인 의견을 검토 중”이라며 말을 아꼈다. 사실 할 말은 많지만 피해 주민들을 비롯한 국민 전반의 정서를 감안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듯 하다. 하지만 “정유업계가 추가보상협약에 가입하는 대신 정부 쪽에 다른 혜택을 요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추가보상협약 가입 자체를 반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정부 또한 3년 전의 과오를 되풀이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만약에 다시 한번 사고라도 터진다면 추가보상협약을 또다시 미루는 결정을 내린 공무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이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사고 발생 1년이 지나도록 계속 ‘검토 중’인 정부의 행보는 굼뜨기만 하다. 설마 그렇게 큰 사고가 이른 시일 안에 또 발생하겠냐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예부터 이런 속담도 있다. ‘설마 하다 큰코다친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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