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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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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정책 보고서도 발주자 입맛대로?

국책 연구기관들 지휘권 부처로 환원 추진… 정권 속내 맞춤형 보고서 속출
등록 2008-10-31 10:24 수정 2020-05-03 04:25

#장면1. 지난 10월23일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주최한 국정과제 세미나에서 박기성 한국노동연구원 원장이 맡기로 예정된 발제문 발표는 ‘펑크’가 났다. 박 원장이 쓴 ‘비정규직의 효과와 개선 방향’이란 원고에는 현행 2년인 비정규직 사용기간 제한을 없애고, 정규직 과보호가 비정규직 사용을 늘리기 때문에 정규직의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퇴직금을 폐지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토론자로 나서기로 된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발제 내용을 확인한 뒤 노동연구원을 항의방문하고 세미나까지 원천봉쇄하려하자, 박 원장이 발제자로 나설 예정이었던 노동 분야 세션이 전격 취소된 것이다. 박 원장이 취임한 뒤 노동연구원은 지난 9월 개원 20돌 기념 토론회의 주제를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성 증진을 위한 제안’으로 잡는 등 기존 입장을 뒤집는 ‘과감성’을 꾸준히 과시해 왔다.

전국공공연구노조는 지난 10월22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국책연구기관 구조개편에 항의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전국공공연구노조는 지난 10월22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국책연구기관 구조개편에 항의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장면2. “책상 앞에 앉아 연구만 하시는 분들이라 목소리가 작군요. 다시 한 번 외쳐보죠. 정부는 국책연구기관을 ‘지식 시녀’로 만들려는 기도를 중단하라. 연구 독립성을 보장하라….” 지난 10월22일 낮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는 전국공공연구노조 조합원 150여 명이 정부의 국책연구원 통폐합 방침에 반발하는 결의대회를 열었다. ‘권력의 입맛을 맞추는 하인’ ‘영혼 없는 공무원의 손발’이 되기를 거부한다는 한 연구원의 성난 목소리가 연방 확성기를 타고 흘렀다. 마침 여러 무리의 공무원들이 점심 한 끼를 때울 식당을 찾아 후문을 나서는 참이었다. 누군가는 평소 정책 수립·집행 과정의 파트너들이 벌이는 집회 장면을 자못 심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잡상인을 만난 듯 애써 시선을 외면한 채 동료들과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연구노조 조합원들 ‘시녀 거부’ 시위

대다수 국민들에게 생소한 존재지만, 국책연구소는 행정부 정책집행의 이론적 근거를 만들고, 국가운용에 필요한 장·단기 과제들을 연구하는 중요 기관이다. 예컨대 정부부처가 자유무역협정(FTA)이나 감세안 추진을 발표할 때, 기대효과를 측정하고 부작용 방지 방안까지 담은 국책연구소의 용역보고서는 핵심적인 밑천이 된다. 그런데 MB정부 들어 정권의 철학을 구현하고 각종 공약정책들을 밀어붙이기 위해 국책연구소들을 ‘총동원’하고 있다는 고발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급기야 ‘국가의 브레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훼손하지 말라고 항의하는 사태까지 맞고 있는 것이다.

전국공공연구노조 쪽에서는 오랜 기간 연구·토론을 거치며 형성된 연구기관의 입장을 정권이 바뀌자마자 별다른 근거도 없이 수정하거나, 정해진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데이터 서포트’를 강요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설명한다. 정권의 입맛에 맞춰 ‘뒤집기’와 ‘짜집기’를 했다는 의혹을 사는 용역보고서의 정체는 뭘까.

새만금 간척지의의 농지비율은 국책연구기관의 연구결과가 뒤집히는 ‘역동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정부는 지난 2006년 12월 국토연구원을 비롯한 5개 국책연구기관으로부터 ‘새만금 간척용지의 토지이용계획 수립연구’라는 용역보고서를 받았다. 보고서는 3년여에 걸쳐 새만금 내부 토지이용 계획들을 종합 검토해 농지 비율을 70%로 하는 게 타당하다는 결론을 담았다. 새만금 토지의 산업적 이용 가능성이 낮고, 성토를 하려면 수조원의 경비가 들어갈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감세효과·새만금 이용계획 뒤집어

이듬해 발표된 정부의 ‘새만금 내부 토지이용계획 기본구상’은 농지와 도시용 토지의 적정비율을 7 대 3으로 한다는 것을 뼈대로 개발방안을 짰다.

그런데 지난 10월21일 이명박 정부는 국토연구원, 농어촌연구원,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전북발전연구원 등 5개 연구기관의 연구내용을 바탕으로 농지비율을 30%로 줄이는 ‘새만금 기본구상 변경(안)’을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연구기관들의 용역과제는 새만금의 산업 개발용지를 70%로 올려 ‘한국의 두바이’를 조성하겠다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조정안을 토대로 정부가 지난 4월 요구한 것이었다. 공공연구노조 관계자는 “과거 국책연구소들이 결론을 내린 새만금의 적정 농지비율이 아무런 검증과 공론화 과정 없이 변경됐다”면서 “용역 발주자(정부)의 요구대로 국책 연구기관들이 휘둘리는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말했다.

지난 9월 발표된 정부의 법인세 감세안에도 ‘짜맞추기’로 의심되는 자료가 등장한다. 기획재정부는 조세연구원의 2008년 6월치 자료를 인용하면서, 법인세율을 5%포인트 낮추면 경제성장률을 0.6%포인트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조세연구원은 2004년 ‘감세정책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입증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영향이 있는 경우에도 그 크기는 매우 작다’ ‘법인세율 인하가 단기간에 기업투자의 증가를 유발하지 않는 것으로 분석된다’는 내용의 자료를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시민경제사회연구소의 윤종훈 회계사는 “정부출연기관인 조세연구원이 불과 3~4년의 시차를 두고 한 입으로 두 말을 했다는 것은 어떤 ‘요구’가 있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고 꼬집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의 ‘아고라’에 ‘4대강 정비계획의 실체는 운하’라는 글을 올렸던 김이태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연구원이 노무현 정부 때는 대운하에 대해 부정적 결과를 냈는데 (새 정부 들어) 희망적으로 바뀌었다”면서 “강에서 다니는 배는 (구조가 달라서) 바다에선 못 다닌다는 전문가의 문제제기를 ‘우리 조선 기술이 훌륭한데 무슨 소리냐’는 식으로 깔아뭉개기도 했다”고 토로한다. 몰래 운하를 추진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학술적으로 불가능한 결론을 ‘만들어 내라’는 억지가 판을 쳤다는 것이다.

장기 전략 따로 떼내 중앙통제 의도

정부가 최근 추진 중인 ‘정부출연 연구기관 운영 개편방안’은 연구원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지난 10월2일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보수적 싱크탱크인 한반도선진화재단이 맡았던 연구용역 결과에 대한 공청회를 열었다. 현재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비롯한 23개 국책연구기관은 지난 1999년 제정된 ‘정부출연 연구기관 등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의 통합적인 감독과 지원을 받고 있다. 이전에 각 부처별로 소속돼 있던 연구기관을 한데 묶은 것은 정책 연구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키우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새로 공개된 용역보고서는 23개 기관을 ‘1부처 1연구기관’ 원칙에 따라 17개 안팎으로 통폐합해 다시 각 부처 산하로 돌리고, 중·장기 국가전략 수립에 필요한 거시적 영역은 따로 떼어내 대형 종합연구원을 만든다는 구상을 담았다. 정책연구가 관료들의 입김에 휘둘리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한 통합 관리 시스템을 폐기하는 한편, ‘한반도 대운하’ 같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에 안성맞춤이 될 ‘컨트롤 타워’는 별도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지난 10월14일 국회 정무위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국정감사에서는 한나라당 의원들마저 이런 개편 방안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진복 의원은 “(개편안을 만든) 한반도선진화재단의 박세일 이사장은 MB 정부의 선진화 개념 정립에 일조한 인사”라며 정권 초기에 정권 코드에 부합하는 연구원 손보기로 비치지 않기 위해서는 개편안 연구용역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기관에 위탁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박세일 이사장은 2003년 발간된 〈KDI 정책연구 사례〉에 실린 글 ‘국립 싱크탱크의 바람직한 미래상’에서 △KDI 등 사회과학 분야 국책연구기관을 모두 통합해 국회 소속과 정부 소속 연구팀으로 나눈 뒤 △정부 소속 중·장기 국가과제연구팀은 ‘국가전략연구원’으로 만들고 △정부 소속 단기 정책과제팀은 공무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국가 두뇌집단을 통제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욕망은 연구원장 인사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지난 4월 국책연구기관의 기관장 18명에게 일괄 사표를 제출하도록 강요한 뒤 이 중 11명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들의 빈자리는 지난 8~9월 대부분 정권 교체와 인수 과정에서 분명한 역할을 수행한 ‘MB맨’들로 채워졌다. 박태주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장은 한반도대운하자문단에서 분과장을 맡았고, 황기연 한국교통연구원장도 한반도대운하연구회에서 활동했다. 원윤희 한국조세연구원장은 대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조세정책을 조언했다. 박양호 국토연구원장, 서재진 통일연구원장 등은 대통령직 인수위원으로 참여했다가 ‘발탁’된 사례다. 또 ‘반노동자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박기성 한국노동연구원장은 지난 대선 때 뉴라이트 지식인 100인 시국선언에 참여한 인물이다. 한 노동문제 전문가는 “박 원장은 참여정부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연구자들에게 언론 기고·인터뷰를 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앞으로 모든 보고서를 원장의 입장에 입각해 서술하라고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관장 일괄 사표 ‘MB맨’들로 채워

연구기관을 입맛대로 부리고 싶어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만의 특성은 아니다. 참여정부도 과거 ‘한-미 FTA’의 경제효과 분석치 자료를 제시하면서, 성장률은 뻥튀기하고 저작권 강화 등에 따른 피해를 축소했다. 당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연구기관들은 이른바 ‘일반균형모형’(CGE)을 사용해 한-미 FTA의 효과를 측정했는데, 성장률이나 고용 추정치를 구하면서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각각 1.2%포인트와 1.0%포인트 증대된다’는 무리한 전제조건을 둬서 논란을 빚었다.

그러나 국책연구기관장 물갈이, 한반도 대운하 몰래 추진, 공룡 같은 통합형 국책연구기관 설립 검토 등에서 엿보이는 MB 정부의 ‘연구기관 일괄 통제’의 욕망은 이전 정부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강렬하다. 조원동 국무총리실 국정운영실장은 “국책 연구기관들의 독립성이 지나쳐 정책입안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용역보고서를 설익은 상태에서 언론에 노출하는 것은 연구자가 자기 이름을 알리기 위한 욕심”이라고 말한다. “국책 연구기관의 최대 클라이언트(고객)는 정부인데, 정부가 연구기관 조직개편을 하기 위해 연구원들과 합의를 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는 말도 덧붙였다. 촛불 정국의 여파로 5개월여 동안 국책연구원장 자리를 비워두거나 방치한 탓에 연구기관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정부가 앞으로 어떤 활약을 보일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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