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아시아계 미국인이고, 그의 ‘파트너’는 여성이다. 그의 가방 안에는 항상 의료 위임장(Power of Attorney for Health Care)이 들어 있다. 그가 꺼내 보여준 위임장에는 자신이 아플 때 수술 등에 대해 누가 결정권을 갖는지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가장 우선권을 가지는 건 파트너. 그 아래로 오빠와 부모의 이름이 쓰여 있다. 그는 “위임장이 없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도 아무런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동성애자를 많이 보았다”며 “내가 아플 때 파트너가 나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도록 위임장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조항을 가리키며 “그녀가 원하면 부모를 병실에서 내쫓을 수도 있다”며 웃었다. 이렇게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는 변호사 알마 송이 백(Alma Soongi Beck)은 스스로 작성한 위임장을 분신처럼 지니고 다닌다. 만약에 그가 이성애자라면, 아니 동성결혼이 허용되는 나라에 산다면 굳이 필요치 않은 위임장이다.
의료 위임장에 파트너가 최우선권알마는 변호사이자 활동가다. 샌프란시스코의 법률사무소 ‘벡 로 그룹’(The Beck Law Group)의 대표면서 프로보노(Probono publico·공익 무료변론) 활동으로 바쁘다. 동성애자 변론에 헌신한 덕에 성소수자 법률가단체 ALRP(AIDS Legal Referral Panel)에서 뽑은 2007년 올해의 변호사로 선정됐다. 그리고 지금 캘리포니아는 동성결혼의 향배를 가늠할 대리전이 벌어지는 현장이다. 오는 11월, 캘리포니아에선 미국 대선과 함께 주헌법에 결혼을 ‘남녀의 결합’으로 한정하는 조항을 넣을지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된다. 2008년 5월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이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주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알마는 위헌판결을 “예기치 못했던 희망”이라고 말했다.
알마는 “요즘 여론조사에서 51~60%의 캘리포니아 주민이 동성결혼에 찬성한다고 응답한다”면서도 “2002년에도 비슷한 조사 결과가 나왔지만 막상 투표에선 60%가 반대표를 던졌다”고 전했다. 2002년 가족법에 결혼을 ‘남녀의 결합’으로 규정하는 것을 두고 벌어진 주민투표를 말하는 것이다. 알마는 “비록 이번에도 동성혼을 허용하지 않는 주민투표 결과가 나오더라도 위헌판결을 통해 동성혼이 기본권이란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 뜻깊다”며 “동성결혼이 논란이 되면서 이성애 사회가 동성애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성소수자 권리 옹호 활동에 매진미국에서 한국인 2세로 태어난 알마는 이른바 유명대를 졸업하고 로스쿨을 마쳤다. 하지만 알마의 소수자 정체성은 그를 운동으로 이끌었다. 로스쿨에 가기로 결심한 이유도 성소수자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다. 98년 로스쿨을 졸업하고 2년은 “주류 사회의 원리를 알기 위해” 로펌에서 일했다. 그리고 2000년 독립해 성소수자 대상의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11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는 알마는 “한국에서 동성결혼, 아니 동성커플 파트너로서의 권리를 인정하는 동성결합(Civil Union)이라도 제도적으로 인정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알마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주최로 10월3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강연을 통해 한국의 ‘동지들’과 경험을 나누었다. 사실 캘리포니아에선 2005년부터 동성커플을 포함한 사실혼 관계가 법적 결혼과 유사한 효력을 가지게 됐다. 그런데도 굳이 동성결혼 법적 인정투쟁을 벌이는 이유는 무얼까. 알마는 “법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가 다른 ‘2등 시민’으로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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