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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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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남북경협시대 5회] 개성에서 대륙으로!

등록 2004-06-03 00:00 수정 2020-05-03 04:23

[기획연재 | 지금은 남북경협시대 5회]

경제 침체 극복하고 활기 띠는 러시아 극동지역… 개성공단의 주요 수출지로도 적격

▣ 블라디보스토크= 글 · 사진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 협찬/ 한국토지공사

러시아 극동지역은 북한 경제회생의 탈출구이자, 자본주의를 미리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산 교육장이다.

러시아는 시장경제로 전환한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 수년간에 걸친 마이너스 경제성장, 대량 실업사태 등으로 뼈저린 아픔을 겪었다. 이는 하바로프스크, 아무르주 등지의 원시림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던 수만명의 북한인들에게도 시장경제의 충격을 몸소 겪게 만든 중요한 기회였다. 특히 시장경제 전환 이후 루블화 가치가 곤두박질치자 극동지역에 나와 있던 북한 근로자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해 더러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더러는 탈북자 신세가 되어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 했다.

북한 노동력 유입도 크게 늘어

이제 러시아 극동지역은 시장경제 충격에서 거의 벗어난 모습이다. 외국인이 몰리면서 하루가 다르게 차량이 늘어나고 땅값이 뛰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발전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어디를 가나 수입 중고차량이 홍수를 이루고, 장사꾼이 넘쳐난다. 물론 아직도 많은 러시아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빈곤선상에서 허덕이고 있으나 꾸준한 국제 원유가의 상승과 수산물, 각종 원자재 수출의 증가로 신흥 부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러시아 극동지역 경제가 2000년 이후 서서히 기지개를 켜면서 귀국했던 북한 근로자들의 연해주 입국도 크게 늘고 있다. 러시아 연방정부 이민국의 통계에 따르면 2000년에 1500명이던 북한인 입국자가 2001년에는 2천명을 넘었다.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핫산역을 거쳐 극동지역에 흘러들고 있는 북한인이 1만여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블라디보스토크시 동북쪽의 임목사업과 도심 건설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러시아 극동지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경우 북한의 노동력은 낮은 임금에 견줘 생산성이 높아 취업 기회는 더욱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 총영사관의 분석에 따르면 연해주 정부는 갈수록 커지고 있는 중국 상인들의 극동지역 영향력을 적절하게 견제하기 위해서도 남북한 기업인들의 진출을 적극 환영하고 있다. 연해주는 특히 고질적인 인력난을 덜 수 있는 해결책으로 저임의 북한 노동자들의 유입을 반긴다. 세르게이 다르킨 주지사는 한때 20만명의 북한 인력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공언한 적도 있다. 북한도 러시아 극동지역의 근로자 노임이 중국보다 높다는 이유로 인력 수출에 적극적이다. 실제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설 현장의 노동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구릿빛 얼굴의 북한 사람들이었다. 하바로프스크나 아무르주의 원시림은 거의 북한 벌목공들의 손으로 개발해왔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화다. 그만큼 러시아 극동 지역경제 활성화에 북한 노동자들이 크게 기여해온 셈이다.

이처럼 러시아 극동지역은 북한과 러시아 모두에게 새로운 경제 도약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지역경제 활성화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러시아 지방정부는 상호 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동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진출을 반기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국 총영사관의 한 관계자는 “연해주 정부는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다목적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한동안은 양국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러시아 극동지역은 북한과의 경제협력이 남한의 투자유치를 이끌어내는 데 매우 유용한 지렛대라고 본다는 점이다. “세르게이 다르킨 연해주 주지사가 북한에 접근하는 것은 한국의 자본을 끌어들이려는 일종의 미끼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극동지역 개발을 위해서는 남한 기업의 투자 유치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북한과 경제교류를 잘 해놓으면 자연스레 남한 기업들이 관심을 가질 것으로 본다.”

김정일 위원장도 각별한 관심

사실 이제 남쪽 기업들도 러시아 극동지역 진출에 남다른 관심을 쏟아야 할 때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판로 확보다. 북한에서 생산된 제품의 원산지는 북한이기 때문에 세계시장에 내놓고 팔려면 여러 제약이 다른다. 따라서 개성공단에 입주하려는 기업은 먼저 여기서 생산한 물건을 어디에 팔 것인지를 고민할 때다. 전략물자수출통제와 수입국 또는 세계무역기구(WTO)의 통일원산지 규정에 따라 판로 확보가 가능한지를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시장 등에 수출할 경우 북한산 제품에 높은 관세가 매겨져 가격경쟁에서 크게 밀린다. 하지만 북한의 전통적 우호국인 러시아, 중국 같은 옛 공산권은 별다른 규제가 없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쾌속 성장을 하면서, 시장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러시아는 중국에 견주면 아직은 성장세가 미미하다. 하지만 러시아 극동지역은 신흥시장으로 손색이 없다. 이는 중국-러시아간 교역 규모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고지찬 블라디보스토크 무역관장은 “올 7월 말까지 중국의 대러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54%나 늘어났다”며 “양국의 교역 잠재력에 비춰볼 때 아직도 이는 미미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연방정부는 시베리아 극동지역의 외국인 투자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연방정부의 사회 인프라 구축 예산의 20%인 142억달러를 배정해, 2010년까지 에너지, 교통, 자원, 통신설비 개발 등에 투자할 예정이다. 북한 지도부가 최근 몇년 사이 러시아 극동지역에 부쩍 관심을 쏟는 배경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1년과 2002년 연거푸 이 지역을 방문해 주요 공장과 군수산업시설 등을 둘러보면서 옛 공산주의 형제국의 체제 전환 과정과 그 과실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그가 최근 접견한 외부 인사들 가운데는 러시아 극동지역 인사들이 유난히 많다. 러시아 극동 지방정부 관리들이나 군부 장성들과 남다른 우의를 맺어온 것이다. 러시아나 북한의 명절 때면 어김없이 두 나라의 축하 사절단들이 번갈아 오가며 기쁨을 나눈다. “북한은 부지런한 민족이고, 목적 지향성이 강하다. 또 전통을 잘 지키는 민족이다. 이는 앞으로 북한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되리라 본다.” 극동지역 정부대표단을 따라 평양을 여러 차례 방문한 바 있는 말트세바 올가(Maltseva Olga) 러시아 극동기자협회 회장은 가끔 북한 사람들이 자신들과 매우 비슷한 정서를 가진 민족임을 발견하고는 적지 않게 놀란다고 말했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데다, 아직은 양쪽 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좀더 나은 생활을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이 닮아서일까.

러시아, 북한 전력 지원도 고려

북한은 러시아 경제가 나아지자 경제회생의 핵심고리인 옛 소련 시절 건설된 북한의 노후 산업시설 복구지원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기존 정유공장 시설의 개·보수와 러시아 극동지역과 연결된 송유관 현대화 공사에 러시아의 적극적 지원을 기대한다. 북한이 목말라 하는 전력지원도 러시아가 기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연해주에서 가까운 아무르주 브라스카야 수력발전소는 전력이 남아도는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북한에 송전을 하려면 연해주를 거쳐야 한다. 연해주 정부는 전력지원을 대가로 북한의 다양한 협력을 견인할 경우 돈을 크게 벌 수 있다는 계산까지 하고 있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러시아는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자국 영향력의 확대를 위해서도 에너지 지원을 중시하고 있다. 콘스탄틴 폴리크프스키 러시아 극동연방지구 전권대표는 “북한 에너지 문제가 해결되면 핵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여기에 러시아 극동 지역의 드넓은 땅은 남한의 자본과 기술 및 북한의 노동력과 잘 어우러질 경우 북한 주민들의 고질적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발전상과 잠재력은 왜 남북이 끊어진 철로를 하루라도 빨리 잇고, 이를 다시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연결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남북이 힘모아 대륙으로 진출하는 시대는 이제 꿈이 아닌 현실로 바짝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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