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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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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에 미제 폭탄 ‘강림’하다

등록 2004-05-20 00:00 수정 2020-05-03 04:23

매향리 대체로 영월의 공군 사격장 지목돼… 민족 성지이자 자연 생태계의 보고가 사면초가에

태백= 글 · 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자연생태국장

민족의 영산 태백산이 미군 폭격장 문제로 요동치고 있다. 지난 4월 중순 매향리 미 공군 사격장을 폐쇄한다는 발표 이후, 국방부는 대체 사격장으로 강원도 영월의 공군 필승사격장을 지목했다. 그러자 영월과 태백 주민들이 강력 반발해 국방부와 미군을 규탄하는 집회가 날마다 열리고 있다. 지난 5월12일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영월, 태백 주민 500여명은 공군 필승사격장 정문 앞에서 ‘미군 폭격장 결사반대 화형식 및 삭발대회’를 열었다.

미군 깃발까지 태우는 주민들

화형식에서 태운 대형 상징물에는 ‘미 합중국 국방부, 주한미군 사령부, 대한민국 국방부’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다. 이들 정부와 기관을 상징하는 깃발도 함께 불태워졌다. 이날 집회는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조직한 행사였는데도 미군을 상징하는 깃발이 불태워졌다. 지역 주민들이 미군을 규탄하는 화형식을 치르는 일은 아주 드물고 놀라운 일이다. 태백산 미군 폭격장 이전 문제가 지역에서 얼마나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는지 잘 알 수 있다. 지금 영월에서 태백으로 이어지는 국도변이나 필승사격장의 정문이 있는 상동읍 일대 도로 곳곳에는 미군 폭격장을 반대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미군 폭격장 결사반대.’ ‘민족의 성지에 미군 폭격장이 웬 말이냐.’ ‘민족의 정기 태백산이 분노한다. 몰아내자 미군 폭격장.’ ‘폐광의 소외도 서러운데 미군 폭격장이 웬 말이냐.’ ‘폐광되어 한번 죽고 폭격장으로 두번 죽는다.’ 모두 비장한 투쟁의 심정을 담은 내용들이다. ‘태백지역 미군 폭격장 반대대책위’ 홍진표 사무국장은 “태백은 폐광지역 특별법을 통과시킬 때만큼이나 절박한 상황이다. 태백은 지금 청정한 자연을 이용해 관광지로 되살아나려고 애쓰고 있는데, 폭격장을 확대하려는 것은 우리보고 죽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라고 지역의 비장한 분위기를 전했다. 홍 국장은 “다른 어떤 지역 사람들이라도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청천벽력을 그대로 수용하겠는가. 정부는 사북 사태가 25년 만에 부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대책위는 5월22일 태백지역 사회단체와 주민들이 참가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 예정이다.

필승사격장은 영월군 상동읍 천평리에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영월군에 속하지만 사격장의 공간 범위는 태백시 일대는 물론이고 봉화군까지 걸쳐 있다. 태백산 정상을 중심으로 남쪽의 구룡산까지 백두대간에서도 손꼽히는 중심지역이다. 면적이 1800만평에 달하는 국내 최대 종합전술사격장이다. 공군은 물론 육군과 해군을 포함한 국방부 전체 사격장 중에서 가장 큰 규모다. 이곳은 기총사격과 모의탄 투하는 물론이고 실무장탄 폭격 훈련까지 가능한데, 지난 1981년에 건설돼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건설 당시부터 미군과 협약을 맺어 함께 사용하고 있다. 주한미군뿐만 아니라 괌, 오키나와, 타이 그리고 태평양 해상의 항공모함에서도 항공기가 발진해 폭격훈련을 한다. 필승사격장은 미군이 사용하는 훈련장 중 알래스카, 나토 훈련장과 함께 3대 육상폭격 훈련장으로 꼽힌다. 한국 공군은 주로 F16, F4, F5 같은 기종으로 사격훈련을 하지만, 미군은 F16과 A10은 물론 F15 같은 기종으로 폭격 훈련을 하고 있다. 훈련 중인 전투기가 급강하해 목표물에 기총사격이나 폭탄을 투하한 뒤 급상승하다가 추락하는 사고도 몇 차례 있었다고 한다.

‘문제성’ 사격 훈련은 한국에서?

태백산은 백두대간의 중심이다. 단군신화의 역사가 서린 곳으로 해마다 개천절이면 태백산 정상 천제단에서 단군제를 지낸다. 우리 민족의 ‘국조신화’의 현장이 태백산이다. 태백산은 역사의 의의뿐 아니라 환경과 자연 생태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산이다.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가 태백산 자락에 걸쳐 있다. 백두대간 다음으로 중요한 남한 생태축인 낙동정맥도 태백산에서 갈라진다. 자연 생태계에서는 지리산, 오대산, 설악산 같은 국내 으뜸의 산들과 같은 반열이다. 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남방 한계선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군 폭격 훈련장이 들어온 뒤부터 동물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멧돼지같이 소음에 잘 적응하는 종을 제외하고는 주요 동물들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특히 새들은 다른 산들에 비해 아주 적은 개체수만 살아 있다. 영월미군폭격장반대대책위 황건국 위원장은 주민들의 의견을 이렇게 전했다. “공군 사격장 때문에 20년 동안 우리는 온갖 피해와 희생에도 숨죽여 살아왔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미군 폭격장뿐만 아니라 한국 공군의 사격장도 사용을 중지하게 하는 활동에 들어갈 것이다.”

미군 폭격장 이전 논란을 계기로 영월과 태백 지역 주민들은 공군 폭격 훈련장의 완전 폐쇄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매향리 사격장의 이전 논란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국방부의 부실한 사격장 관리가 원인이었다. 20년 이상 실무장탄을 사용하는 훈련을 하면서 20, 30mm 발칸탄과 1m가 넘는 대형 폭탄을 쓰면서도 제대로 된 토양오염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훈련을 해왔다. 한국군과 미군들이 사용한 탄 중에는 중금속 물질이 포함된 것도 있다. 그런데도 토양오염에 대한 실태조사나 오염원에 대한 토양 복원을 위한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국내 제일의 생태보고인 태백산에 대한 제대로 된 생태계조사 역시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산림청이나 환경부는 국방부 때문에 남한 제일의 생태계를 과학으로 되짚어보는 작업조차 못했다. 사격훈련을 하지 않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이용해 조사를 하면 얼마든지 가능한데도 국방부는 아예 사격장 출입을 못하게 했다.

태백산 미군 폭격장 이전 논란은 사태가 심각한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다. 미군이 요구하는 대로 질질 끌려만 다니는 국방부에 이 문제를 맡겨두기에는 상황이 만만치 않다. 과거 필승사격장에서 일했던 관계자는 “매향리 사태가 불거진 이듬해인 2001년부터 사격장 내부 시설을 크게 정비하는 공사가 있었다”고 말했다. 아무런 사회적 합의 없이 이미 수년 전부터 태백산으로 미군 폭격장을 이전하는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군이 매향리를 사용하다가 문제가 커지자 다른 사격장을 요구하는 근본 까닭은 사격장의 심각한 환경 문제 때문이다. 미군은 자국의 영토에서 운용하는 폭격 훈련장이나 사격장에서는 엄격한 환경관리를 하고 있다. 매향리처럼 사격장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은 미국 내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래서 미군들은 환경오염 같은 많은 문제가 생기는 훈련은 대부분 해외에서 하고 있다. 푸에리토리코의 비에스케스, 오키나와, 한국의 매향리, 영월 등이 그곳이다.

그랜드캐니언에서 사격 훈련 할까

미국은 이라크 포로 학대 문제를 통해서 그들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겉으로는 인권을 말하면서 제네바협약을 무시하며 저항능력을 잃은 포로의 인권은 내팽개쳐버린 것이 바로 미국이다.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한다면서 정작 자신들이 가장 많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 또한 미국이다. 이런 이중성은 태백산을 자신들의 폭격 훈련장으로 사용하겠다는 요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과연 미국에서도 태백산 같은 중요한 땅에서 전투기의 실무장탄을 투하하는 훈련을 할까? 그랜드캐니언이나 요세미티, 옐로스톤 같은 곳에서도 폭탄을 퍼붓는 훈련을 하는지 태백 주민들은 미군 당국에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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