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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캠페인] “답답해서 잠을 잘 수가 없다”

등록 2007-03-03 00:00 수정 2020-05-03 04:24

국방부와 협상 끝에 자진 이주에 합의한 대추리 주민들…이주단지 위치 놓고 논란, 생계 대책 생각하면 한숨만

▣ 평택=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평택 시내에서 대추리로 들어가는 차편은 딱 하나뿐이다. 민자역사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인 평택 기차역 앞 오거리에서 찻길을 건너 5분쯤 걸으면 개봉 영화 세 편을 동시에 스크린에 거는 평택 최대 ‘멀티플렉스’ 평택극장이 나온다. 극장 앞의 버스 정류장에서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오는 16번 버스를 타고 한적한 논길을 25분쯤 달리면 미군부대를 둘러싼 철조망과 그 너머 체크 무늬의 물탱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버스는 그 철조망을 크게 휘돌아 다시 2~3분쯤 달리다 반쯤 부서진 건물 잔해와 국방부의 참호를 지나 인적 드문 마을 입구로 진입하고, 방문객들은 “여기는 평화와 예술의 마을 대추리입니다”라고 쓰인 작은 간판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지난 4년 동안 평택으로 밀려오는 미군들에 맞서 기지 확장 반대 투쟁을 벌여온 평택 대추리다.

공동체는 또 쪼개지는가

평택 주민들과 국방부 산하 주한미군기지이전사업단은 지난 2월13일 오후 2시50분 평택시청 신관 소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남아 있던 59가구 주민들이 오는 3월31일까지 자진 이주를 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지난 2003년 7월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팽성대책위원회(이하 팽성대책위)를 결성한 뒤 3년8개월 동안 이어진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문정현 신부는 “잔인한 정부 앞에서 주민들에게 더 이상 투쟁을 계속하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자진 이주’를 전제로 한 국방부와 주민들 사이의 대화가 시작된 것은 2006년 12월28일 김지태 대추리 이장이 석방되면서부터다. 첫 대화가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1월2일이었다. 그 뒤 42일 동안 주민과 국방부 관계자들은 사나흘에 한두 번꼴로(모두 12번) 만나 협상을 벌인 끝에 합의에 도달했다. 김택균 팽성대책위 사무국장은 “대화 도중 ‘자꾸 시간을 끌면 강제 철거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협박에 가까운 채근이 있었다”고 말했다. 협박이 없었더라도 주민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많진 않았을 것이다. 김지태 이장에 이어 새로 대추리 이장이 된 신종원 팽성대책위 조직국장은 “그 답답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냐”며 한숨을 쉬었다.

대화에 나서는 주민들의 요구는 세 가지로 모아졌다. 첫째는 미군기지 이전 과정에서 국방부가 저지른 폭력과 고압적인 태도에 대한 사과였고, 둘째는 평택 투쟁으로 재판을 받고 있거나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면이었고, 셋째는 ‘대추리’라는 주민 공동체를 보존해달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요구는 돈이 들지 않는 요구였고, 따라서 쉽게 합의에 다다를 수 있었다. 주한미군기지이전사업단이 2월13일 기자회견 자리에서 뿌린 보도자료에서 정부는 “주민이 고향을 떠나야 하는 아픔과 어려움을 겪게 된 데 대해 정부 측은 유감 표명과 구속자에 대한 사법처리 선처를 사법당국에 요청키로 하고, 남아 있던 59가구 주민들은 오는 3월31일까지 자진 이주를 한다는 것이 (이주 합의의) 골간”이라고 밝혔다.

서산 간척농지는 채산 못 맞춰

문제는 세 번째 요구였다. 국방부와 주민들은 옮겨갈 땅의 위치·가격·면적 등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주민들은 수십 년간 이어온 안온한 공동체가 붕괴될 것을 걱정했고, 국방부는 “정치적 이유 등으로 (미군기지 이전 사업)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면 이에 대해 싸울 것”이라고 엄포를 놓은 주한미군 사령관을 걱정했던 것 같다. 주민들은 “이주단지가 조성된 뒤에 이주하겠다”고 요구했지만, 국방부는 “일단 전셋집으로 옮긴 뒤 이주단지 조성 공사가 끝나면 다시 이주하라”는 요구를 굽히지 않았다. 주민들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평택시가 마련한 평택 시내 미분양 빌라로 3월31까지 이사한 뒤 이주단지 공사가 끝나면 다시 한 번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다음 문제는 위치와 가격이었다. 애초 정부는 팽성읍 노와리를 이주단지로 제시했지만, 일부 주민들이 발전 전망이 높은 남산리 CPX 훈련장 터를 고집했다. 노와리는 경기도의 최남단 마을로 옛날에 국립종축원이 있던 국립 축산연구소 축산자원개발부가 있는 오지다. 오두희 평화바람 상임활동가는 “노인들은 주민들이 모두 함께 노와리 쪽으로 가길 희망했지만, 젊은 사람들은 앞으로 개발 가능성이 있고 땅값도 비싼 남산리 쪽을 희망해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분양 면적과 분양가를 둘러싼 복잡하고도 미묘한 여러 차례의 실랑이 끝에 노와리의 평당 매입 가격은 40만원(최대 대지 200평, 밭 100평), 남산리는 90만원(대지 150평)으로 결론났다. 마을 대표들은 2월22일부터 주민들을 상대로 “어느 쪽으로 가겠냐”고 수요 조사를 벌여 국방부 쪽에 통보할 예정이다. 대추리 지킴이 해밀은 “노인들이 ‘우리만 노와리 구석으로 가고, 젊고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남산리로 빠지는 게 아니냐’며 불안해한다”고 말했다. 의견을 한데 모으지 못하면 3년8개월의 투쟁 과정에서 갈래갈래로 찢긴 마을 공동체는 다시 둘로 갈라질 수 있다.

투쟁이 끝난 대추리에서 주민들은 눈앞에 닥친 먹고사는 문제로 허둥대고 있었다. 신종원 이장은 “앞으로 다시 농사를 지어야겠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깜깜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대추리에 남은 농민들에게 충남 서산 간척농지 30만 평을 추가로 알선해주기로 했지만, 평택의 농민들은 “그 땅은 채산이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서산으로 농사 지으러 간 신대리 사람들이 4300여 평짜리 땅 한 구간에서 1천만원 정도 수확을 얻었거든.” 신종원 이장이 말했다. 대추리에서는 1500평 한 구간에서 최소 쌀 32가마가 난다. 이를 돈으로 계산하면 소출액은 550만원선. 서산 땅 한 구간 넓이는 4300여 평으로 농민들이 대추리에 머무를 때와 비슷한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이곳에서 대략 1600만원의 소출이 나와야 한다. 신종원 이장은 “서산 땅의 생산성은 평택 땅의 절반 정도”라며 “그곳까지 오갈 때 드는 기름값과 간기가 남은 땅을 일구느라 망가지는 농기계 값을 생각하면 채산을 맞출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여기 땅값은 많이 올랐지, 나오는 땅은 없지.” 그는 “답답해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더 혹독한 삶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은 노인들이다. 2월21일 열린 904일째 촛불집회에 참석하려고 마을회관 앞 농협창고로 나온 정덕례(80) 할머니는 “4년이나 징한 세월이었다”고 말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며칠 전에 집을 대청소했는데 4년 전에 100만원 들여 고쳐서 그런지 깨끗해. 새집 같아. 이런 집을 두고 가야 하는 게 말이 돼?” 그는 열일곱에 결혼해 김포로 시집갔다가 이곳 땅 세 구간을 사갖고 들어왔지만 1970년대 평택을 몰아친 대규모 토지 분쟁인 동백흥농계 사건에 말려 가진 것을 모두 잃었다. 땅이 없는 노인들은 평택시청이 마련해준 공공근로 사업에 나가 하루 품삯 3만3천원에 쓰레기를 주워야 한다. 그나마 일자리를 주는 것은 만 75살까지로, 정 할머니는 쓰레기 조차 주울 수 없다. 오른다리를 절며 집회장에 나온 김영녀(82) 할머니의 우물거리는 소리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추리를 기억하려는 사람들

주민들과 함께 대추리를 지키고 가꿔온 여남은 명의 지킴이들은 이곳에 살았던 노인들의 육성을 담은 인터뷰집을 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책 제목은 2년 전 평화바람에서 나온 인터뷰집의 이름과 같은 ‘들이 운다’로 정해졌다. 대추리 지킴이 돕헤드는 대추리를 배경으로 한 노래를 만들었고, 녹음 작업을 끝냈다. 곧 음반이 나올 것이라 한다. 경찰청의 ‘상영 불가’ 결정으로 화제를 모았던 기록영화 을 만든 푸른영상의 정일건 감독도 후속 작품을 계획 중이다. 그는 6mm 카메라를 들고 분주한 모습이었다. 머잖아 주민들은 떠나고 지킴이들도 떠나고 마을은 국방부의 포클레인에 점령돼 미군의 품으로 넘어갈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일이 있다면, 미군들의 막사, 그들의 활주로, 그들의 교회, 그들의 쇼핑센터, 그들의 볼링장, 그들의 클럽, 그들의 호텔, 그들의 골프 코스가 들어서는 땅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 살았던 노인들이 청춘을 바쳤고, 싸웠고, 마침내 패배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주 조건은 합당한가

재산세 평균 3만원 안 돼야 지원금·보조금 수령

국방부와 주민이 합의한 이주 조건의 핵심은 가난한 노인들에게 1천만원씩 지급되는 ‘이주위로 추가지원금’과 2014년까지 한 달에 20만원씩 지급되는 생활 보조금이다. 이 돈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은 2006년 1월11일 현재 만 65살 이상 노인 가운데 최근 3년 동안 낸 재산세의 평균이 3만원을 넘지 않는 사람들이다. 김택균 팽성대책위 사무국장은 “웬만한 양옥집 하나만 있으면 기준을 훌쩍 뛰어넘는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 돈이 돈 없는 노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또 평택시청 앞에 나와 쓰레기를 줍고 일당 3만3천원을 받는 공공근로 사업도 2014년까지 계속하기로 했다. 단, 공공근로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나이 제한은 만 75살로 정해졌다.
다른 이주 조건들은 대추리 주민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쪽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국방부는 주민들의 이주단지가 만들어지는 평택 노와리에 30가구 이상이 이주할 경우 2천 평 크기의 운동장과 200평 크기의 기념관을 나랏돈을 들여 지어주기로 했다. 또 지금 대추리에 있는 나무를 가구당 10그루 이내에서 옮겨 심을 수 있도록 했고, 옮겨가는 마을의 행정구역 명칭을 ‘대추리’로 바꿀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기로 했다. 정부에서는 주민들의 재취업을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고 말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대다수가 “농사를 계속 지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마땅한 땅이 없어 농업을 포기하는 사람이 속출할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3월31일까지 마을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이사 준비 때문에 일정이 다소 늦춰지는 것은 국방부 쪽에서 양해하기로 했다. 남은 주민들은 일단 평택시청이 마련해준 빌라 건물로 이사했다가, 노와리와 남산리에 건설되는 이주단지 공사가 완공되면 그쪽으로 집단 이주할 계획이다. 공사 기간은 2년 정도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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