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주세요.” 대통령 후보 반열의 정치인에 대한 유권자 요구는 이율배반적이다. 강력한 팬덤을 만들라면서 지지층에 매몰되지 말라고 한다. 순발력 있는 현안 대처와 국가적 백년대계 마련을 동시에 해내길 바란다. 언론이나 대중과 날것 그대로 소통하는 동시에, 정제되고 안정감 있는 메시지를 달란다. 포퓰리즘적 기질도 좀 있어야 하지만 전문가를 존중해야 하고, 불필요한 규제를 혁파해서 기업이 뛰어놀게 하되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보호하고 분배를 강화해야 한다.
단언컨대 이렇게 상반된 조건을 충족할 인물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체로 대통령선거에서는 과거 권력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새로움과 차별화 이미지가 강한 인물에 대한 요구가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부활 이후 보수와 진보의 ‘10년 주기’ 정권교체 법칙이 존재하지만 캐릭터(인물) 관점에서 봐도 또 다른 ‘10년 주기’가 나타난다.
1992년과 1997년 대선에선 평생 정치인으로 살아온 카리스마적 리더인 김영삼과 김대중이 잇따라 당선됐다. 두 사람 다 1920년대생이다. 이후 10년은 앞선 두 사람과 달리 개성과 활동력이 강한 1940년대생 노무현과 이명박이 차례로 집권했다. 그다음은 그 둘과 달리 차분하고 정제된 스타일을 가진 1950년대생 박근혜와 문재인이 차례로 대통령이 됐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 상황은 10년 전인 2012년 대선 정국과 유사하다. 당시 빅3였던 문재인, 박근혜, 안철수는 서로의 여러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명박과 상반된 스타일의 소유자란 점에서 겹치는 면이 있었다. 내성적 성격, 적은 말수, 언론 접촉을 꺼리는 면모 등은 통상적으로 정치인의 약점이지만 당시 유권자에게는 전임자들과의 차별성, 강점으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될 수 있었다.
2022년 대선을 앞둔 현재의 빅3 윤석열, 이재명, 홍준표 역시 이전 두 사람과 다른 스타일의 소유자들이다. 집권여당 대통령 후보로 선착한 이재명 후보는 별호가 ‘사이다’일 정도다. 성남시장부터 경기도지사까지 지내는 동안 거침없는 발언이 그의 강점이고 그 강점을 무기로 여기까지 왔다. 국민의힘 윤석열 예비후보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정부 때는 물론 현 정부에서도 국감장 등에 설 때마다 ‘공무원’스럽지 않은 언행이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홍카콜라’ 홍준표 예비후보 역시 이런 면에서는 원조라 부를 만한 인물이다.
반면 이낙연·정세균·최재형 등 안정된 품성과 정제된 언행을 강점으로 삼았던 인물들은 모두 예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아직 진행 중인 국민의힘 경선에서도 유승민·원희룡 같은 ‘범생 스타일’ 후보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현재로선 세 사람 중 어느 한 명이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스타일의 10년 주기 이론이 맞아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재명은 ‘목적구’, 윤석열은 ‘폭투’문제는 터프함이나 거침없음 같은, 선두주자들을 여기까지 끌어올린 강점이 최근 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권자가 세 후보에게서 떠올리는 단어가 욕설, 막말, 실언, 망언 같은 것이다. 말의 내용과 스타일을 놓고 봤을 때 각 후보 사이 큰 변별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화자가 누군지 가려놓고 보면 후보 발언인지, 소총수 격인 부대변인 발언인지 구별도 잘 안 될 지경이다.
차이점을 짚어볼 순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경우 자신의 의도와 언행이 크게 다르진 않아 보인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을 반격하는 과정에서 나온 ‘국민의짐’ ‘도둑의힘’ 발언이나 국정감사장에서 야당 의원들의 공세에 “흐흐흐” 하고 실소로 대응한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위기에 처할수록 강한 반격을 가해 지지층을 결집하고 국면을 전환하겠다는 전략적 포석 속에 나온 ‘목적구’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 “전두환이 쿠데타와 5·18 빼놓고 정치는 잘했다” 같은 윤석열 후보의 발언은 목표지점과 실제 탄착점이 다른 ‘폭투’(야구에서 투수가 던진 공이 포수가 보통의 수비로는 잡을 수 없을 만큼 빗나간 공)에 가까운 면이 있다. 두 사람에 비하면 원조 ‘막말’ 정치인 홍준표 후보는 요즘 정책 질문에 대한 허점을 드러내는 일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차분한 느낌까지 준다.
전체 표심보다는 지지층 결집이 더 중요한 당내 경선 과정이라 이런 성향이 도드라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본선에 간다고 한들 최종 후보들의 스타일이 크게 바뀔지는 의문이다. 일단 비슷한 캐릭터의 소유자들끼리 경쟁을 벌이다보니 교정 필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품격이나 안정감 면에서 상대방이 강점을 보이면 그걸 의식하겠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현재 이재명과 윤석열 두 후보의 비호감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 캠프 관계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물어봤더니 흥미롭게도 “우리 후보가 원래 그렇다”는 대답이 똑같이 돌아왔다. 후보 개인의 캐릭터란 것이다. 윤 후보 쪽 관계자는 “저쪽(이재명 후보 쪽)이 고의범이라면 우리는 과실범 아니냐. 고의범의 죄질이 나쁘다”고 덧붙였다. 이 말을 전해주자 이 후보 쪽 관계자는 “저쪽은 무능해서 그런 것이고 우리는 유능하다”고 반박했다.
품격 있는 선거로 가기 위해 하나 기대할 만한 것은 유권자의 질타에 의한 압박이지만, 같이 맞는 매는 덜 아프다. 게다가 현 상황에서 보면 이번 대선을 이끄는 힘은 공포와 혐오다. ‘우리 후보’에 대한 애정과 지지보다 상대편에 대한 반대의 에너지가 훨씬 큰 선거다. 각 후보가 이 에너지를 흡수하면 언행은 더 거칠어질 가능성이 크다.
본선이 시작되면 후보들 모두 ‘폭투’를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목적구’로서 빈볼(투수가 기선 제압을 위해 타자의 머리를 향해 의도적으로 던지는 공)은 오히려 더 많아질 수 있다. 그러면서 상대의 빈볼은 의도적 폭력구로 규정하고, 내 빈볼은 정당한 보복구라고 주장할 것이다. 많은 관중이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이기기 위해선 어쩔 수 없으니까.
하지만 빈볼이 아니라 몸쪽에 바짝 붙이는 볼을 집어넣을 수 있는 사람이 좋은 투수다. 직구로 상대방 머리를 맞히면 퇴장당한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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