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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개입’과 ‘독립’ 사이에 선을 긋다

사법농단 관련된 법원행정처 판사들 첫 유죄판결 나와… ‘직권남용’ 혐의 인정
등록 2021-04-03 05:16 수정 2021-04-04 04:24
사법농단 사건에 연루된 임성근 전 부장판사의 법관 탄핵 사건 첫 재판을 앞둔 2021년 2월25일 헌법재판소 풍경. 연합뉴스

사법농단 사건에 연루된 임성근 전 부장판사의 법관 탄핵 사건 첫 재판을 앞둔 2021년 2월25일 헌법재판소 풍경. 연합뉴스

“피고인 혐의는 어느 하나 뺄 수 없이 중대하지만, 그중에서도 스스로도 판사이면서 재판권 행사를 방해한 것은 특히 중대합니다.”

2021년 3월23일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재판장 윤종섭)가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양형 이유를 읽어 내려갔다. 2019년 3월 시작돼 2년여 진행된 1심이 마무리되던 이날, 피고인석에 앉은 이규진 전 위원의 얼굴은 다소 붉게 상기돼 있었다. 오후 2시부터 3시간40분 동안 쉬지 않고 선고 이유를 설명한 끝에 재판부가 주문을 읊었다. 이규진 전 위원은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사법농단 재판에서 첫 유죄판결이 내려지면서, ‘재판 개입’을 처벌할 가능성이 열렸다.

사법농단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2011년 9월~2017년 9월) 사법부 행정 조직인 법원행정처가 일선 재판에 개입하고 법원행정처 기조와 어긋나는 판사와 판사들의 연구모임에 불이익을 준 사건을 망라한다. 이규진 전 위원 등은 법원행정처 핵심 간부로, 재판 독립을 위협하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 처·차장의 지시를 법원행정처 심의관이나 재판부에 내려보내는 가교 구실을 했다.

판사인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기 위해, 그와 함께 일하거나, 그로 인해 재판 독립이 침해됐다는 전·현직 판사들이 증인으로 줄줄이 법정에 불려나왔다. 재판에서 오간 주장과 진술을 종합해 숙고한 결과물은 458쪽 판결문으로 남았다(이하 이규진 1심 판결). 판결문의 핵심 부분(판결문 140~193쪽)은 직권남용죄가 적용될 수 있는지 따져가며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재판은 무엇인가. 나아가 판사는 누구인가.’

직권남용죄(형법 제123조)는 공무원이 자신의 직무상 권한을 남용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그 권리 행사를 방해해야 성립한다. 공무원의 직무상 권한이 전제돼야 남용이 가능하고, 그렇게 직무상 권한이 남용돼야 실제 행위의 상대방이 피해 입게 된다. 따라서 먼저 공무원의 직무상 권한이 인정되는 게 중요하다.

재판 개입은 직무 권한 아니다?

“진행 중인 재판에 관여할 수 있는 직무상 권한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건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장의 신성불가침한 영역입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2014년 2월~2016년 2월)로 재직하며 세 건의 재판에 개입한 임성근 전 부장판사는 이같이 주장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재판에 개입할 직무상 권한이 존재할 수 없으니, 남용도 성립할 수 없다. 2020년 2월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재판장 송인권)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이하 임성근 1심 판결). 임 전 판사의 행위가 위헌이라 짚으면서도 무죄를 선고한 까닭이다. 재판 독립의 원칙이 오히려 재판 개입 처벌을 가로막은 역설적 상황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 독립은 헌법이 보장하는 원칙이다. 중요하다. 소송 당사자의 주장은 엇갈리기 마련이고, 판사는 그 양쪽의 주장을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판단한다. 기록 한 번 들춰보지 않고, 법정 한 번 들어와본 적 없는 제3자가 누군가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재판에 간섭한 결과물을 재판이라 할 수 있을까? 재판부는 강하게 단언한다. “그건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재판 독립이 신성불가침한,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원칙은 아니다. 누구나 재판받을 권리가 있고(국민의 재판청구권), 그 재판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진행돼야 한다(헌법과 법률의 기속성). 재판 독립은 그 자체로 완성된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그러한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사법 책임을 실현하는 원칙이자 방법이다. 재판부는 이렇게 밝혔다. “헌법과 법률은 무엇보다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중요하게 여기고, 재판의 헌법과 법률의 기속성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재판 독립은 그에 버금가게 중요하게 여겼다고 본다.”

재판은 재판 독립과 사법 책임이 조화를 이뤄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는 직권남용 무죄를 선고한 임성근 1심 판결과 그 취지가 다르지 않다.

왼쪽부터 차례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임성근 전 부장판사. 재판 개입 혐의를 받은 임 전 부장판사는 2020년 2월 1심에서 무죄 판단을 받았지만, 이 전 상임위원과 이 전 실장은 2021년 3월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연합뉴스

왼쪽부터 차례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임성근 전 부장판사. 재판 개입 혐의를 받은 임 전 부장판사는 2020년 2월 1심에서 무죄 판단을 받았지만, 이 전 상임위원과 이 전 실장은 2021년 3월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연합뉴스

“판사도 미숙하고 나태할 수 있다”

이규진 1심 판결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재판 사무를 담당하는 판사를 살핀다.

판사는 하늘에서 떨어진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단련되고 숙련돼야 하는 존재다. 사법시험을 거쳤다뿐이지, 이제 막 임관한 판사가 법복을 입는 바로 그 순간부터 직업적으로 숙련되거나 윤리적으로 성숙한 완성된 판사가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지방법원 배석판사 → 단독판사 → 고등법원 배석판사 → 지방법원 부장판사 → 고등법원 부장판사 등을 거치며 재판 경험이 풍부한 동료 판사로부터 지도받도록 해왔다. 또한 근무성적과 자질평정권, 연임심사권, 인사권을 수단으로 판사 스스로 정진하도록 했다.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머지않아 경력 법조인이 판사로 선발 임명되는 등 판사 인사제도가 크게 변화하지만, 이 같은 주요한 법과 제도는 아직 유지되고 있다.

재판부는 나태하고 미숙한 판사가 있을 수 있다고 봤다. 쟁점이 복잡하지 않은 쉬운 사건만 골라서 처리하다가 오랫동안 결론 내리지 못한 사건이 산더미처럼 쌓이거나, 행정·특허 같은 전문 분야에 대한 법 지식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해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국민의 재판청구권과 판사의 독립이라는 두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상소(재판 확정 전 상급 법원에 판결의 취소나 변경을 요구하는 불복신청)로 그 잘못을 바로잡는 데도 한계가 있다.

재판부는 “국민의 재판청구권이 재판 독립의 가치와 충돌할 때, 게으르고 미숙한 판사가 명백하게 잘못했을 때,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판사를 상대로 어떤 지적도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불합리하다”고 했다. 즉, 재판 사무의 핵심 영역(사실인정, 인정사실에 대한 헌법·법령의 해석과 적용, 이를 위한 모든 실체적 또는 절차적 판단)에 대해 사법행정권자가 지적할 권한이 있다고 본 것이다.

물론 한계가 있다. 사법행정권자는 나태한 태도나, 재판 과정에서 명백한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서, 그 판단 방법과 방향을 설정하는 ‘권고’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일선 판사에게 권고했다면 사법행정권의 정당한 범위를 벗어나 직무상 권한과 밀접하거나 상당한 정도로 관련성이 인정되는 월권적 직권남용 행위로 볼 수 있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법원행정처 지적에 인사권 떠올리기 마련

예컨대 사법행정권자가 지적 권한을 남용해 판결 내용이나 절차를 수정하라고 권고했을 때, 일선 판사는 그 지적 권한의 원천인 사법행정권자의 연임심사권, 근무성적과 자질평정권, 인사권을 떠올릴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그 권고를 무시하기 어렵다. 직권남용의 상대방인 판사가 의무 없는 일을 하거나, 권리행사를 방해받을 수 있는 지점이다. 범죄로 인정된 이규진 전 위원의 두 가지 재판 개입 혐의는 이렇다.

#1. 2016년 1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지방의회의원 광주지법 1심 재판이 열렸을 때다. 헌법재판소와의 위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고 판단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의 요구를 이규진 전 위원을 거쳐 전달받은 재판부 재판장은 “재판 결론과 이유가 올바르지 못할 경우 고등법원 부장판사 보임에서 누락될 수 있다는 불안감 등으로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결론을 재검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배석판사들의 반대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판결 선고를 후임 재판부에 미루기로 협의해 변론을 재개하고 선고기일을 추후로 미뤘다.

#2. 2015년 4월 헌법재판소와의 위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법원행정처 지시로 이규진 전 위원은 재판부에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의 결론을 바꾸라고 말했다. 재판부 재판장은 대법원의 정책적 판단을 거스르는 데 부담을 느끼고 배석판사에게 “법원행정처에서 저렇게 난리를 피우니 어떻게 하겠느냐”며 단순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으로 그 재판의 결론을 바꿨다.

이규진 전 위원에게 재판 결론을 유도하는 권고를 들어도, “그런 말은 잊어버리기로 마음먹고” 배석판사들과 합의해 법원행정처 기조와 다르게 자의대로 재판한 재판부도 있었다. 인사상 불이익을 예상하면서도 법원행정처의 권고를 무시함으로써 재판부는 결국 재판 독립이 침해되고 국권의 공정성이 훼손되는 결과로 나아가는 것을 막아냈다.

이규진 1심 판결을 두고 법원 안팎에서는 설왕설래가 많다. 두드러지는 건 일부 판사의 비판적 의견이다. 죄형법정주의(범죄와 형벌을 미리 법률로써 규정해야 한다는 형법상 기본원칙)에 따라, 법률 해석은 엄격해야 하는데, 재판 개입 권한을 만들어내 사법행정권자의 재판 개입 통로를 열어줬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검찰이 직권남용죄를 이용해 수시로 수사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역에 근무하는 한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피고인을 처벌하기 위해 ‘재판에 개입할 수 있다’는 없는 권한을 만들어내고 다수의 판사를 모욕했다.”

재판 개입 권한 만들어낸 모욕적 판결?

그러나 판결 요지와 직권남용 법리 해석을 긍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 다른 판사의 말이다. “판결문을 읽어보면 재판의 내용과 절차 진행에 관여해 특정 방향의 결론을 권고하는 행위는 지적 권한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명시돼 있다. 이 판결은 그렇게 하면 처벌된다고 천명한 것이다. 법원 내부 비판은 허수아비 때리기다.” 조기영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직권남용죄는 ‘직권’과 ‘남용’을 따로, 또 함께 읽어야 한다. 주어진 직권 범위 안에서의 남용은 남용이라 보기 어렵고, 주어진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남용이라 봐야 한다. 직권남용 상대방의 입장에서 봤을 때 법령상 정당한 권한의 한계 영역, 밀접하게 관련성 있는 부분을 포함해서 직무상 권한을 해석한 (이규진 1심 판결은) 직권남용 입법 취지에 맞다.”

직권남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하급심에서 나온 만큼, 대법원 판단까지 거쳐야 할 것이다. 이규진 전 위원과 이민걸 전 기조실장, 검찰은 모두 항소했다.

재판이란, 판사란 무엇인가

‘선배 법관으로서 조언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직무상 권한을 행사한 게 아닙니다. 법관 독립에 위배되지 않았습니다.’

재판 개입이 1심에서 최초 유죄판결을 받은 바로 다음날(3월24일) 헌법재판소에서는 헌정사상 첫 법관 탄핵심판이 열렸다. 임성근 전 판사의 탄핵심판 변론준비기일이었고, 임 전 판사 쪽은 형사재판을 받을 때 했던 주장을 되풀이했다. 탄핵안을 소추한 국회 쪽 대리인은 “헌법재판에서 심리하는 것이 우리 헌법이 규정하는 아주 귀중한 가치, 사법권 독립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사법부 구성원이 사법행정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 어떤 행위는 해야 하고 어떤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하는지 경계선을 긋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판사는 지시받는 것에 친해지면 안 돼”
“재판하는 판사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지시받는 것에 친해져선 안 된다.”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과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등에 대한 판결문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판사는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보임되면 재판 사무를 잠시 중단하고 법원행정처에서 사법제도 지원, 인사업무 등을 맡게 된다.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독립해서 판단해오던 판사가, 하루아침에 상급자 지시를 받아 사법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1~2년이 지나 다시 재판 사무를 맡게 될 판사가 타인의 지시를 받는 것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은 재판 독립을 위협할 수 있어 위험하다고 이규진 1심 판결은 봤다. 그럼에도 사법행정 사무를 하려면 재판 경험이 있어야 하기에 법원행정처가 그 위험성을 감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법농단 사건에서 심의관은 법원행정처 수뇌부 지시에 따라 수족처럼 움직였다. 재판 개입의 실행 방안을 정리하거나, 판사들의 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와 그 소모임을 와해하는 전략을 세워 문건으로 정리했다. 사법농단에 연루된 피고인들은 이 문건이 행정 공무원 신분으로 작성한 단순 아이디어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무마하려 했지만, 심의관도 법관윤리강령과 헌법이 정한 기준과 절차에 따라 사법행정 사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판결문은 짚었다.
재판부는 다른 국가기관으로 파견된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도 마찬가지로 누군가로부터 지시받는 것에 친해져서는 안 된다고 봤다. 판사의 본분은 독립적으로 재판하는 것이므로.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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