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이 정권에서 또 현실이 됐다. 강고한 동맹으로 여겨졌던 박근혜 정권과 가 한판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분연히 떨쳐 일어난 에 놀라 잠시 주춤한 권력은 자세를 가다듬고 두세 번의 잽을 날린 뒤 강력한 훅 한 방으로 승기를 잡았다. 얼른 일어나 반격을 가하려던 는 청와대의 강력한 킥에 다시 뒤로 나자빠져 ‘녹다운’됐다. 이후 는 그냥 주저앉은 채로 ‘이거 너무하는 거 아냐?’란 볼멘소리만 늘어놓고 있다.
실제 벌어진 일을 복기해보면 이런 ‘문학적 과장’이 허용될 만한 사태라는 걸 알 수 있다. 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처가의 부동산 문제를 처음 1면에 보도한 것은 7월18일이다. 이후 여러 언론이 보도를 이어갈 조짐을 보이자 우병우 수석은 나름 해명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물론 성실한 해명보다는 고압적 태도와 ‘거짓말’이 부각됐고 우병우 수석에 대한 의혹 보도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느 정권 같았으면 일단 직을 거두고 수사를 받게 했겠지만, 어디까지나 ‘진실한 사람’에 한해, 의혹만으로 그만두지 않게 하는 방침을 갖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고난을 벗 삼아 당당히 소신을 지키라”며 우병우 수석을 감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들이받고, 폭로하고 </font></font>이는 대통령이 언론이 제기한 의혹에 대해 청와대의 대응 방향을 정확히 잡아준 것이지만, 7월23일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감찰에 착수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은 다시 확대됐다. 일부 언론은 우병우 수석이 ‘주말 지나면 잠잠해질 텐데 왜 일을 크게 만드느냐’라며 불쾌해했다고도 보도했다. 확실한 것은 이때부터 정권 차원의 ‘출구전략’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8월5일 각 언론은 우병우 수석의 처가 부동산 의혹의 출처가 ‘지라시’이며, 이를 유포한 이는 애초 알려진 청와대 관계자가 아니라 대기업 홍보실 직원이었다는 걸 경찰이 밝혀냈다고 보도했다. 경찰은 이 사실을 카카오톡 서버를 압수수색해 알게 됐다. 다음날인 6일 는 사설을 통해 ‘과연 지라시는 이 사회의 큰 문제’라는 취지의 주장을 내놨다. 관전자 입장에서는 와 정권의 갈등이 ‘적당히 정리되는 그림’으로 보였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는 이때 알아챘어야 했다. 의혹을 풍문으로 만들고 문제제기의 핵심을 ‘불순한 의도’로 만드는 게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에서도 드러났듯이) 우병우 수석과 박근혜 정권의 특기이자 특징이라는 것을.
반환점은 박근혜 대통령이 하나 마나 한 개각을 단행한 8월16일이었다. 우병우 수석을 경질하기에 적당한 타이밍이다. 그러나 모두가 바란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는 다시 반격을 준비했다. 바로 그날 저녁에 자객(?) MBC가 나타났다. 이석수 특별감찰관과 ‘특정 언론’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내통해 우병우 수석을 흔들고 있다는 취지의 리포트를 메인 뉴스에서 내보낸 것이다.
는 MBC에 이 SNS 내용이 흘러 들어간 게 불법사찰에 의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감찰 누설 의혹을 ‘국기문란’으로 규정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간 다소 소극적 태도를 취하던 다른 언론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범죄 동기(?)를 ‘야당에서 공천받기 위한 것’으로 규정하고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을 이 배후로 사실상 지목한 것이 대표적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충성심 없는 자는 떠나라 </font></font>이후 우병우 수석과 이석수 특별감찰관을 동시에 다루기로 한 검찰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는 더욱 격앙됐는데, 이는 검찰이 이석수 특별감찰관과 ‘특정 언론’ 소속 기자의 대화 내용을 찾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두 사람의 휴대전화를 모두 압수수색했기 때문이다. 검찰의 목표는 이석수 특별감찰관에 대한 수사만으로도 이룰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런 의 분노는 청와대의 호위무사를 자처한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의 활약으로 삽시간에 진화되고 말았다. 송희영 당시 주필이 대우조선해양 비리에 연루돼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의혹이 제기된 직후 청와대는 를 통해 직접 송희영 전 주필이 대우조선해양 사장 연임 로비에 개입했다는 폭로를 직접 감행했다. 송 전 주필은 결국 회사를 떠났고 는 분을 삼키며 반격의 기회를 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무협지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무협지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정치는 상이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이를 각자가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과정으로 시작해야지 서로 때리고 찌르는 게 전부가 돼선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태를 해결하는 모범답안은 잘못한 사람들 모두에게 잘못한 만큼의 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우병우 수석은 이미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공직을 맡기에 부적합하므로 직을 물러나 수사에 성실히 임해야 하고,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감찰 누설 의혹 역시 법리를 따져 위법일 경우 책임을 지게 해야 하며, 송희영 전 주필은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처벌을 받고 펜을 놓아야 한다. 권력이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어야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청와대가 그리는 그림은 이런 내용이 아니다. 어떤 잘못을 했든 박근혜 정권이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충성심 단 하나다. 충성심이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지켜줘야 하고 충성심 없는 사람은 제거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이 내세우는 ‘충성심’은 ‘사심이 없는’ ‘의리 있는’ 등의 수식어와 사실상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청와대에서 사심 없고 의리 있기로 최고로 평가받는 사람이 바로 우병우 수석이다.
예를 들어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정권과 상이한 정책 노선을 드러냈다가 한순간에 ‘배신의 정치’로 규정된 유승민 의원의 경우를 상기하자. 유승민 의원에 대한 정권의 합리적 태도는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문제 삼고 일종의 노선 투쟁을 하는 것일 테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선택한 것은 유승민 의원의 마음속에 어떤 다른 ‘의도’가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를 단지 활용하고 있으며, 여당 내 많은 정치인들 역시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고 규정하는 거였다. ‘배신의 정치’의 대구(對句)로서 ‘진실한 사람들’이 제시된 것은 이를 방증한다. 즉, ‘배신의 정치’는 진실하지 않은 사람들을 규정하고, 다시 말하자면 ‘의도가 불순한 사람들’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대통령의 정치 냉소주의 </font></font>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 인식이 장삼이사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거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인을 오직 냉소적 관점으로만 평가한다. 정치인이 제시하는 당위나 명분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며 그 배후에 사익의 추구가 있다고 보는 것은 정치적 냉소주의의 기본형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현안을 다루는 방식은 정치적 냉소주의의 도식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볼 때 의 주필이 우병우 수석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것은, 우병우 수석이 사실상 지휘하는 검찰 수사가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침해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동기가 어떻든 언론이 의혹을 제기한 이상 권력이 거기에 ‘정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상식적 판단은 처음부터 없다. 왜냐하면 냉소적 세계관에서 그런 식의 정무적 대응은 사익 추구라는 정치의 본래 속성을 용인하고 이에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해 사심 없는 통치를 해야 한다. 즉, 박근혜 대통령에게 정치란 진실한 사람들에게 불순한 사람들이 끝없이 도전하는 권력게임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패배해서는 안 되고, 어떤 상황에서든 이기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걸 두려워 말아야 한다.
와 박근혜 정권 간의 불화가 충격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도 이런 식의 냉소적 정치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냉소주의의 문법에선 권력이 의 어떤 흠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덮고 용인해주는 게 정상이다. 그들은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이런 냉소적 정치관은 상당 부분 현실로서 실현됐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와 박근혜 정권이 불화하게 된 근본 원인이 이런 인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어떤 관점에서든 와 박근혜 정권이 핵심 이익에서 판단을 달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다는 거다. 를 중심에 놓고 보자면 박근혜식 정치로는 보수세력이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일 테고, 정권을 기준으로 하자면 이제 와 잘 지내려 노력해봐야 별로 도움될 게 없다는 현실인식일 것이다. 그러니 는 들이받고 권력은 수사를 한다.
이제 궁금해지는 건 이후 상황이다. 1라운드는 청와대의 완승처럼 보인다. 편집인 겸 주필이 비리 의혹에 휘말려 회사를 떠났다는 건 언론사 입장에선 보통 일이 아니다. 이제 그 회사의 신문 보도를 누가 진실로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순전히 권력게임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전투에서 승리한 박근혜 정권이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보수세력의 대권 주자들은 전부 허약하기 짝이 없고, 그 상태를 청와대 스스로가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가 도와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친박·주류가 미는 대권 후보는 좀더 어려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정권 재창출 가능성은 점차 낮아진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서로 다른 정권 재창출의 길</font></font>설령 한국 특유의 정치환경 덕에 모든 어려움을 뚫고 보수세력의 정권 재창출이 현실화된다고 해도 로선 손해 볼 게 없다. 왜냐면 그렇게 재창출된 권력은 이미 지나간 권력보다는 살아 있는 손을 다시 잡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남은 시간은 1년 반 정도지만 는 아직도 십수 년은 더 싸울 수 있다. 이것이 오늘 같은 망신을 예감하면서도 가 청와대를 들이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한다. 1997년 대선에서 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밀고도 여태껏 보란 듯이 우뚝 서 있는 이 모습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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