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순씨’가 바쁘다. 원래 바빴지만, 요즘 부쩍 더 바빠졌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운동을 하던 시절부터 부지런하기로 유명했다. 2011년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뒤 지난 5년 동안도 바지런했다. 서울시의 모든 일을 꼼꼼하게 챙겼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바쁜 시간을 쪼개어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최근 바쁜 모습은 예전과 조금 달라 보인다.
8월8일, 박 시장은 마이크 앞에 섰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울시가 미취업 청년 3천 명에게 월 50만원을 지급하는 ‘청년수당’ 제도를 시행한 데 대해 보건복지부가 직권취소 명령을 내리자 직접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나섰다.
노동계부터 정치권까지 광폭 행보8월10일에는 ‘특별한 사람들’을 만났다. 오전에는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을 만났고, 오후에는 경기도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찾아갔다. 11일 서울시가 발표한 ‘노동혁신 종합대책’을 설명하고 ‘노동존중 서울시’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고 한다. 그날 저녁엔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과 여의도에서 식사했다. 고 김근태 전 의원을 따르는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 소속 설훈, 권미혁, 우원식, 인재근 의원 등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노동계부터 여의도 정가까지 두루 챙기고 있는 셈이다. 최근 국가정보원이 작성했다고 알려진 ‘박원순 제압 문건’이 다시 논란이 되자, 민평련은 8월6일 국회 차원의 청문회와 국정조사를 촉구하는 성명을 낸 바 있다. 당내에 특정한 계파나 지원군이 없는 박원순 서울시장으로서는 대선 후보로 나서려면 지지세력을 확보해야 한다. 박원순 시장과 민평련 소속 의원들 모두 “편안한 식사 자리”라면서 대선과 연결짓는 해석에 손사래를 쳤지만, 이날 식사 자리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이유다.
박 시장은 이어 12일 오후에는 더민주 광주 지역 정기 대의원대회 전야제로 열리는 정책 콘서트에 연사로 나섰다. ‘서울시장 박원순’을 넘어서는 광폭 행보다.
박원순 시장을 잘 아는 인사들 사이에서는 “박 시장이 대선에 출마할 마음을 굳혔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박 시장 본인이 공식적인 자리나 언론 인터뷰에서 하는 발언에서도 이런 속내가 묻어난다. 지난 5월 전남대 특강에서 “뒤로 숨지 않겠다. 역사의 부름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더 행동하겠다”고 말한 게 대표적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대선에 얼마큼 뜻을 두고 있는 걸까? 은 어느 때보다 분주한 여름을 보내고 있는 박원순 시장을 8월8일 오전 서울시청 시장 집무실에서 만나 속내를 물었다. 이날 오후 예정된 청년수당 관련 대통령 면담 요청 기자회견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한다고 들었다. 청와대가 대화를 받아들일 걸로 보는가. 대한민국 대통령과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시장이 왜 법정에 가서 다투나. 대화로 풀어야 한다. 원인이 어찌됐든, 누가 정당하든 간에 대통령과 서울시장이 싸우는 모습은 국민한테 볼썽사납게 비치지 않겠나. 그것도 청년 문제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인다는 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일 게다.책임 있는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대화를 제안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실 돈 50만원이 뭐 대단하겠나. 하지만 돈을 받은 청년들이 ‘국가가, 정부가 그래도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절망적 상황에 있는 내 손을 잡아주는구나’ 느끼고, 그런 사회적 연대감이 자존감을 회복하는, 용기를 얻는, 새로운 도전을 하는 힘이 될 수 있지 않겠나.
박원순이 아무리 미워도, 청년을 미워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여러 가지 잘못하는 게 눈에 보여도 서울시민을 위해 참아왔다. 정부가 발표한 용산공원 개발 계획도 그렇고. 중앙정부가 지금 제대로 하는 게 있나. 가까이서 보면 다 보인다. 그런데 (청년수당 직권취소 결정) 이건 정말 아니다.청년수당 문제 두고 중앙정부와 기싸움
서울시는 8월3일 청년수당 지원 대상자 3천 명을 선정해, 이들의 계좌에 지원금 50만원을 입금했다. 청년수당 신청자에게 청년수당이 필요한 이유와 활동 목표 등을 적은 신청서를 받은 뒤 소득, 취업 준비 기간, 부양가족 수 등을 따져 대상자를 선정한 결과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시행 전에 복지부와 협의·조정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복지부가 ‘부동의’했는데도 청년수당을 지급한 것은 사회보장기본법 위반이라며 직권취소 명령을 내렸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박근혜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걸고넘어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복지부가 ‘직권취소’라는 극단적 결정을 내린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서울시 쪽은 복지부와 청년수당을 시행하는 방향으로 협의를 마치고 장관 결재만 남은 상황이었는데 복지부가 갑자기 말을 뒤집었다고 주장한다. 청와대 지시가 아니었다면 이처럼 청년수당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할 리 없다는 게 서울시 쪽 해석이다.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와 복지부 간에 풀 수 있는 수준을 넘은 단계다. 오직 대통령과 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까닭이다.
더구나 대통령과의 면담 요청은 그 자체로 손해볼 게 없는 카드다. 박 시장이 대화로 문제를 풀려 한다는 인상을 주면서, 한편으론 주요 정책 현안에서 대통령과 맞짱 뜰 만큼 ‘거물’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다. 청와대는 단칼에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9일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들을 만나 “그 사안은 복지부와 서울시 간에 협의할 사안”이라고 밝혔다. 한마디로 대통령이 나설 사안이 아니라는 뜻이다.
박근혜 정부가 강하게 제동을 거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박원순’이기 때문인가. 박원순을 보지 말고 청년을 봐달라고 계속 얘기해왔다. 그 한마디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청년의 절망적 상황과 그 해결책을 고민하는 대신 박원순 서울시장이 청년 문제에 대해 뭔가 해결책을 제시하고, 청년의 지지를 받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다. 아니면 자기들이 하고 싶은 정책이었는데 선수를 뺏겨서 그러는 건가. 내가 더 궁금하다.청와대가 면담 요청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아 보이는데, 이후 계획은. 다각도로 ‘플랜B’를 준비 중이다. 우선 법적으로는 복지부의 직권취소를 취소해달라고 대법원에 가처분 소송을 낼 수 있다. 지방자치법상 8월18일까지 소송을 내면 된다. 9월 초 청년수당을 2차 지급하기 전에 가처분이 인용될 수 있도록 노력할 거다.지금 청년들은 부모 세대보다 더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최초의 세대다. 그래도 우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일자리도 없고 희망마저 가질 수 없는 시대다. 이런 불안한 시대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데, 도대체 정치권이 무엇을 하고 있나, 정치인이 자문해봐야 한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다가서서 위로도 하고 공감도 하고, 현장의 소리에 귀 기울여 해결책을 정책으로 만들어내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을 깡그리 무시하고, (박근혜 정부가) 독불장군처럼 나가는 정치 행태에 대해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청년의 절망은 회복되기 힘든 손해”
일본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은 토목사업에 엄청 투자하면서, 청년에 대한 투자를 안 했다. 그 결과 엄청난 국가 부채와 ‘잃어버린 20년’을 겪고 있다. 반면 독일이 지금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국가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청년 세대가 일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올해만 2조1천억원을 청년 일자리 예산으로 투입했지만, 청년실업률은 계속 높아만 간다. 책상머리에 앉아서만 정책을 짜기 때문이다. 늘 현장에 답이 있다. 서울시는 지난 2년간 청년들과 대화하고, 청년들의 의견을 담아서 지자체 최초로 청년정책종합계획을 내놨다. 청년수당은 그렇게 내놓은 20개 정책 중 하나다. 청년들과 대화 한번 안 해본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의 실험을 이렇게 짓밟아서야 되겠나. 서울시에 내려와서 청년들부터 한번 만나보라.
‘청년’은 선거 때마다 주목받는 의제다. 특히 ‘금수저·흙수저’ ‘헬조선’ 등 최근 이슈였던 담론들에 비춰볼 때, 다음 대통령선거에선 어느 때보다 청년들의 불평등, 일자리 등이 주요 쟁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을 주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노년층의 표심을 모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정치적 승부수로 청년수당이라는 ‘창’을 내민 이유도, 반대로 박근혜 정부가 박원순표 청년수당을 기를 쓰고 막으려 ‘방패’를 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원순 시장은 잠재적인 야권 대선 주자다. 하지만 아직은 ‘잠룡’에 불과하다. 8월 둘쨋주 ‘리얼미터’ 대선 주자 지지도 조사에서 박 시장은 반기문(23%), 문재인(19.8%), 안철수(8.6%), 김무성(5.9%)에 이은 5위(5.6%)를 기록했다.
박 시장은 지난해 6월 리얼미터 조사에선 여야 차기 대선 주자 중 1위(22.5%)를 기록한 바 있다. 당시는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두고 박 시장과 보건복지부가 정면충돌하던 때였다. 이슈를 몰고 다닐수록 지지율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최근 청년수당과 국정원 등에 대해 박원순 시장은 목소리를 키웠다. 2013년 가 국정원이 작성했다고 의심되는 ‘박원순 제압 문건’을 처음 보도했을 때만 해도, 서울시 안팎에선 서울시장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에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딴판이다. 박 시장이 페이스북 라이브방송으로 진행하는 ‘원순씨 X파일 시즌2’에 지난 8월4일 진선미 의원 등을 불러 아예 정면으로 국정원을 비판했다.
여기엔 박 시장을 보좌하는 주변 인물들이 달라진 영향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월 비서실장에 임명된 허영 더민주 강원·춘천지역위원장은 고 김근태 의원 보좌관, 2012년 안철수 후보 비서팀장을 지낸 정치인 출신이다. 다른 정무라인도 국회나 정치인 출신으로 모두 물갈이했다. 박 시장은 ‘국정원 제압 문건’ 대응과 관련해서도 야당의 역할을 강하게 주문했다.
다시 떠오른 ‘박원순 제압 문건’2013년 논란이 됐던 국정원 ‘박원순 제압 문건’이 다시 이슈가 됐는데.진실은 언젠가는 다 드러난다. 당시 국정원이 ‘우리가 작성한 문건이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검찰도 흐지부지 수사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국정원이 작성하지 않았으면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문건이더라. 이름, 부서 등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더구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핵심 측근이 “맞다”고 확인해줬다는 거 아닌가.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서울시청 앞에 와서 19번이나 데모했고,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어버이연합에 돈을 댔다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게 문건에 나온 그대로 되었다. 앞으로 더 많은 폭로가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검찰에서 제대로 수사만 하면 모든 걸 밝힐 수 있는데, 대한민국 최고 수사기관인 검찰이 국정원에 눌려 이거 하나 제대로 못 밝혀낸다는 게 안타깝다.
자신을 사찰한 국정원에 대한 분노로 정치에 뛰어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그는 “지금도 분노가 치밀어오른다”고 했다. 이번 분노는 그의 마음을 어디로 향하게 할까.
지난 5년간 서울시장으로서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하나씩만 꼽는다면. 잘한 일은 서울시정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점이다. 비상식적인 걸 상식화했다. 채무 7조8천억원을 감축하는 대신 복지 예산을 2배로 늘렸다. 잘못한 건 너무 많아서. (웃음) 여러 반성과 회의가 많은데, 구의역 사고를 보면서 ‘내 등잔 밑에 아직 충분히 챙기지 못한 게 많았구나’ 느꼈다. 서울시 산하기관이나 투자출연기관 개혁까지는 못했던 거다. ‘사람중심 도시’라는 것도 관철되지 않았구나 싶었다.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서 위험 업무 외주화를 금지하고, 정규직화한 비정규직 출신 노동자의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든지, 노동 혁신 정책들을 진행 중이다. 임기 하반기에는 경제적 불평등 시정, 경제민주화, 노동존중 도시 등의 키워드에 집중할 생각이다. 서울시장 이후 박원순이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지 상상해본다면. 나는 늘 내 직업이 소셜디자이너라고 말해왔다. 서울시장도 그 연속선에 있었고, 이후도 마찬가지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만들어가려 한다. 사회적기업가는 늘 도전과 변화, 우리 사회의 과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해 도전하는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 앞으로도 일거리가 많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하고 싶은 일이, 진짜, 여전히 많으니까. 임기 하반기 키워드는 ‘경제’ ‘노동’
인터뷰 중간중간 여러 차례 에둘러 대권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지만, 박원순 시장은 속 시원히 답하지 않았다. 서울시장 공식 임기는 아직 2년이 남아 있다. “기자들이 집요하게 대선 출마 의사를 물어보는데 요리조리 잘 피해간다”고 눙쳤더니 뜻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나도 그런 평이 나올지 모르겠어요. 기름이라고. 하하.” 유력 대선 주자로 언급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별명은 ‘기름 뱀장어’다. “벌써부터 견제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모든 걸 그렇게 몰아가진 말”란다. 여하튼 ‘박원순’과 ‘대선’이 지금 누구 머릿속에서든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인 것만은 분명했다.
박원순 시장은 8월 중순 지리산 인근으로 짧은 여름휴가를 떠난다. 그는 평소 “산은 생각을 정리하기 좋은 곳”이라고 말해왔다. 2011년 여름, 그는 백두대간 500km를 종주하고 내려와 서울시장 출마 결심을 밝혔다. 5년 만에 그는 다시 무슨 생각을 정리하러 산에 가는 걸까. 대선 출마 결심이냐고 묻자 “산까지 올라갈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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