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권이 한 개인의 돌출 범행(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을 ‘북한을 배후로 둔 종북 세력의 테러’라고 규정하더니, ‘테러방지법 조속 통과’를 주장하며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이병석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테러방지법’은 국가정보원장 아래에 테러통합대응센터를 두고, 테러 의심자에 대한 정보 수집과 조사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김기종 사건’이 엉뚱하게 국정원의 권한을 강화하는 기회로 활용되고 있다.
마침 지난 2월27일 신임 국정원장으로 지명된 이병호 후보자는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공개적으로 밝혀온 인사다. 그는 국가안보 위협에 대한 국정원의 대응력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테러방지법과 휴대전화 감청까지 허용하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묶어 ‘패키지 통과’에 힘을 쏟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지난해 11월 에 기고한 글에서 “국정원의 정상적 업무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통신비밀보호법, 테러방지법, 사이버테러방지법이 (국회에서) 자동 폐기를 거듭하고 있다. 휴대전화 감청을 못하는 정보기관은 대한민국 국정원이 유일하다. 국정원의 손발이 묶여 있는 형국이다”라고 썼다. 그는 다른 언론 기고문에선 국정원의 기능을 위축시키는 것은 “자해 행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정원의 비대화와 정보 수집을 빌미로 한 민간인 사찰과 인권침해를 걱정하는 여론의 흐름과는 다른 인식이다. 이 후보자에겐 ‘김기종 사건’을 테러라고 부르며 국정원의 숙원 과제(테러방지법·통신비밀보호법) 해결을 밀어붙이는 여당의 움직임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병호의 국정원’이 어떻게 될지를 전망하려면 이 후보자의 이력과 인식을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940년생인 그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원로다. 국정원장 청문회(3월16일)를 준비하던 신경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어떤 사람인지 오리무중”이라고 표현했다. 정치인도 아니고, 공직을 떠난 지 15년이나 된 인물이다. 새정치연합의 다른 의원실의 관계자도 “현역 공직자라면 매년 재산이 신고돼 재산 변동 추이나 업무추진비 내역 등을 검증할 텐데 그럴 수도 없는 옛날 분이다. 자식들의 재산 공개도 거부해 증여세 탈루 등을 살펴볼 수도 없다”고 말했다.
교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사 19기로 들어간 그는 ‘박정희의 중앙정보부’를 거쳐 ‘전두환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정보 전문가로 성장했다. 군 인사카드에 영어와 독일어의 통·번역이 가능하다고 적을 만큼 외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소령이던 1970년부터 중앙정보부에 영어 교관으로 파견됐다. 10년간 파견근무를 하다 1980년 중령으로 제대해 중앙정보부에서 이름을 바꾼 안기부에서 근무를 이어갔다. 이후 국제국장, 2차장(해외 담당·1993~96년)을 거쳐 1996년 12월 안기부를 떠났다. 국제 감각을 인정받아 말레이시아 대사(1997~2000년)를 지낸 뒤 2000년 외교부 본부대사를 끝으로 공직을 마무리했다.
청와대는 공직을 떠난 지 오래된 그를 국정원장으로 부른 이유에 대해 “중앙정보부에 임용된 이후 해외·북한 분야 요직을 두루 거쳤고, 국가안보 분야의 경험과 전문성이 풍부하고 국제관계에도 정통한 최고의 정보 전문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보기관의 특성상 그가 안기부에서 어떤 공과를 남겼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와 안기부 시절에 함께 근무한 후배는 “이 후보자가 영어를 잘해 해외 파트를 계속 담당했다. 특별한 문제 없이 무난하게 일한 분”이라고 평했다. 박지원 새정치연합 의원은 1990년대 말, 김대중 대통령과 말레이시아를 방문했을 때 대사였던 이 후보자를 기억했다. 박 의원은 “당시 이병호 대사가 호텔에서 국제 흐름, 대북 문제와 관련해 보고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놀랄 정도로 잘했던 기억이 있다”고 떠올렸다.
공직을 떠난 뒤론 2003년부터 지금까지 월 250만원씩 받으며 울산대 국제학부 초빙교수로서 강의를 해왔다. 신연재 울산대 국제학부 교수는 “(이 후보자가) 국제관계와 북한 정치에 대해 강의했다”고 밝혔다. 201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비밀활동을 다룬 책 를 공동 번역하기도 했다. 언론 기고 활동은 등 보수 성향 매체에 집중됐다.
이병기 신임 비서실장과 각별한 인연인사청문 요청안을 보면, 이 후보자는 서울 송파구 가락동 아파트(4억7700만원), 2007년식 SM7 자동차(837만원), 예금(1억3297만원), 아내 이름의 예금(1664만원)과 골프회원권(3150만원) 등 6억6649만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3명의 아들 중 큰아들(1968년생)은 신장 질환인 ‘만성사구체신염’으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 1억~3억원대 연봉을 받는 세 아들 모두 재산 공개를 거부했다.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김광진 새정치연합 의원은 “제출 자료만 보면 도덕성, 재산에서 별문제가 드러나진 않는다. 청와대가 청문회에서 (크게) 걸릴 게 없을 것이란 정무적 판단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공직을 그만두고 15년간 묻혀 있던 그는 어떻게 ‘76살 국정원장’으로 발탁됐을까? 정치권에선 대북강경론자·친미론자인 이 후보자의 보수적 인식과 박근혜 대통령, 이병기 전임 국정원장과의 인연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후보자는 2007년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든 박근혜 후보자를 위한 외교·안보정책자문단 ‘신외교안보포럼’의 일원으로 결합했다. 자문단은 2007년 1월 박근혜 후보자와의 첫 모임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친북 좌파 세력의 원칙 없는 대북 정책으로 외교·안보 정책이 총체적 부실을 드러냈다”는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자문단엔 이후 국가보훈처장이 돼 2012년 대선 과정에서 극보수 편향의 안보교육을 진행해 논란을 일으킨 박승춘씨도 포함돼 있었다.
박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국정원장으로 이병호 후보자를 추천했었다는 이철우 새누리당 의원은 “이 후보자가 해외 정보가 밝고 미국 정보기관 CIA 인사들과도 친분이 많아 미국도 잘 안다. 정보 전문가 집단에서 이 후보자가 적임자라며 나에게 권유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아마 박 대통령의 수첩에도 (이 후보자의) 이름이 계속 남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병호 후보자와 이병기 실장은 비슷한 이름처럼 인연이 각별하다. 이 후보자가 안기부 2차장을 그만둘 때 후임이 이 실장이었다. 이 실장이 지난해 7월 국정원장이 된 뒤 이병호 후보자가 국정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문희상 새정치연합 의원은 “이병기 국정원장을 비서실장으로 부르면서 ‘국정원장 후임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것이고, 그때 이병호 후보자를 추천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청와대와 국정원의 관계가 더 밀착됐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박지원 의원은 “권력 입장에선 이병기(청와대)-이병호(국정원)가 잘 짜인 구도다. 둘 다 고수여서 소통이 잘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야권에선 해외 정보 분야에서만 근무해온 이 후보자가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을 막는 데 노력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국정원의 대북강경책과 대공·공안 수사가 더 강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2013년 2월 기고문에서 “국정원 업무의 초점은 국가안보 사안에 맞춰지고, 이를 파고드는 업무 집중화가 이뤄져야 한다. 대통령을 돕는 일반 정책 분야의 일을 국가정보기관이 담당할 여유가 없다”고 적었다. 해외·대북 정보 수집에 국정원의 역량을 모아야 한다는 얘기다. 2013년 기고에선 “국정원의 정치 개입 의혹이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면서 “국정원의 자정 능력을 내부에서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외부 감시·견제 장치 설치도 주장했다. 정권 교체기마다 정보 전문성이 없는 인사들을 국정원에 배치하고 정보기관을 오용한 것이 국정원의 위기를 불렀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대선 개입 문제에 대한 인식이 안이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는 2013년 기고에서 “국정원의 정치 개입은 엄밀히 말하면 국정원장 개인의 정치 개입”이라고 사건을 축소하면서 야당의 국정원 개혁안을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공안 수사 강화도 강조했다. 2012년 기고에서 “국가정보 요원과 대공 수사관들은 냉전의 전사”라며 “강력한 공안 기능이 올바른 대북정책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009년 언론 기고문에서 ‘용산 참사’를 “폭동”이라고 표현한 뒤 당시 철거민의 죽음이 “과잉 진압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보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포용 정책인 ‘햇볕정책’에 대한 거부감도 심하다. 2013년 2월 기고문에서 “햇볕정책이 국정원의 정체성에 치명타를 가했다”고 지적했다. 2011년 기고문에선 “남북대화가 반드시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는 비법은 아니다. 남북대화를 고집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할 수 있다. 햇볕정책이 준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한반도의 공산화가 목표인 북한에 대해선 포용과 관용의 빗장을 열어줘선 안 된다는 논리였다.
국정원 고위직 출신 인사는 “햇볕정책이 국정원의 기능을 위축시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 근거를 구체적으로 열거해보라”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이 인사는 “(이 후보자의 생각은) 남북 화해 협력보다 북한 붕괴를 통한 흡수통일을 원하는 보수 인사들과 비슷한 인식이다. 이 후보자가 북한과 관련한 수많은 정보에서 자신의 시각에 맞는 정보를 취사선택해 대통령께 보고할 것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IS와 같은 테러 세력 방지 법안이라더니이 후보자가 필요하다고 밝힌 테러방지법의 통과를 위해 여권이 발을 맞춰 속도전을 펴는 데 대한 우려도 나온다. 테러방지법에 서명한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대표 발의한 이병석 의원이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IS와 같은 테러 세력 방지 법안이라고 해서 사인했는데, 우리 쪽에서 이 법안을 지금 이 국면(김기종 사건)에 들고나와 깜짝 놀랐다”고 했다.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의 한 의원도 “테러방지법은 발의된 법안대로 통과될 수도 없다. 지금처럼 서두를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자신들이 봐도 ‘김기종 사건’과 국정원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시도 사이의 연계성이 약하다는 얘기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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