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심리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점이 있다. 김기종씨가 사회에서 ‘고립’되어, 소외감과 좌절감이 깊었다는 것이다.
좌절범죄심리 전문가들은 김씨의 내면에서 오랜 시간 누적된 좌절에 주목했다. 김씨가 2007년 분신 당시 쓴 ‘김기종의 마지막 남기는 글’의 첫머리를 읽어보자. “광주에서 성장하면서 부모님 바람처럼 사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고자 목표했던 서울대 법대, 그러나 입시 실패로 시작된 서울 생활에서 접하는 숱한 사회 모순들은….” 조은경 교수는 이 문장에 주목했다. “사회문제의 중요성을 깨달아 사회운동에 나선 것이 아니라, 입시 실패라는 개인적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운동에 나선 것”이라고 진단했다.
[%%IMAGE1%%]김씨는 1980년 성균관대 법학과에 입학한다. 서울대 입시에서 잇따라 낙방한 뒤였다. 1990년대 초 김씨와 연을 맺은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은 “기종 형은 (대학 입시로) 자존심이 상해, (사회적으로) 의미 있다고 여긴 길을 선택했다”고 회상했다.
그의 좌절은 사회운동을 시작한 뒤에도 재현됐다. 1988년 8월17일 새벽 괴한 4명이 우리마당 사무실로 침입한다. 이들은 못이 박힌 각목으로 잠자고 있던 간부를 집단 구타했고, 여성 회원을 성폭행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우리마당 사건’이다. 야권은 그해 8월6일 발생한 오홍근 사회부장 테러 사건처럼 육군 정보사령부(정보사)의 소행으로 의심했다. 북파공작원(HID) 출신 이종일은 2004년 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마당 사건도 정보사가 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문재훈 소장은 “그 사건 이후 형은 계속 고문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피습 이후 우리마당은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단체를 구성하던 6개 소모임이 흩어졌다. 1990년대 들어 민족문화 열풍이 사그라졌다. 대학가 문화도 급변했다. 자연스레 우리마당에 드나드는 사람도 줄었다. 1992년 지면에는 우리마당의 폐쇄 위기를 안타까워하는 독자 투고글이 실렸다. 1996년엔 강습 공간이 없어진다. 그는 외롭고 궁핍해졌다. 지인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사는 그를 걱정했다. 우리마당을 그만 접으라든가, 다른 일을 모색해보라든가 하는 조언도 있었다. 그러나 김씨는 이러한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역정’을 냈다고 지인들은 증언했다.
순수아이러니하게도 범죄심리 전문가들은 김씨의 글에 내장된 순수의 과거를 발견했다. 1984년 김씨는 영화·국악·민요·사진 등 6개 대학생 소모임 집합체이자 민족문화 강습 공간인 ‘우리마당’ 설립을 이끌었다. 서울 신촌역 앞에 들어선 일종의 문화공간으로 당시만 해도 그런 곳이 드물었다. 재야에서 활동하던 웬만한 예술가들은 이곳에서 대중을 만났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미술사학)도 1985년 우리마당에서 ‘젊은이를 위한 한국 미술사’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김씨는 운동권 계파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우리마당에도 소속 조직과 관계없이 다양한 젊은이가 드나들었다. 우리마당은 김씨에게 남다른 의미였다. 사비를 털어 임대료를 낼 만큼 헌신적이었다.
“너무 순수한 사람들, 타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사회 현실과의 부적응이 김씨에게 엿보인다”고 배상훈 교수는 진단했다. 그러나 순수성은 배척과 고립으로 이어졌다. “너는 왜 타협하느냐”며 자신의 순수성만 고집하면 다른 사람은 모두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김씨 입장에선 함께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 대부분을 변절자 또는 오염된 사람들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이러한 심리가 누적되면 폭력마저도 스스로 정당화한다. 내가 옳으니까, 내가 사용하는 폭력적 수단도 용납된다고 믿는다”고 배 교수는 말했다.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순수한’ 자신의 뜻을 외부로 표출하려는 강박이 그를 폭력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최근 10여 년간 김씨를 지켜본 사람들은 대개 ‘정신질환’을 의심했다. 하지만 배 교수는 정신병이 아닌 ‘사회병’이라고 진단했다.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상생활엔 별문제가 없다. 다만 자신의 신념을 건드릴 때 감정적으로 급변한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가까이하기엔 꺼려지는 경우다. “이러한 사람들은 약을 먹는다고 치유되지 않는다. 관계 형성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배 교수의 설명이다.
원망김씨의 글 곳곳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드러난다. 유서를 분석한 조은경 교수는 “처음에는 자신을 탄압한 세력을 원망했지만, 나중에는 과거 자신과 손을 잡았다 배신한 옛 동지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자신의 활동에 등을 돌렸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피해의식을 가졌다. 김씨는 타인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게 된다.
이는 다시 폭력성과 연결된다. 이기수 연구관은 “범죄 프로파일링 사례를 보면, 오랜 좌절과 분노는 종종 폭력적 범죄와 연결된다”고 설명했다. 2007년 김씨는 ‘우리마당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 끝에 분신을 시도했다. 전신 39%에 2~3도 화상을 입고 사경을 헤맸다. 익명을 요청한 범죄학 연구자는 “분신이라는 죽음의 방식은 자신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고 싶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스스로도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단절됐음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살 시도는 극단적인 선택이지만, 누군가에겐 거듭된 좌절을 보상받기 위한 논리적인 선택이기도 하다”고 범죄학 연구자는 분석했다.
김씨는 소통에도 서툴렀다. 거칠고 일방적이었다. 2007년에 쓴 유서의 마지막 부분이 대표적이다. “우리마당 운동의 제2대 마당지기로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 두 분에게 모든 권한과 의무를 맡김을 선포합니다.” 조 교수는 소통에 심각한 장애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우리마당 회원들끼리 합의가 필요한 결정을 일방적으로 ‘선포’해버렸다. 당사자에게 동의를 얻었는지도 알 수 없다.”
자기우상화좌절을 보상받으려는 노력이 극단화되는 과정에는 자신에 대한 망상도 포함돼 있다. 배 교수는 김씨가 쓴 글의 대표적 특징으로 “자신의 활동을 제3자 입장에서 서술하면서 우상화하는 어법을 쓰는 점”이라고 진단한다. 객관적으로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훌륭하다고 거듭 주장한다는 것이다.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조 교수는 “김씨는 자신이 해온 일을 확대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이 현장에 있기만 해도 어떤 사업에 큰 일조를 했다고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김씨는 부산국제영화제도 우리마당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고교 4년 후배인 정아무개(51)씨는 오랜 시간 동안 그가 끊임없이 ‘나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걸 들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등 유명 인사와의 친분도 과시했다. 우리마당이 1980년대 문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것은 결국 ‘내가 너무 작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표지라고 배 교수는 말했다. 조 교수도 이에 동의했다. “그동안 해온 일의 보람과 성과를 강조하지만 유서 곳곳엔 무력감이 스며들어 있다.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큰소리로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은 집착으로 이어진다. 조 교수는 그가 평소 ‘스토커’와 비슷한 행태를 보였을 것이라고 했다. “명함을 내밀 때 상대방이 관심을 표현하지 않으면, 대개 관계 맺기를 포기한다. 그러나 김씨 같은 사람은 자기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단념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일부러 피했다는 지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김씨는 연락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번 피습 사건 이전에도 학연·지연으로 얽힌 지인들조차 그와 만나길 꺼렸다. 부모가 생존해 있지만 가족과의 왕래는 끊겼다. 사회운동을 했으나 시민과는 유리됐다. 단체 활동도 10여 년간 홀로 해왔다.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궁핍했다. 1980년대 김씨를 처음 만났던 사람들은 “사람 좋고 친화적이던 형이 변했다”고 했다. 1980~90년대 초반 그의 관심사는 전통문화였다. 시위 과정에서의 폭력 사용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던 그가 폭력을 휘두르는 범죄자가 됐다.
경찰, 국가보안법 위반 계속 수사
3월13일 김씨는 살인미수와 외국 사절 폭행, 업무방해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경찰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범 및 배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계속 수사하겠다고 했다. 앞서 종합편성채널 등에선 김씨와 잦은 통화를 한 인사들의 이름이 실명으로 거론됐다. 취재에 응해준 한 대학 동문은 사건 이후 자신의 책장을 들여다보았다. 혹시나 ‘문제’가 될 만한 책은 없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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