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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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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잎 다시 살아나

실패로 결론난 1단계 진보정당 실험,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과거 운동권적 습성을 버려라” “‘소수정당’ 지위 버리고 ‘수권정당’ 기반 다져라”
“경제성장이나 외교·안보 분야에도 관심을 가져라”
등록 2015-01-10 14:13 수정 2020-05-03 04:27

“1987년 민주화 이후 1단계 진보정당의 실험은 실패했다.”
2015년 1월 현재 미미한 흔적만이 남아 있는 대한민국 진보정당에 내린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여기서 진보정당이라 함은 지금은 해산되고 없어진 통합진보당과 애초 그들과 한 뿌리에서 나온 정의당·노동당, 녹색당 등을 일컫는다.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여기서 제외된다. ‘범진보’라 불리기도 하는 새정치연합은 엄밀히 말하자면 진보라기보다는 중도보수에 가깝기 때문이다. 기나긴 독재체제를 유지한 우리나라 특유의 정치·역사적 상황 속에서 새정치연합의 뿌리가 ‘반독재 세력’이라는 점 때문에 그동안 편의상 이들을 ‘범진보’라 불러왔을 뿐이다. 새정치연합은 아직까지도 명확한 노선을 정하지 못한 채 진보와 중도 노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침몰 자초한 사정 가려지지 않아

2014년 12월19일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한 직후, 이정희 전 진보당 대표와 소속 의원들이 서울 종로구 재동 헌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류우종 기자

2014년 12월19일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한 직후, 이정희 전 진보당 대표와 소속 의원들이 서울 종로구 재동 헌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류우종 기자

이들을 제외한 ‘진짜’ 진보정당들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그들은 스스로 무너졌다. 물론 정권의 탄압도 있었다. 구멍 뚫린 배를 제대로 고치지 못한 채 가라앉고 있던 이들에게 다가가 배를 직접 부수고 강제로 침몰시킨 것이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결정’이었다. 자연스럽게 침몰하거나 혹은 스스로 구멍을 메우고 다시 항해할 기회를 박탈했다는 점에서 헌재는 비판받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통합진보당이 자신들의 배에 구멍을 뚫고 침몰을 자초한 잘못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2012년 통합진보당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지 못하고 뛰쳐나온 정의당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정의당은 통합진보당을 나온 뒤에도 소수의 ‘스타 정치인’ 인지도에만 기댄 채 허약한 당 조직과 낮은 지지율 등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민주노동당에서 분파된 노동당도 현재까지 대중정당으로서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문제는 뭘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했을 때만 해도 이들은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2002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권영길 민노당 후보가 했던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발언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2004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키는 쾌거를 이뤘다. 아마도 그때가 진보정당이 가장 빛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2006년 일심회 사건(민노당 일부 인사가 간첩 행위를 한 사건)을 계기로 2008년 1차 분당이 이뤄졌다. 2011년 말 총선을 앞두고 다시 합쳐졌지만 총선 직후 비례대표 경선 부정 사태로 2차 분당이 이뤄졌다. 2012년 총선에서 야권 연대를 통해 사상 최대인 13석의 의석을 차지한 것은 ‘선거용 야합’이라는 여권의 공격과 경선 부정 사태로 빛이 바랬다. 이후 2013년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 의혹이 불거졌고 결국 지난해 12월 당이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여러 번의 분당 사태를 거치면서 진보 진영은 내부의 심각한 문제를 밖으로 노출시켰다. 자주파(NL)와 평등파(PD)라는 민주화 이전의 고리타분한 운동 노선 간의 갈등을 반복했을 뿐 아니라, 일부 정파의 ‘북한 무비판주의’를 당내에서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이것은 결국 일심회 사건, 이석기 사태 등으로 터져나오며 진보 진영 전체에 ‘종북 딱지’를 붙이는 치명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이 과정에서 진보정당이 초기부터 내걸었던 무상교육·무상의료 등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였던 ‘복지국가’ 이슈는 새누리당에 빼앗겨버렸다.

‘정치를 한다’가 출세주의가 되는 운동권

특히 전문가들이 진보정당 실패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꼽은 것은 이들이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운동권적 습성을 버리지 못한 채 ‘정치’가 아닌 ‘운동’을 이어갔다는 점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민주주의는 (1987년) 민주화 이전과 민주화 이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이전 단계의 진보는 대개 운동의 형태로 체제와 맞서게 되는데, 민주화가 된 다음에는 본인들도 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때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방법은 민주화 이전에 운동으로 했던 방법과는 달라야 한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에도 과거 민주화 전 운동론의 연장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방식이 여전히 진보 안에서 지배적이었다. 그게 성과를 못 내게 만든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진보정당의 운동권적 습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는 최근 출간한 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운동권 진보는 존재하는 방식과 행동하는 양식이 있는데, 존재하는 방식은 NL과 PD라는 정파이고, 행동하는 양식은 머리띠를 매고 집회에 나가는 식이다. 이제는 추구하는 가치, 존재하는 방식, 행동하는 양식까지 운동권 진보와 달라져야 한다.” 진보의 탈운동권이 지금껏 이뤄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운동권의 문화와 정서와 관행 속에서 ‘정치를 한다’고 하면 그것을 출세주의로 봤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나의 과업으로 보지 못한 것이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은) 아직도 그 아련한 추억에 매달려 낡은 훈장인 양 연연해하며 자기들이 희생하고 운동할 때 운동하지 않은 다수에게 우월의식이나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책에서는 진보정당의 운동권적 습성을 “정파 패권주의, 이상과 현실의 분절, 운동과 정치의 혼재, 폐쇄적인 조직문화와 대중 검증 회피, 북한 무비판주의, 최대강령주의, 이념 지향주의, 도덕적 우월의식과 선민의식”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진보정당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가장 시급한 것은 과거 운동권적 습성을 버리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대중과의 괴리를 극복하고 본격적인 ‘대중정치’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는 “(민주화 이전의) 운동에서는 ‘노선’이 상당히 중요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정당으로 변했을 때는 노선도 중요하지만 일단 정당은 ‘지지’가 굉장히 중요하다. 운동으로서의 정당에서 빨리 벗어나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정당은 원래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만든 것 아니냐”고 말했다.

최소한 10년 이상 기초 닦아야

진보정당이 대중정당으로 나아가려면 기존에 유지해온 ‘소수정당’의 지위를 버리고 ‘수권정당’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노동당·정의당·녹색당 등이 각자 노동이나 복지, 환경 등에 초점을 둔 하나의 이슈 정당으로 존재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의원내각제(다당제) 아래에서다. 그러나 (양당체제가 공고한) 한국에서는 진보정당이 제1야당을 압박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기 입지를 확보했을 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위해 진보정당이 노동·분배 등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뿐 아니라 경제성장이나 외교·안보 분야에도 관심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신 교수는 “노동·분배, 경제, 외교·안보는 정치에서 중요한 3대 축인데 한국의 진보정당은 세 개의 기둥 중에서 노동·복지 등 사회·경제적 부분만 만지고 있는 측면이 있다. 경제와 외교·안보 분야에서 불완전성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만 노동과 분배 측면에서도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진보정당이 제대로 일어서는 일이 하루아침에 벌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당장 새로운 당을 만들어내거나 흩어져 있던 진보정당을 통합하는 등의 방식으로 진보정당의 재편을 서두른다고 해서 진보정당이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국민모임’이나 ‘사회민주주의포럼’ 등 새로운 진보정당 창당을 염두에 둔 여러 진보적 모임들에 대해 전문가들이 섣불리 긍정적 의견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다양한 진보세력이 나오고 있는데 아직 방향들이 명확하지 않다. 이들과 기존 진보정당과의 관계도 아직 정리돼 있지 않다. 이렇게 여러 세력으로는 쉽지 않으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진보정당이 민주화 이후 1단계의 실패를 극복하고 2단계의 성공으로 나아가려면 최소한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민주주의 정치의 기초를 닦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신진욱 교수는 “선거에서 이기면 집권 조건에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발상 때문에 선거에서 계속 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늘 하루살이 곤충처럼 내년의 선거, 후년의 선거를 내다보는 그런 사고의 한계 때문에 지난 10여 년 동안 계속해서 진보의 위기가 깊어져왔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진보정당의 존재 의미는 제1야당을 압박하고 경쟁적인 상대로 부상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 역량을 기르는 것에 있다. 소수 정당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처럼 보이는 진보정당이라면 선거 때 제1야당이 필요로 하는 (선거 연대의) 도구적 파트너 이상의 힘을 갖기 힘들다. 그 허들을 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는 “1987년 시스템이 1단계 정리된 시점에서 진보정당뿐 아니라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을 포함한 2단계의 정치 시스템이 새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본다. 이 과정에서 상당 기간 각자도생의 과정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지루하고 갑갑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단계는 실패하기 마련, 승패는 그 이후

진보정당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진보에 대한 국민의 갈증은 여전하다는 점이다. 박상훈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진보정당의 1단계 실험은 일단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무너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 민주주의에서 진보정당이 어떤 역할을 하기 바라는 유권자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1단계 실험에서 유권자의 냉정한 평가가 있었던 것뿐이다. 이들은 앞으로도 기존 양대 독과점 정당들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유지할 것이고, 진보정당이 제 역할을 하게 된다면 여전히 다시 지지할 준비가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1단계는 진보정당 스스로의 실패였지만, 그 실패는 한국 진보정치의 미래까지 봉쇄된 실패는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진보정치의 1단계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서구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초기 진보정당의 실험이 실패했다. 중요한 것은 실패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다. 승부는 그때에야 가려지게 될 것이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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