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좀처럼 속 시원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중국 방문의 의미와 성과 등 의례적인 이야기만 길게 늘어놨다. 공무원연금 개편, 세월호 후속 조처 등 정치 현안에 대한 답도 원론적 수준에 그쳤다. 현장 기자들 사이에선 “기삿거리가 없다”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권력구조 개편의 구체적인 방향까지지난 10월16일 아침 7시30분(한국시각 아침 8시30분)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훙차오 호텔 영빈관에서 동행 취재 기자들 40여 명과 조찬 간담회를 가진 김무성 대표는 핵심 현안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닫았다. 이 자리는 10월13일부터 나흘간의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한 김 대표가 귀국을 앞둔 마지막 날에 기자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며 중국 출장을 정리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특별한 메시지가 없던 탓에 기자들이 끈질기게 질문을 이어가자, 김 대표가 서둘러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만(그만)하고, 밥이나 묵자(먹자).”
그러나 마이크가 꺼지고 식사가 시작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김 대표는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개헌론’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정기국회가 끝나면 개헌 논의가 봇물 터질 것이다. 그러면 막을 길이 없다. 개헌론이 시작되면 경제 활성화에 방해가 된다는 (대통령의) 지적은 맞는 부분이 있지만, 다음 대선 가까이 가면 (개헌은) 절대 못한다.” 이른바 중국발 ‘개헌 봇물’ 발언의 시작이었다.
그는 이날 작심한 듯 보였다. 개헌의 핵심이 될 권력구조 개편의 구체적인 방향까지 제시했다.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와 ‘연정’이 그것이다. 이원집정부제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은 외교와 국방 등 ‘외치’를 담당하고, 국회의원들이 선출한 총리가 행정수반으로 ‘내치’를 맡는 제도다.
“(예전에는) 내각제보다는 정·부통령제를 선호했지만 (이제는) 이원집정부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철저한 진영논리에 빠져 아무것도 되는 게 없다. 권력을 분점하고 중립지대를 허용해서 (여야가) 연정을 하는 것이 사회 안정으로 갈 수 있다.” 대통령에 대한 권력 집중과 여야의 극한 대립을 완화할 방법을 오랜 시간 고민해왔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특히 개헌에 대한 세밀한 이야기를 ‘봇물’처럼 쏟아냈고, 그의 발언을 기자들이 노트북 등으로 기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김 대표의 이날 발언은 어느 정도 준비된 것이었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자리 비운 사이 대통령 등에 칼을?”파장은 컸다. 청와대는 ‘부적절하다’며 즉각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0월6일 ‘경제 블랙홀이 될 것’이라며 개헌론에 반대 의사를 밝힌 지 열흘 만에 차기 여권 대선주자 1순위로 손꼽히는 집권 여당 대표가 권력구조 개편을 핵심으로 한 개헌에 찬성하며 현직 대통령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시 박 대통령은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 순방길에 올라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친박’(친박근혜)계 사이에서는 ‘대통령이 자리를 비운 사이 당대표가 대통령 등에 칼을 꽂나’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사태가 커지자, 김무성 대표는 다음날인 10월17일 ‘불찰’이라며 납작 엎드렸다. 개헌 논의에 불을 지핀 지 하루 만이다. 그는 “대통령께서 ASEM 외교를 하고 계시는데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박 대통령에게 공개사과까지 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개헌론을 쏟아낼 때의 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대통령의 힘을 빼자’는 ‘미래권력’의 ‘도발’에 대한 현재권력의 반격은 교묘하고 집요했다. 청와대는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있는 공무원연금 개혁 화두를 꺼내들었다. 이는 집권 3년차를 앞두고 공무원연금 개편을 박근혜 정부의 치적으로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인데다, 사회적 논란이 큰 의제를 던져 김 대표의 개헌론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동시에 포함된 포석이라는 게 정치권 안팎의 시각이다.
김 대표의 행보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는 김 대표 취임 100일째인 10월21일에 맞춰 “당대표의 개헌 발언은 실수가 아닐 것”이라는 말로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집권 여당 대표에게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지난 10월23일 최고위원직을 던지면서 김무성 체제에 균열을 낸 김태호 의원의 사퇴 배경에 대해서도 일각에서는 ‘친박’과의 교감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온다.
물론 김 대표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공무원연금 개편안과 관련해 “처리 시기가 중요하냐”며 ‘연내 처리’를 다그치는 청와대에 어깃장을 놓았고, 불쾌감을 표명한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말을 전한 기자들에게 “(발언한 사람이) 청와대 누군데?”라고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며 청와대와 거듭 각을 세웠다.
그러나 오래 버티진 못했다. 김 대표는 상하이 ‘개헌 봇물’ 발언을 한 지 7일 만인 10월23일, ‘백기투항’했다. 그는 이날 꾸준히 제기돼온 당·청 갈등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며 잔뜩 몸을 낮췄다. 오히려 “(문재인·박지원 의원 등) 야권 주요 인사들이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갈등을 부추긴다”고 야당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박 대통령이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공무원연금 개편 입법안을 대표발의하기로 하고, 공기업 개혁에 대해서도 공무원연금과 함께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우며 꼬리를 내렸다. 여권 내 차기 대선주자 1위로 손꼽히는 후보로서 개헌에 이어 공무원연금 문제를 두고 잇따라 대통령과 충돌하는 모습으로 비치는 것이 결코 유리할 게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상처 입었지만 존재감 ‘반짝’미래권력의 도발이 일주일 만에 힘없이 진압되면서 김무성 대표는 정치적 타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정치학)의 말이다. “개헌의 내용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집권 여당 대표로서 개헌은 충분히 의제로 삼을 수 있는 주제인데, 김 대표는 이를 꺼내든 지 하루 만에 철회하면서 정치인으로서 믿음을 주는 데 실패했다. 또 대표 취임 때 ‘청와대에 할 말은 하겠다’고 한 다짐과 달리 공무원연금 등 청와대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수직적 당·청 관계의 모습을 보이면서, 당당함을 기대한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득보다 실이 크다.”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도 “이번 일을 계기로 힘을 얻은 당내 친박계가 김 대표를 더욱 흔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여권 1인자의 갈등은 흔한 일이다. 미래권력과 현재권력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도 과거 의원 시절, 세종시 등의 문제를 두고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수시로 부딪쳤다. 중요한 건, ‘시간은 언제나 미래 편’이라는 점이다. 무소불위의 현재권력도 시간을 잡아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번 소동을 통해 비록 상처는 입었지만, 존재감을 ‘반짝’ 드러낸 김 대표가 서서히 자기 색깔을 드러내며 현재권력을 위협할 거란 전망이 나온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현재로선 힘이 약한 김무성 대표가 ‘백기투항’하면서 당·청 관계가 봉합되는 모양새를 보이지만, 진짜 권력 투쟁은 집권 후반기로 접어들었을 때 일어난다. 이번에 개헌 이슈를 선점한 김 대표가 개헌으로 진검 승부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도 “박근혜 대통령을 극복하는 것이 차기 대선주자의 임무”라며 “차별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켜야 하는 대선주자로서 개헌은 폭발력이 크고 현재권력에게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당분간 수면 아래에 묻어둔 개헌론을 정기국회 이후 또다시 들고나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래권력과 현재권력의 다툼은 이제부터다.
김경욱 정치부 기자 dash@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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