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윗선의 지시를 받아 조직적으로 불법행위를 저지른 공무원이라고 치자. 국내 정치·선거 여론을 조작하려고 댓글을 써댔거나 민간인을 불법사찰해왔다고 말이다. 그런데 어쩌다 꼬리가 잡혔다. 어떻게 해야 할까? 관련 증거를 인멸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면 된다. 안티포렌식 삭제 프로그램 ‘무오’(MooO)를 내려받아 돌리든, 전문업체에 찾아가 디가우싱(강한 자력으로 파일을 복구 불가능하게 파기하는 것)을 하든 무조건 컴퓨터를 갈아엎어라. 검찰이나 법원에 나가서는 전자우편 주소도 휴대전화 번호도 모른다고 딱 잡아떼라. 그러면 당신도, 당신의 윗선도 살길이 생긴다. 이것이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판결(2012년)부터 ‘국가정보원 정치·선거 개입 사건’ 판결(2014년)까지 우리 사법부가 내놓는 한결같은 메시지다.
지시한 과장은 무죄, 실행한 주무관은 유죄2013년 11월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를 없앤 혐의로 기소된 진경락(47)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을 파기했다. 증거인멸 ‘유죄’를 ‘무죄’로 바꾸라고 주문한 것. 복잡한 사건의 전말을 풀어보면 이렇다. 2010년 6월 국무총리실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 김종익씨를 불법사찰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김씨는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동영상을 블로그에 올렸었다. 총리실이 지원관실을 수사 의뢰하자 검찰이 곧 압수수색을 할 듯했다.
지원관실 설립에 관여한 이영호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진경락 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을 불렀다. “무조건 컴퓨터를 갈아엎어라. 바닷물에 30분 동안 넣었다가 빼면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 진 과장은 부하 직원 장진수 주무관에게 전화했다. “(민간인 사찰을 주도한) 점검1팀의 컴퓨터가 복구되지 않도록 조처하라.” 장 주무관은 인터넷에서 삭제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1팀원의 컴퓨터 데이터를 삭제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진 과장이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진 과장은 다시 “자료를 더 확실히 지우라”고 다그쳤다. 장 주무관은 디가우싱 업체를 수소문해 컴퓨터 하드디스크 4개를 갈아엎었다.
대법원은 증거인멸을 지시한 진경락 과장은 ‘무죄’, 이를 실행한 장진수 주무관은 ‘유죄’라고 판결했다. 우리나라 증거인멸죄에 있는 독특한 ‘특례 조항’을 국가범죄를 비호하는 공무원에게도 적용한 탓이다. 형법 제155조(증거인멸죄)를 보면, 다른 사람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하면 형사처벌을 받지만, 자신이나 친족의 범죄를 감추기 위한 증거인멸 행위는 예외로 인정된다. 이 특례 조항에 진 과장은 매달렸다. “기획총괄과장으로서, 점검1팀의 불법 또는 비위 행위가 밝혀질 경우 징계 대상이 되거나 형사처벌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다.” 최강욱 변호사는 “뻔뻔하다”고 일갈했다. “자신의 범죄라서 증거인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공무원이 주장하면 국가가 범죄조직이라고 자인하는 꼴이다.”
수사대 증거 삭제 뒤 김용판 ‘증거 부족’ 무죄‘뻔뻔한 주장’을 하급심은 외면했지만 대법원은 수긍했다. “진 과장은 김종익씨를 협박해 KB한마음 대표직을 사임하게 한 혐의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고, 그가 삭제한 자료도 김씨의 불법 내사 자료였다. 자신이 형사처벌받게 될 것을 우려해 증거를 없앴기에 증거인멸죄로 처벌할 수 없다.” 반면 장진수 주무관은 다른 사람(진경락)의 형사사건 증거를 인멸했기에 ‘유죄’라고 했다.
‘최선의 방어책’을 찾아낸 공무원들은 이후 더 과감해졌다. 2012년 12월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는 ‘댓글 공작’이 드러나자 오피스텔에서 이틀간 나오지 않았다. 경찰과 선거관리위원회 직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 댓글 작업 증거를 확인하겠다며 지켜섰지만 문을 걸어잠그고 버텼다. 이날 밤 김씨는 국정원 상부와 연락하면서 노트북에 든 파일, 인터넷 접속 기록 등 혐의 관련 증거 자료를 삭제했다. 그 결과 그는 형사처벌을 면했다. 되레 증거를 확보하려고 대치하던 야당 의원들이 ‘감금 혐의’로 약식 기소됐다.
2013년 5월에는 현직 경찰이 국정원 사건의 증거를 인멸하다 현장에서 덜미가 잡혔다. 검찰이 국정원 정치·선거 개입 사건 수사를 축소·은폐했다는 혐의로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를 19시간 동안 압수수색할 때다. 사이버범죄수사대의 박아무개 증거분석팀장이 관용 컴퓨터를 안티포렌식 삭제 프로그램으로 돌려버렸다. 앞서 1월에도 서울경찰청은 관련 사건의 증거분석 자료를 일괄 삭제하고 초기화했다. “국정원 여직원이 (정치 관련) 댓글을 작성한 흔적이 없다”는 중간 수사 결과(2012년 12월16일)가 어떻게 나왔는지 알 길이 없어졌다. 국정원 사건을 축소·은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국가범죄를 비호하려는 공무원의 막무가내식 발뺌은 법정으로 확대됐다. 지난 4월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국정원 심리전단 안보5팀(SNS팀) 팀원 류아무개씨는 “당신의 네이버 계정이 맞느냐. 2011년 연말에 어느 부서에 있었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이메일을 잘 안 써서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소속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온라인 활동이 주 업무인 국정원 직원의 어처구니없는 모르쇠 답변이었다. 지난 3월 공판에 출석했던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김아무개씨는 “내가 원래 기억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사용했던 휴대전화 번호도 모른다고 말했다.
국정원 직원이 이렇게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든든한 ‘보호막’ 때문이다. 현행 국정원법과 국정원직원법 등을 보면, 범죄행위로 직원을 수사하려면 국정원장에게 ‘지체 없이’ 알려야 한다. 전·현직 직원들의 증언이나 진술을 들을 때도 보름 전에 국정원장의 사전 허가를 받도록 돼 있다. 증거를 인멸하고 서로 입을 맞출 충분한 시간을 합법적으로 확보한 셈이다.
직원 체포하자 절차 어겼다며 거센 항의국정원은 이 보호막을 충분히 활용했다. 2013년 10월 검찰이 정치·선거 개입 트위터 글 5만여 건을 올린 혐의로 안보5팀 직원 3명을 체포했다. 국정원이 검찰에 강하게 항의했다. 사전에 법에 정해진 기관 통보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검찰 수뇌부는 국정원 직원을 석방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검찰은 조사도, 증거 확보도 실패했다. 반대로 사전 협조를 요청하면 국정원은 무시했다. 수사 초기에 불법 트위터 활동 혐의를 포착한 검찰이 국정원에 안보5팀 직원 명단과 트위터 계정 목록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국정원은 끝까지 묵묵부답이었다.
증거인멸과 잡아떼기로 일관했던 국정원 정치·선거 개입 사건의 결과가 9월1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에서 나왔다. 국정원 직원들이 대선 때 특정 후보 지지 또는 비난 글을 온라인에 게재해 사실상 선거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누구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번에도 국가의 ‘완전범죄’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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