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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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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대표, 앞이 잘린 메시지 받고는…

“야당이 한계가 있으면 빠지세요”란 말까지 듣는 세월호 특별법 정국,

유족의 뜻을 명확히 확인하지 못한 합의가 2차 합의안 파동 불러와
등록 2014-08-26 18:12 수정 2020-05-03 04:27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맨 왼쪽)가 지난 8월20일 경기도 안산 합동분향소 뒤에 있는 도립미술관에서 유족들에게 협상 과정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맨 왼쪽)가 지난 8월20일 경기도 안산 합동분향소 뒤에 있는 도립미술관에서 유족들에게 협상 과정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새정치민주연합의 최근 두드러진 특징은 ‘여당의 악재’를 ‘야당의 악재’로 끌고 들어와 여당의 짐을 덜어주고 야당은 자중지란에 빠져드는 상황을 반복한다는 점이다. 기초선거(기초단체장·기초의원) 무공천 약속과 65살 이상 노인에게 매월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주겠다던 공약을 새누리당이 깼는데도, 이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두고 새정치연합이 혼란에 빠진 것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여의 악재가 야의 악재가 되는 상황

세월호 참사 이후 당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7·30 재·보궐 선거 참패를 당한 뒤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가 물러났고, 이번엔 박영선 원내대표가 세월호 특별법 합의 과정에서 보인 패착 때문에 당이 휘청이고 있다. 특별법 제정의 혼돈 책임이 정부·여당에 상당히 있는데도 정작 야당이 매를 두들겨맞는 꼴이다. 한 당직자는 “우리 당이 바닥에 떨어진 듯싶다가도, 다시 지하 2층, 3층… 지하 8층, 9층으로 떨어지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유족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특별법 합의안에 새정치연합이 두 번이나 사인한 것을 본 야권 지지층은 경멸적 언어를 새정치연합에 투하하는 지경이 됐다. 박영선 원내대표가 8월20일 경기도 안산에서 자신의 합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유족을 만났을 때 한 유족은 참으로 뼈아픈 말을 던졌다. “야당이 한계가 있으면 빠지세요.”

박영선 원내대표는 유족, 소속 의원들과도 공유하지 않은 채 8월7일 여당과 특별법 1차 합의안 발표, 당 추인 거부, 8월19일 유족과 뜻이 다른 2차 합의안 발표, 유족 반발의 수순을 왜 되풀이해 겪었을까. 합의 내용은 만족스럽지 못한데, ‘합의 타이밍’이 너무 빨랐다는 게 당내 대체적인 평가다. 그래도 그가 대외적으로는 야당의 원칙과 명분을 지켜낼 ‘강골’로 인식됐기 때문에 유족 요구안에서 크게 후퇴한 합의안에 실망하는 반응이 당 안팎에 적지 않다.

지금부터 이 설명은 박 원내대표와 비교적 가까운 인사의 얘기다. 그는 일단 “결과적으로 박영선 원내대표가 비판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합의 과정에서 정치적 사심이 들어갔다고 보진 않는다”고 말했다. 그 역시 “8월7일 합의는 (소통) 절차상 다소 문제가 있었다”고 보면서도, “세월호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떨어지는 상황에서 진상조사위원회를 빨리 띄워 진상조사 과정에서 (참사 원인과 책임에 대한) 이슈를 새롭게 만들어야 세월호 참사를 끌고 가는 동력을 계속 만들 수 있다”는 게 박 원내대표의 생각이었다고 했다.

“유족들은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기소권 부여를 주장했지만, 여당이 이걸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었다. 우린 청와대와 검찰이 수사권·기소권 부여는 절대 안 된다는 메시지를 여당에 강하게 줬다고 본다. 그런 정황도 파악하고 있다. (수사권을 따낼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유가족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진상조사위 절반을 확보할 수 있는 (1차) 합의안을 가동해 진상조사위를 운영하자고 판단한 것이다.”

‘정치적 행위’로 문제 해결하겠다?

하지만 박 원내대표의 1차 합의안은 유족과 당으로부터 거부당했다. 그래서 그는 1차 합의 때와 달리 8월19일 2차 합의안을 발표하기 직전엔 의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여당과 협상을 진행할 카드를 소속 의원을 통해 유족 쪽에 미리 설명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어지는 원내 지도부 사정에 밝은 인사와의 문답.

[유족들의 요구처럼 2차 합의 때 유족들의 동의를 확실히 받은 안을 들고 협상장에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8월19일에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협상하다가 유족과 접촉해온 한 의원으로부터 박영선 원내대표한테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여당 몫 특검추천위원 2명에 대해) 유족이 ‘사전 동의’한다는 말이 (합의에) 들어가면 유족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박 원내대표는 이걸 유족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 내용에 합의한 것이다.”

유족의 뜻을 전달받고 합의했으니 독단적 결정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유족의 뜻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은 문자메시지였다는 얘기가 당내에서 흘러나온다. ‘유가족이 참여하는 17명의 진상조사위에서 10명의 특검추천위를 국회에 추천하고, 여야가 10명 중에서 4명의 국회 추천 몫 특검추천위를 고를 때 유족이 사전 동의하면 고려해볼 수 있다’는 가족대책위 인사의 취지가 앞부분이 생략된 채 ‘야당과 유족이 사전 동의하면 고려해볼 수 있다’는 내용이 박 원내대표에게 간략히 전달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야는 ‘여당이 국회 추천 몫 2명을 추천할 때 야당과 유족의 사전 동의를 받는다’는 2차 합의에 이르게 됐다는 얘기다. 유족의 뜻을 치밀히 확인하지 못한 채 합의를 서두른 박 원내대표를 포함한 제1야당의 허술함이 2차 합의안 파동의 난국을 불렀다는 소리가 된다.

당에선 박 원내대표에 대해 유족과의 소통 부족, 합의 과정에서 당내 의원들의 의견을 묻는 절차상의 미흡을 문제로 꼽고 있다. 특히 특별법은 유족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철저한 진상 규명을 바라는 유족의 뜻을 최대한 반영하는 과정이 중요한데, 여야 협상이란 정치적 행위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결과에 무게중심을 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당에선 박 원내대표가 정국의 최대 현안을 푸는 성과에 대한 심리적 압박에 쫓긴 게 아니냐고 말하는 목소리도 있다. 특별법 이외에 다른 법안들에 대한 처리 압박이 보수언론 등을 중심으로 제기될 수 있는데다, 당 재건 작업까지 서둘러야 하는 상황에서 특별법 문제를 장기적으로 끌고 가지 말자는 판단이 설익은 특별법 내용의 합의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박 원내대표의 다른 측근은 “원내대표와 당의 비상대책위원장 격인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의 중책을 모두 맡다보니 타협과 결단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고도 말했다. 당에선 박 원내대표의 ‘자기 확신’이 1·2차 합의의 실책을 되풀이하게 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한 중진 의원은 “박 원내대표를 만났더니 (합의 내용과 과정 모두) 최선을 다한 결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고 말했다. 당의 한 상임고문도 “박 원내대표는 자기가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새누리 “박 대표 지켜줘야 한다”

특별법 합의를 매듭짓고 7·30 재보선 패배로 흔들리는 당을 정비하는 단계로 넘어가려던 박 원내대표의 구상은 자신의 특별법 합의에 가로막혔다. 당도 극심한 혼돈에 휩싸이게 됐다. ‘박영선 원내대표의 2차 합의안마저 당이 추인을 거부하면 당이 더 위험해진다’는 합의안 추인 불가피론은 ‘특별법을 추인한 뒤 여야가 특별법을 통과시켜 진상조사위가 가동돼도 합의안에 반대하는 유족이 진상조사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2차 합의안을 당이 추인하는 것은 아무 실익이 없다’는 반대 의견에 부딪히고 있다. ‘리더십과 협상력을 상실한 박 원내대표가 사퇴해 완전히 새로운 판을 짜서 현 상황을 돌파해야 한다’는 퇴진론은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가 사퇴하고, 당 의결기구(당무위원회·중앙위원회)마저 없는 당에서 유일하게 선출된 권력인 박 원내대표까지 사퇴하면 무정부 상태가 된다’는 퇴진불가론과 충돌하고 있다. 원내의 한 당직자는 “누군가 ‘지금 내가 현 난국을 헤쳐나가겠다’고 나서지 않는 한 박 원내대표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에게 당이 국민공감혁신위원장까지 떠안기며 부담을 지운 만큼 어쨌든 이 난국을 다시 수습하고 혁신위를 굴릴 기회를 열어줘야 한다는 의견도 당내에 존재한다. 하지만 당에선 박 원내대표가 겸하고 있는 혁신위원장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당의 책임과 당의 대표성을 나눠갖는 안이 부상하고 있다. 새정치연합이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사이, 새누리당은 협상 파트너였던 “박영선 원내대표를 지켜줘야 한다”는 ‘옹호론’을 펴며 야당의 총체적 혼돈을 팔짱 끼고 관망하고 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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