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철도노동조합(철도노조) 파업 사태의 출구를 마련하면서 국회는 모처럼 사회적 갈등의 중재자 구실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꿔 말하면, 파업 사태의 실질적 당사자인 박근혜 정부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청와대는 강경 기조로 노-정 갈등을 심화시켰고, 이는 ‘파업 이후’에도 여전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노조가 파업을 철회한 당일에도 “공공의 이익보다 나의 이익만을 관철하려 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본적 질서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면 일류 국민이라고 할 수 없다”며 노조를 비난했다. 이른바 ‘무관용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원칙론’이 통했다?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산하 ‘철도산업소위’의 활동이 순탄치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박 대통령의 이런 비타협 강경 대응 방침 때문이다. 철도산업소위는 지난 1월2일 회의에서 활동 시한을 3월 말까지로 정했다. 정책자문협의체에는 국토교통부, 코레일, 철도노조, 노·사·정과 여야가 추천하는 민간 전문가 등 모두 8명이 참여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새누리당은 벌써부터 선을 긋고 있다. 수서발 KTX 법인 면허 발급은 ‘과거지사’로 취급하고, 노조원에 대한 징계 철회는 ‘노사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논의 테이블에 올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코레일의 방만 경영 해소 등 경영 효율화만 논의하자는 것이다. 청와대와 여당의 태도로 볼 때 철도산업소위는 ‘파업 출구용’ ‘사태 봉합용’으로 끝날 가능성이 적지 않아 보인다. 민영화 반대 여론을 의식한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 철도산업소위라는 논의의 틀을 만드는 성과를 거뒀지만, 민주노총 본부에 대한 강제 진입, 조합원에 대한 대규모 징계 추진, 철도운영 면허 한밤 기습 발급 등 사태가 악화할 대로 악화한 뒤 나온 ‘뒤늦은 수습책’이 가져온 한계이기도 하다. 중재자로 나섰던 박기춘 민주당 의원은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 피신해 있던 최은철 철도노조 사무처장과 파업 철회 조건을 협의하면서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요구하지 않기로 서로 얘기했다”고 말했다. 이런 탓에 여권에서는 박 대통령의 ‘원칙론’이 통했다는 해석까지 나왔다.
철도노조 파업 사태에서 청와대가 보여준 대응은 ‘노동 현안의 미래’를 예상케 한다. 노동시간 단축, 시간제 일자리 확대, 정년 연장 등 노-정 갈등이 불 보듯 뻔한 이슈가 줄줄이 대기 중인 상황에서 정부가 노동계를 ‘제압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경찰이 민주노총 본부에 공권력을 투입한 다음날인 지난해 12월23일 “산적한 노사관계 이슈를 대타협을 통해 해결해내야만 한다. 노·사·정 대타협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노총 ‘침탈’에 분노한 한국노총은 이날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선언했다. “직접 (노조) 집행부를 만나 설득할 기회는 갖지 못했다. 아마 했어도 (내 말을) 듣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의 발언은 ‘노동 정책 없는 정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당도 마찬가지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중재나 협상 노력을 기울이기는커녕 “철도노조는 철밥통”(최경환 원내대표), “철도노조는 썩어도 단단히 썩은 조직”(심재철 최고위원)이라며 갈등을 부추겼다. 심지어 중재에 나섰던 조계종 도법 스님에게 “제주 해군기지 반대 등 반정부·친좌익 활동을 열심히 했던 분”(홍문종 사무총장)이라는 색깔론까지 들이댔다. 청와대 입장만 앵무새처럼 따라하다가 비주류인 김무성 의원이 들고 온 합의안을 예산안 처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꼴이다.
“파업 정리 직전인데 합의 불필요”청와대는 노동계나 노동 현안에 대한 배타적 인식과 강경 대응을 ‘비정상의 정상화’란 말로 덮으려 한다. 박 대통령은 1월1일 신년사에서 “우리 사회 곳곳의 비정상적인 관행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정상화 개혁도 꾸준히 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6월24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새 정부의 개혁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비정상적인 관행을 정상화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강조해왔다.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 11월18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다시 언급된 ‘비정상의 정상화’는 12월10일 ‘비정상의 정상화 추진계획’ 80개 과제로 구체화하고, 12월16일 140개 국정과제와 함께 ‘국정운영의 양대 축’으로 규정됐다. ‘비정상의 정상화 48개 핵심 과제’ 가운데는 원전 비리 근절, KTX 등 철도산업 비리 근절, 방위사업 분야 비리 근절 등 ‘공공인프라 관리 부실 및 비리 근절’ 외에, 장례식장·상조회사 불공정 행위 근절, 고비용 혼례문화 개선 등 ‘일상생활 불합리 관행 근절’ 등도 포함돼 있다.
역대 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부조리한 관행을 혁파하겠다는 것인데, 정부가 직접 나서 손댈 수 있는 공기업 개혁이 ‘본보기’로 지목돼왔다.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강경 대응은 역대 정권에서 공기업 개혁이 ‘기득권 노조’에 가로막혀 번번이 실패했다는 판단 아래 선제적으로 노조의 기를 꺾으려 한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여권에서 “며칠 더 지나면 노조가 백기를 들 수 있는데, 여야의 일부 중진이 나서서 합의해줌으로써 사태 해결에 물타기한 것”이라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유기준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파업이 정리되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에 합의는 불필요했다. 원칙을 세운다는 입장이나 공기업 개혁을 두고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과도한 부채와 방만한 경영을 혁파하겠다는 ‘목적’에 ‘반노동’이라는 인식이 결합한 결과는 ‘노조 탄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정책 실패로 인한 책임을 모두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윤희웅 민 정치컨설팅 여론분석센터장은 “어떤 성과를 내려면 야당과 시민사회, 노조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하거나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무조건 밀려서는 안 된다는 대결적 사고가 강하게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김무성 의원은 지난 1월1일 언론 인터뷰에서 “철도노조 본인들도 출구를 찾고 있었다. 이런 노조를 ‘꼭 밟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옳지 못한 것”이라며 “정치는 원래 협상과 타협인데 그동안 너무 상대를 인정하지 않아 협상과 타협이 없었다”고 말했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무엇인지박 대통령은 1월6일 기자회견을 할 예정이다. 취임 뒤 처음이다. 집권 2년차 국정과제에 대한 구상을 국민에게 직접 설명한다고 한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무엇인지 국민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비정상’인 노조를 밟아서 ‘정상화’하겠다는 ‘국정 기조’가 되풀이된다면, 박근혜 정부의 비정상적인 국정운영 방식부터 정상화하라는 외침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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