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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만나야 한다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중국 방문으로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 정부, 당국 간 대화 원칙 접고 민간에서 물꼬 틔워야
등록 2013-06-19 17:10 수정 2020-05-02 04:27

믿음은 ‘쌓는다’고 말한다. 신뢰는 ‘구축한다’고 표현한다. 벽돌 한장 한장을 쌓아올려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중간에 잘못 쌓은 벽돌 한 장 때문에, 다 지은 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리고 공사를 다시 시작해야 할 때도 있다.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지난 5년여 동안 철저히 끊어졌던 남북관계를 다시 잇는 일도 마찬가지일 터다.
북-미 조만간 대화 나설 듯
“도발과 위협, 또 핵위협 이런 것을 ‘아, 그것도 좋다’고 할 나라가 어디 있나? 당연히 정부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국가의 가장 소중한 임무가 우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확실하게 하고, 도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응)하되, 항상 대화의 문은 어떤 조건 없이 열어놓는다. 북한의 태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우리와 대화할 수 있다. 또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생각해서 영유아 지원이라든가, 이런 인도적인 것은 정치적 상황과 관련 없이 항상 지원을 하겠다.”
박근혜 대통령은 5월31일 낮 청와대 녹지원에서 출입기자단과 점심을 들며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담은 이른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언급하던 참이다. 박 대통령은 “북한이 자꾸 고립화되는, 세계를 상대로 자꾸 도발하고 이렇게 하지 않고 뭔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의지를 가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를 보인다면, 그때부터 신뢰 프로세스가 본격적으로 가동할 수 있다”며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부분, 서로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협력을 강화해나가면서, 그것이 깊어지면 더 큰 경제협력도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특사 자격으로 지난 5월22일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반도 주변 정세가 급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을 통해 회담에 복귀할 뜻이 있음을 밝히면서, 그간 말만 무성한 채 실익이 없던 이른바 ‘중국 역할론’도 탄력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간 중국이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북한과 미국을 움직일 ‘지렛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연구실장은 “최 특사가 전달한 김 비서의 메시지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6월 초 미-중 정상회담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고스란히 전달할 것”이라며 “이미 북쪽이 6자회담 복귀 뜻을 밝힌 만큼, 북-미 간에도 조만간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과 미국이 마지막으로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은 것은 지난해 2·29 합의에서다. 합의가 나오기까지, 북-미는 2011년 5월을 시작으로 네댓 차례 직접 만나 협상을 벌였다. 이른바 ‘뉴욕채널’로 불리는 뉴욕 주재 북한 대표부를 통한 접촉도 수시로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애초 2011년 12월 합의문 발표가 예정됐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늦춰졌다는 게 중론이다.
당시 합의를 통해 북한은 대화 분위기를 개선하고 비핵화 의지를 보이기로 약속했다. 말뿐 아니라 ‘행동’에도 합의했다. 핵실험 및 우라늄 농축 활동을 포함한 영변에서의 핵활동을 중단하고, 영변 핵시설 감시를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복귀에 동의한 게다. 그 대가로 미국은 이른바 ‘영양지원’ 24만t을 내놓기로 했다.
2·29 합의는 쉽게도 깨졌다. 합의 내용이 발표된 지 불과 한 달 보름 남짓 만인 그해 4월 북한이 은하 3호 로켓에 인공위성 광명성 3호를 탑재해 쏘아올린 탓이다. 북쪽은 부인하고 있지만, 당시 미국 쪽은 2·29 합의에 장거리 미사일 발사 유예 조항도 포함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북-미 대화가 재개되면 2·29 합의 수준에서 다시 협상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쌓다 만 지점부터, 다시 벽돌을 올리자는 얘기다.
‘단호한 대응’ 다음에는 대화를
일본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제2차 북-일 정상회담 9주년을 맞은 5월22일 일본 정부는 성명을 내어 “납치·핵·미사일 등의 현안을 포괄적으로 해결하고, 일본과 북한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해 양국 국교 정상화를 달성한다는 우리 쪽의 입장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며 “북한이 납치 피해자 전원 귀환을 실현해 북-일 관계 재구축을 향한 역사적·대국적 견지에서 올바른 결단을 할 것을 강력히 기대한다”고 밝혔다. 앞서 아베 신조 총리의 자문역인 이지마 이사오 내각관방 참여는 사실상 총리 특사 자격으로 지난 5월14~17일 북한을 다녀왔다.
남에 대한 북쪽의 태도 역시 최 국장의 방중 이후 조금씩 바뀌는 모양새다. 6·15 공동선언 13주년 기념행사 공동 개최와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표자의 방북을 허용한다는 제안을 잇따라 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당국 간 대화가 우선”이라며 북쪽의 두 차례 제안을 모두 무질렀다. 이에 대해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5월29일 한반도포럼 조찬 강연에서 ‘핫바지’ ‘엿먹어라’ 등속의 표현을 쓰며 북을 맹비난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의 인식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정부가 계속 대화하자, 개성공단 문제를 풀고 대화하자고 해도 계속 그것은 거부하면서 민간한테, 뭐 안위도 보존할 것이고 물건도 다 가져갈 수 있으니까 오라고 한다. 이게 말이 되느냐. …이런 때는 정부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주고, (북한에 대해) 왜 정부와 대화하지 않느냐고 (비판)하는 것이 개성 문제를 포함해 남북 간에 신뢰를 구축하면서 정상적인 관계가 발전해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신뢰를 쌓으려면 ‘마음의 벽돌’부터 한 장씩 내려놓아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다. 남과 북이 긴 냉각기를 보낸 뒤 다시 만날 때면, 민간 쪽에서 물꼬를 튼 전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단호한 대응’ 다음에는 대화를 해야 한다. 어떻게 다가설 것인가? 비전과 전략이 있어야 한다. 강한 압박만이 능사가 아님은, 이명박 정부의 지난 5년이 증명한다. 어떤 형태로든 만나야, 설명도 하고 항의도 할 수 있다. 그런 만남이 바탕이 돼 당국 간 회담도 열 수 있다. 참여정부 출신인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이렇게 지적했다.
지금 당장 당국 간 회담 해도…
“정부의 주장처럼 북쪽이 당장 당국 간 회담에 응했다고 치자. 가서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재발 방지와 사과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북으로선, 키리졸브·독수리훈련 등을 거론하며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서로 날선 공방만 벌이다, 결국 다음 일정도 잡지 못하고 회담은 결렬될 게 뻔하다. 지난 남북 협상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런 회담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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