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이 터졌다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을 것이다. 직보가 청와대까지 단계적으로 올라가는데, 어떻게든 중간에서 사건을 마무리 하려고 했겠지. 엉덩이를 만진 행위는 처벌이 가능하다. 그런데 피해 신고나 고소가 안들어왔을 거다. 이번 사건을 보면, 미국에선 신고자와 가해자 접촉을 차단시켜버리지 않나. 한국에선 그런 부분이 부족하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수사기관 관계자가 내놓은 씁쓸한 답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수사기관이 과연 나를 보호할까, 조직에서 ‘민감한 여자’로 찍히지 않을까 등을 고심하다보면 경찰 신고를 꺼리게 된다.”
실제로 청와대 방미 수행단과 현지 한국문화원이 성추행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는 정황이 나오고 있다. 청와대는 이번 사건을 어쩌다 일어난 ‘공직자 기강 해이’ 정도로 해석한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심각한 범죄’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피해자 고소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는 성범죄 친고죄 조항은 최근에야 폐지돼, 오는 6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미국에서 성범죄는 친고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성범죄 피해 여성의 신원이 노출되거나, 사건과 관계없는 피해자의 사생활 보도가 이어지는 등 2차 피해도 여전하다. 지난해 실무수습 중이던 검사의 성추문 사건 당시, 검찰은 피해 여성의 사진을 유출한 혐의로 현직 검사 2명을 벌금 500만원과 300만원에 약식 기소했다. 외신 보도를 종합해보면, 이 사건을 수사 중인 미국 워싱턴 메트로폴리탄 경찰국은 ‘경미한 성범죄’(Misdemeanor sexual abuse) 혐의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것’ 외에 별다른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 보호를 위해 수사 상황 보안에 신경을 쓴다는 분석이다. 현지 사정을 잘 아는 한 미국 변호사는 “처음 경찰이 신고받은 혐의가 ‘경미한 성범죄’이므로 이를 수사하고 있다는 말만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대부분의 성범죄 피해자는 신고 당시 자세한 말을 하지 않으므로 수사를 진행한 뒤 기소 단계에서 적용 혐의가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윤 전 대변인이 호텔방에서 알몸으로 피해 여성을 만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 수위는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문이 닫혀 있고 방 안에 두 사람만 있는 상황에서, 피해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위협을 느꼈다거나 실랑이가 있었다면 ‘중범죄’(Felony)에 해당된다는 분석이다. 미국에선 징역 1년 이하에 해당하는 범죄는 ‘미스디미너’(Misdemeanor), 1년 이상에 해당하는 범죄는 중범죄라고 한다.
“한국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도”여성의 피해 사실이 수사기관에서 확인될 경우 대사관이나 청와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등 민사소송이 가능하다는 분석도 있다. 이상돈 전 중앙대 법학과 교수는 5월15일치 인터뷰에서 “미국은 외국정부나 공무원이 미국 시민에게 피해를 입힐 경우, 피해를 배상받을 수 있는 외국주권 면제법을 갖고 있다. 이 법률에 따라 피해자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미국 연방법원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미국 변호사는 “미국의 사내 성희롱 판례를 찾아보면 피해자들이 회사에도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며 “피해자가 문화원이나 대사관에 채용된 인턴이고, 사건이 발생하기 전 피해 예방을 할 수 있음에도 청와대나 대사관 관계자가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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