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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이 넷… 누가 대체 새누리당이야?”

“대선 공약 지키겠다” 경기 가평 군수 후보 공천 포기한 새누리당 난립 친여 후보들 ‘적통 경쟁’… 공약 파기 민주당은 어부지리 기대
등록 2013-04-25 21:42 수정 2020-05-03 04:27

빨간 후보 4명과 노란 후보 1명이 경쟁하고 있었다. 4월24일 재·보궐 선거에서 군수를 다시 뽑는 경기도 가평군 얘기다. 기호 1번 후보는 없다. 새누리당이 박근혜 대통령의 기초자치단체 정당공천 폐지 공약에 따라 후보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통합당은 문재인 대선 후보의 공약을 깨고 기호 2번 후보를 공천했다. 민주당이 가평군수 선거에 후보를 낸 것은 무려 11년 만이다. 가평군 유권자(5만 명)들은 ‘새누리당 코스프레’를 하는 무소속 후보 4명과 ‘처음 나온 민주당 후보’ 1명의 ‘이상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새로 뽑힐 군수의 임기는 2014년 6월4일 동시지방선거까지 1년 남짓이다.
4월16일 오전 11시20분께 가평군 설악면 설악장터 한복판에 유세 차량 2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첫 번째 차량에서는 경기도의원 보궐선거에 나선 새누리당 오구환 후보의 유세가 한창이었다. 새누리당 소속 도의원 7명이 지지유세를 하러 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첫 여성 대통령입니다. 집권당 후보가 당선되길 부탁드립니다.”
이들은 잠시 뒤 옆 차량에 올랐다. 군수 선거에 출마한 무소속 박창석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시작했다. 장호철 도의원은 “박근혜 대통령께서 공약을 해서 기초단체는 공천을 하지 않게 됐다. 새누리당이 (광역 도의원 후보를 공천한 것과 달리) 군수 후보는 내지 않았지만, 박창석 후보는 내가 함께 의정 활동을 하면서 죽 지켜본 사람이다. 기호 5번을 꼭 지지해달라”고 말했다. 차량 앞에 나란히 선 두 후보의 선거운동원들은 모두 빨간 점퍼를 입었다. 차이가 있다면 오 후보 쪽은 흰 모자를, 박 후보 쪽은 빨간 모자를 썼다는 정도다.

4월24일 경기도 가평군수 보궐선거에는 기호 1번 후보가 없다. 새누리당은 기초자치단체의 독립성 확보 등을 이유로 후보를 내지 않았다. 여당 성향 후보 4명이 새누리당 후보처럼 뛰고 있다. 왼쪽부터 김봉현(민주통합당)·육도수·박창석·정진구·김성기(무소속) 후보. 경기신문 제공

4월24일 경기도 가평군수 보궐선거에는 기호 1번 후보가 없다. 새누리당은 기초자치단체의 독립성 확보 등을 이유로 후보를 내지 않았다. 여당 성향 후보 4명이 새누리당 후보처럼 뛰고 있다. 왼쪽부터 김봉현(민주통합당)·육도수·박창석·정진구·김성기(무소속) 후보. 경기신문 제공

선거 공보물마다 ‘박근혜 인증샷’

사실상 ‘공동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이들 앞으로 빨간 점퍼 차림의 또 다른 선거운동원들이 무리지어 지나갔다. 군수 후보인 기호 4번 육도수, 기호 6번 정진구, 기호 7번 김성기 후보의 운동원들이다. 기호 7번 선거운동원들은 분홍 모자를 썼다. 저만치 있는 기호 2번 김봉현 민주당 후보의 선거운동원들은 당 색깔인 노란색·연두색 차림이다. 오후 1시30분께 유세 차량에 오른 김 후보의 여성 유세원은 “새누리당은 가평에 관심이 없습니다. 민주당 후보를 찍어주십시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죽 지켜보던 설악면 주민 박아무개(48·편의점주)씨는 “후보들이 난립하고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다니면서 유권자들의 혼란을 야기한다. 정당이 공천을 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반면 문아무개(76·가평읍)씨는 “유권자 수가 많지 않고 후보들이 오랫동안 활동해온 사람들이라 정당이 공천을 안 해도 누가 누군지 다 안다”고 말했다.

정당공천 폐지에 대한 후보들의 입장도 엇갈린다. 새누리당 당원이던 육도수·박창석·정진구 후보 3명은 중앙당의 무공천 결정 직후 모두 탈당했다. 후보 등록 전날에야 이뤄진 일이다. 이들의 선거공보물에는 모두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담겨 있다. 새누리당 후보는 아니지만, 새누리당의 ‘적자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황했다. 공천을 했다면 당연히 우리가 받았을 텐데…. 돌아다니면 주민들이 ‘다 빨간색이네?’ 그런다. 선거 열기도 떨어졌는데, 새누리당이 공천을 했다면 달랐을 거다. 민주당은 당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있지 않나.” 박창석 후보 쪽은 “당선되면 당연히 복당해야죠”라고 말했다.

“대통령 공약 이행 차원에서 무공천한 것을 당원으로서 따라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과 정당공천 폐지에 대해 법적·정치적으로 합의한 것도 아니잖나.” 정진구 후보는 “기초단체장은 책임정치 차원에서 공천하는 게 맞다. 공천을 안 하면 후보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 후보 쪽은 2010년 지방선거 때 새누리당 가평군수 후보로 공천받은 사실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크게 보면 무공천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너무 성급하게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식으로 했다. 지역구 국회의원인 정병국 새누리당 의원이 특정 후보를 돕고 있다는 얘기가 많은데, 이런 식으로 무공천부터 선거운동까지 혼란만 커지고 있다.”(육도수 후보 쪽)

역시 새누리당 출신인 김성기 후보 쪽은 정당공천 폐지에 찬성했다. “시·군 단위는 정당에 소속되면 정당의 지배를 받게 된다. 없애는 게 바람직하다. 지방의 기초단체 선거는 도시와 달리 정당보다는 인물 승부다.” 김 후보 쪽은 ‘빨간색’ 옷을 입은 것에 대해 “공교롭게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김봉현 민주당 후보는 “정당의 이름으로 책임정치를 해야 한다. 정당공천을 하지 않으면 토호세력이 지자체를 장악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평군에서는 새누리당의 ‘국민과의 약속’도, 민주당의 ‘책임정치 실현’도 다 뜬구름 같은 얘기로 들렸다. 가평군수 선거를 좀더 들여다봤다. 이번 선거는 임기 1년여짜리 군수를 뽑는 보궐선거다. 전임 이진용 군수는 지난 1월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군수직을 잃었다. 골재채취업자에게서 4천만원을 받았다. 이 전 군수는 2007년 4월 당시 양재수 군수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물러난 뒤 치른 재선거에서 당선됐고, 2010년 지방선거 때 재선에 성공했다. 두 전직 군수 모두 ‘민주당 출신 무소속’이었다.

비리 낙마 군수 자리 노려 도의원 2명 사퇴

그런데 비리로 낙마한 이 전 군수의 잔여 임기를 자신이 채우겠다며 경기도의원 2명 전원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박창석·김성기 후보다. 새누리당 소속이던 박창석 후보는 2007년 도의원 재선거에서 당선됐고 2010년 재선에 성공했으나 이번에 중도사퇴했다. 김성기 후보는 2010년 새누리당 가평군수 후보 공천에서 탈락하자 탈당해 무소속으로 도의원 선거에 나서 당선됐다가 이번에 중도사퇴했다. 비리 군수 낙마와 도의원 중도사퇴로 인한 선거 비용은 막대하다. 가평군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가평군은 이번 군수·도의원 보궐선거 비용으로 6억2260만원을 내야 한다. 가평군 올해 예비비(28억1830만원)의 22%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비리와 중도사퇴 때문에 1~2년이 멀다 하고 열리는 선거로 인해 군정의 연속성은 고사하고, 혈세 낭비로 군정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새누리당은 ‘대선 공약 이행’만 강조할 뿐, 박창석 후보의 새누리당 도의원 중도사퇴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앞서 벌어진 설악장터의 ‘합동 유세’는 이것이 침묵이 아니라 뻔뻔함임을 보여준다. 새누리당 도의원들이 중도사퇴한 박창석 후보를 돕고 있을 뿐 아니라, 새누리당은 그의 중도사퇴로 치러지는 도의원 보궐선거에 또 다른 새누리당 후보를 공천했기 때문이다. 이번 군수 선거에 나선 육도수 후보도 2006년 지방선거 때 새누리당 도의원에 당선됐다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물러났던 전과가 있다. 그의 도의원직 상실 때문에 치른 2007년 도의원 재선거에서 당선된 이가 박창석 후보였다는 사실을 접하면 요지경이 따로 없다.

지난 4월16일 오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신천리 설악장터에서 군수 보궐선거 후보들의 선거운동이 한창이다. 도의원 2명이 중도사퇴하는 바람에 도의원 보궐선거도 함께 치러진다. 설악면사무소 로터리에 후보자들의 펼침막이 걸려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지난 4월16일 오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신천리 설악장터에서 군수 보궐선거 후보들의 선거운동이 한창이다. 도의원 2명이 중도사퇴하는 바람에 도의원 보궐선거도 함께 치러진다. 설악면사무소 로터리에 후보자들의 펼침막이 걸려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해볼 만한 곳” 당력 집중한 민주당

한 무소속 후보 선거캠프의 관계자가 이렇게 말할 정도다. “가평군은 인구가 6만 명밖에 안 된다. 특히 군 단위 선거에서는 ‘우리 동네’ 출신 후보를 뽑는 소지역주의가 강하다. 정당 후보로 나온다 해도 밑바닥에서 움직일 정당 조직이란 게 없다. 중앙당 정치는 있어도 지구당 정치(지역 정치)는 없고, 선거 때마다 여기저기 붙는 선거꾼들만 움직인다. 비슷한 사람들이 도의원 나왔다 군수 나왔다, 정당 후보로 나왔다 무소속으로 나왔다 그러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수준의 기초단체 선거는 아예 안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일까. 새누리당은 크게 손해 볼 게 없다는 태도다. 가평군은 민주당이 2002년 이후 처음으로 후보를 낼 만큼 야당세가 워낙 약한 곳이라, 새누리당 출신 무소속 후보 가운데 누가 당선되더라도 ‘복당’ 가능성이 적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이곳에서 평균 득표율(51.5%)을 훨씬 넘는 득표율(67.5%)을 기록했다. 여주·양평까지 아우르는 지역구 국회의원은 정병국 새누리당 의원이 내리 4선을 했다. 정당공천을 폐지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로 꼽히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지배’에 대한 후보들의 눈치보기도 여전한 듯했다. 한 선거캠프의 관계자는 “어떤 후보는 정병국 의원과 친하다고 말하고 다니고, 어떤 후보는 친박 실세인 홍문종 의원(경기 의정부을)과 친하다고 말하고 다닌다. 도의원들을 동원해 찬조연설을 하는 것도 다 국회의원 작품이다”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958호 기획

958호 기획

대선 공약을 파기한 민주당은 ‘전당적으로’ 가평군수 선거에 매달리고 있다. 지난 4월17일에는 비상대책위원회 회의를 가평읍 김봉현 후보 선거사무소에서 열었다. 매일 국회의원과 경기도의원 7~8명이 가평군에서 ‘논두렁 밭두렁 샅샅유세’를 하는 중이다. 김 후보는 문재인 의원의 지원유세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선거사무소 외벽에 걸린 대형 현수막에 문 의원과 함께 찍은 사진을 넣었고, 선거공보물에는 “가평 문재인”이라고 적었다. 무소속 후보가 난립하면서 문 의원의 대선 때 득표율(31.6%)만 얻으면 당선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은 “박근혜 정부에 경종을 울려주는 게 박근혜 정부가 성공하는 지름길이다. 이번에 누가 봐도 새누리당인 사람이 당선되면 (박 대통령이) 옳다구나 하고 그냥 밀고 나갈 것이다. 무소속으로 위장한 빨간 후보 4명이 아니라 정통 야당인 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후보가 당선돼야 하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경종론’은 명분일 뿐이다. 민주당이 대선 공약을 깼다는 비판을 사면서까지 정당공천을 한 이유는 4월24일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을 기대해할 만한 데가 이곳 정도이기 때문이다. 11년 동안 후보를 내지 못할 만큼 기본 바탕이 취약한 지역에서 새누리당 성향 무소속 후보의 난립을 틈타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심산이다. 민주당이 ‘정당 후보 대 무소속 후보 구도’를 최대한 활용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인 김진표 의원은 4월17일 청평 5일장 유세에서 “민주당은 경기도의회에 76석의 압도적 의석을 갖고 있다. 민주당 군수가 당선되면 국회에서 127명의 민주당 의원들이 똘똘 뭉쳐서 예산 지원을 확실히 해드리겠다”고 큰소리쳤다.

30%대 초반 득표하면 당선?

새누리당의 무공천 결정에 쏠렸던 언론의 관심은 사그라진 지 오래다. 언론 보도는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다룰 뿐 ‘수도권 변두리’라는 가평군의 보궐선거는 ‘변두리 사안’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후보 캠프는 투표율이 60%대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았다. 보궐선거인데도? 답변도 거의 같았다. 가장 큰 이유는 고령화 때문이란다. 인구 6만1천 명 가운데 65살 이상이 1만2천 명에 이르고, 50살 이상이 절반을 넘는다고 한다. 송재무 가평군 노인회 회장은 “가평군은 아주 거대한 경로당”이라고 표현했다. 2007년 군수 재선거 때 투표율이 60.5%였다. 이번에는 30% 초반 득표율 정도로 당선 가능성이 있는 접전인데다, 조기투표까지 실시돼 투표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썩은 풀뿌리를 도려낼 수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1년2개월 뒤 다시 실시될 가평군수 선거가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했다.

가평=글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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