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일 민주통합당(민주당)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 위원장(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이 공천 탈락과 관련해 ‘초대형 사기극’이라고 비판하고,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공천 과정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반발하며 최고위원직에서 물러난 뒤 소문과 추측이 무성했다. 민주당 재벌 개혁의 상징과 같은 유종일 위원장의 낙천은 민주당의 개혁 의지를 의심케 한 중대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관심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당사자인 유 위원장과 박 의원이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민주당 지도부도 언급을 회피했다.
“법인세 최고세율 30%에서 25%로 낮추라”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했던가. 박영선 의원은 지난 3월26일 “지난해 말부터 (총선 공천을 줘서는 안 되는) 재벌 기피 인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돌았다”고 밝혔다. 유종일 위원장은 “지난해 말부터 경제민주화특위가 부자 증세 정책을 추진하는데 김진표 원내대표가 수위를 낮추도록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다”고 털어놨다. 2011년 말은 경제민주화특위가 총선과 대선을 겨냥해 재벌의 경제력 집중 억제, 부자 증세 등 분야별 경제민주화 정책과제를 선보이기 시작한 민감한 시기다. 더구나 김 원내대표는 유 위원장과는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정반대 지점에 서 있던 인물이다. 김 원내대표는 참여정부의 재벌 개혁을 용두사미로 만든 책임자 중 하나로 꼽히며 개혁적 시민사회로부터 낙천·낙선 운동의 타깃이 됐다.
유 위원장과 박 의원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미 지난해 말부터 유 위원장과 김 원내대표 사이에 재벌 개혁의 수위를 놓고 물밑 갈등이 시작됐고, 민주당 주변에서 재벌개혁론자들을 총선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재벌과 민주당 내 친재벌론자 연합세력이 유종일 위원장의 공천 탈락 과정에 은밀히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영선 의원이 말문을 연 자리는 지난 3월26일 저녁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총선을 앞두고 시민사회단체가 구성한 ‘99% 국회점령 프로젝트’가 ‘경제민주화 종결자를 찾아라’를 주제로 주최한 토크콘서트다. 박 의원은 유종일 위원장의 낙천과 관련해 “재벌의 낙수효과가 하나도 없구나, 재벌만 배불리고 우리는 굶어죽게 생겼구나 하는 국민들의 감정이 극도에 달한 때가 지난해 11~12월이었다”며 “그때 재벌들이 엄청나게 위기감을 느껴서 국회 주변에서 움직임이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총선에서 공천을 줘서는 안 되는) 재벌 기피 인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돌았다”고 밝혔다. 박 의원은 또 지난 3월21일 최고위원직을 사퇴하며 밝힌 ‘보이지 않는 손’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경제민주화를 막으려 하는 큰 의미의 세력”이라고 설명했다.
유종일 위원장은 토크콘서트가 끝난 뒤 가진 식사 자리에서 ‘김진표 원내대표 압력설’을 제기했다. 토크콘서트에 토론자로 함께 참석한 유 위원장은 “경제민주화특위에서 지난해 말 부자 증세와 관련해 법인세와 소득세 최고세율을 대폭 올리는 방안을 마련했는데, 김진표 원내대표가 법인세 증세안은 빼라고 계속 압력을 넣었다”며 “2011년 11월 경제민주화특위에서 핵심 정책을 공개하던 날에도 발표 불과 몇 분 전까지 쪽지를 넣어 법인세 최고세율을 30%에서 25%로 낮출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유종일 낙천후 부자증세안 완화돼
법인세와 소득세 등의 부자 증세는 양극화 심화를 초래한 이명박 정부의 부자 감세 정책의 오류를 바로잡고 과세형평성과 소득재분배 기능을 높이는 상징적인 정책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지난해 말 이후 민주당의 법인세 최고세율 구간 신설을 통한 부자 증세안은 내용이 지속적으로 약화돼 유 위원장의 발언을 강하게 뒷받침한다(표 참조). 경제민주화특위의 원안은 2억~100억원의 과표 구간은 세율을 20%에서 22%로 올리고, 100억원 초과 구간은 30%로 대폭 올리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17일 경제민주화특위가 10대 핵심 정책을 발표할 때는 100억~1천억원 구간은 25%, 1천억원 초과 구간은 30%로 일부 완화됐다. 최고세율을 25%로 낮추라는 김진표 원내대표의 요구가 완전히 관철되지 않고 부분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유 위원장의 공천 탈락이 사실상 확정된 바로 다음날인 3월21일 발표된 민주당의 총선 공약에서는 2억~500억원 구간은 22%, 500억원 초과 구간은 25%로 추가 완화됐다. 경제민주화특위가 고수한 대기업에 대한 법인세 최고세율 30% 신설안은 완전히 사라졌다. 결국 유종일 위원장의 낙천과 동시에 김진표 원내대표의 주장이 그대로 관철된 셈이다.
법인세만큼은 아니지만 소득세 최고세율 구간 신설안도 후퇴하기는 마찬가지다. 경제민주화특위는 1억5천만원 초과 과표 구간은 세율을 35%에서 40%로 올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총선 공약에서 최고세율을 38%로 완화했다.
유종일 위원장은 공천 탈락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민주당의 재벌 개혁 정책에 대해 “처음 내가 제시했던 것보다 한참을 후퇴해 손톱·발톱 다 빠진 정책이 됐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유 위원장의 낙천에는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 정책을 둘러싼 당 지도부와의 마찰이 주요하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 이유다. 유 위원장이 지난 1월 말 재벌 개혁 정책으로 발표한 재벌세 신설안은 또 다른 사례다. 재벌세는 대기업의 계열사 과다 보유 등 경제력 집중에 대한 세 부담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기업의 계열사 주식 보유분 배당금을 기업 수익에 포함해 법인세를 매기거나, 계열사 투자를 위한 차입금의 이자를 비용으로 인정하지 않고 과세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하지만 김진표 원내대표는 발표 직후 “(재벌세는) 나나 이용섭 의장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새로운 세금 신설은 저항이 크다”고 제동을 걸었다. 재벌세 아이디어를 처음 낸 것으로 알려진 홍종학 가천대 교수(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는 “재벌세에 대해 젊은 유권자의 70%가 찬성하는데, 당 지도부는 오히려 표를 까먹다는 전혀 상반된 인식을 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의 총선 후보 단일화 타결 이후 공동정책 실천과제 합의와 실천을 주관하는 노항래 통합진보당 정책위의장도 “민주당의 총선 공약이 부자 증세를 포함해 많은 부분에서 후퇴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친재벌론자 대거 공천
총선을 앞두고 재벌당 이미지를 탈색하겠다고 했던 새누리당은 공천 과정에서는 경제민주화를 실천한 수 있는 인물 대신 신자유주의자와 친재벌주의자 등 오히려 재벌 개혁에 역행하는 인사들을 지역구와 비례대표 후보자로 대거 공천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연초 경제민주화 조항을 헌법에 도입한 당사자인 김종인 전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으로 영입하고, 당 정강·정책에도 경제민주화 추진을 명문화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최근 새누리당의 비대위원을 전격 사퇴한 김종인 전 의원은 새누리당 공천 결과에 대해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인물은커녕 그 개념 자체를 이해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비례대표 공천을 받은 이만우 고려대 교수, 지역구 공천을 받은 나성린 의원(부산 부산진구갑)은 대표적 친재벌론자나 시장주의자로 분류된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여럿 된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김종인 전 의원은 이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을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김종인 전 의원은 새누리당에 들어간 뒤에도 박영선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유종일 교수를 (공천에) 꼭 넣어줘야 한다”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영선 의원은 “새누리당에는 경제민주화와 관련된 사람이 한 사람도 공천되지 않았고, 민주당에서도 경제민주화를 대표하는 유종일 위원장이 물을 먹었다”며 재벌 개혁을 단행할 인물이 국회에 들어가기 쉽지 않음을 토로했다. 유 위원장은 “강철규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도 두 차례나 한명숙 대표에게 나를 공천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며 “(공천 결과는) 특정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민주당 지도부의 공동 책임”이라고 말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처음에는 당장 재벌 개혁이 이뤄질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과연 개혁이 제대로 될까 의심하는 수준까지 후퇴했다”며 “특히 김진표 원내대표가 공천을 받고 유종일 교수가 낙천되는 것을 보고 민주당 안에서조차 개혁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선대인 세금혁명당 대표는 “개혁이 제대로 되려면 정책 개혁과 함께 인물 개혁도 돼야 한다”며 “정책을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뭐하느냐”고 비판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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