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개혁 진영에서 요즘 가장 뜨거운 쟁점은 ‘연합’이다. 누구든 내년 총선·대선에 혼자 나섰다간 진보개혁 진영 전체가 공멸한다는 위기감 탓이다. 연합의 정도와 범위를 놓고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뭉쳐야 산다’는 생각엔 큰 이견이 없다.
진보개혁 진영의 구상대로 내년 총선·대선에서 연합이 가능할까? 총선·대선은 재보선이나 지방선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당·정치인별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다. 더구나 대선은 모든 것을 쏟아붓는 ‘한판 승부’다. 과거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은 보수 지역정당의 통합에 불과했고, DJP 연합과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의 경험은 불신과 배신으로 귀결됐다. 게다가 지금 연합해야 하는 세력은 이전보다 갈래가 많다. 정당 통합까지 가지 않더라도, 선거 연합을 이루는 것 자체도 만만치 않다는 얘기다. 다당제가 발달해 연합정치가 ‘공식’이 된 유럽 등의 사례를 참고하자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웨덴, ‘예산 → 정책 → 내각 구성’ 합의로 승리
스웨덴에는 진보 정당인 사회민주당·좌파당·녹색당과 보수 정당인 온건당(옛 보수당)·자유당·기독교민주당·중도당, 극우 정당인 스웨덴민주당 등이 있다. 내각책임제 아래 다수당제를 채택한 스웨덴에서 한 정당이 과반 득표를 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각각 총선을 치르고, 그 결과에 따라 진보 정당끼리 혹은 보수 정당끼리 연립정부를 수립해 스웨덴을 이끌어왔다.
1920년 처음 보통선거를 실시한 이후부터 2006년까지 보수 정당은 1976~82년, 1991~94년 두 차례를 빼놓고는 60년 넘게 야당 신세를 면치 못했다. 특히 최대 야당인 온건당은 지속적으로 인기가 하락해 2002년 선거에선 15.3%밖에 지지를 얻지 못했다. 보수 정당도 살길을 찾아야 했다. 2003년 온건당의 새 당수가 된 프레드리크 레인펠트는 ‘새로운 스웨덴 모델’을 기치로 내걸고, “사회민주당에서 이데올로기를 뺀, 친복지·친노동자 정당”을 천명했다. 총선을 2년 앞둔 2004년엔 다른 보수 정당들과 ‘스웨덴을 위한 동맹’(이하 동맹)을 구성했다. 이전과 달리 선거를 치르기 전부터 ‘전선’을 확실히 긋고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맹은 연립정부 수립을 위한 작업을 1년6개월에 걸쳐 차근차근 마무리했다. 1단계는 ‘예산 합의’였다. 집권할 경우 활용 가능한 자원과 세원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고, 이 돈을 산업·노동·복지·교육·국방·외교 등 13개 분야에 얼마나 배분할지 합의했다. 같은 보수 정당이라고 해도 제각각 지지 기반과 역사, 추구하는 가치와 이념이 다르기 때문에 의견 조정이 어려운 세세한 분야는 차치하고, 비교적 합의가 쉬운 큰 틀부터 합의를 시작했다. 그다음은 ‘정책 합의’였다. 합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집권하면 시행할 153개 정책을 공동 공약으로 내걸었다. 대표적인 게 소기업 세금 철폐 등을 통한 450억크로나(약 5조9천억원) 감세로 덴마크보다 담세율(소득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낮추겠다는 것이다. 덴마크의 담세율은 48%대로, 50%에 이르던 스웨덴보다 조금 낮았다(참고로 우리나라의 담세율은 21% 수준이다). 마지막은 총리와 각 부처 장관직 배분, 즉 ‘연합정부 구성에 대한 합의’였다. 각 정당의 특성에 맞게 보수당은 총리를 맡고, 기독교민주당은 가족부 장관을 맡는다는 식으로 총선 전에 미리 섀도캐비닛을 구성한 것이다.
결과는 48.1%를 득표한 동맹의 승리였다. 사민당 등 진보 정당들은 46.2%를 얻어 정권을 잃었다. 지난해 총선에서도 동맹은 49.3%를 얻어 43.6%를 얻은 진보 정당을 제치고 재집권에 성공했다. 이와 관련해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예산 → 정책 → 내각 구성 순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것부터 합의해 집권 전략을 실행한 스웨덴 보수 정당의 사례는 우리나라 진보개혁 진영이 배울 점이 많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최근 화두로 등장한 복지 문제만 하더라도, ‘무상복지를 하자’가 아니라 한정된 예산에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돈을 쓸 건지부터 논의해야 한다. 가용한 자원으로 실현 가능한 수준이 무엇인지 철저히 분석하고 합의하지 않으면, 설령 정치 연합이 이뤄지더라도 약속한 정책을 제대로 실행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신생 좌파정당 당수가 유력한 총리 후보
이탈리아의 선거 연합은 좀더 ‘기술적’인 차원에서 주목받는다. 이탈리아는 1993년 이전까지 순수비례대표제(정당의 득표수에 비례해 의석수를 배분하는 방식)를 운영한 탓에 지역·이념 등에 기반한 군소정당이 난립한다. 이런 상황에서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연합정부 구성은 필연적이었다. 1994년부턴 상·하원의 75%를 우리나라와 같은 단순다수대표제(득표율과 무관하게 무조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1명을 선출하는 방식)로 선출하면서 선거 연합은 더욱 중요해졌다. 선거를 치르기 전에 미리 연합을 구성하고 단일 후보를 내세워야 이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를 간파한 베를루스코니의 ‘전진이탈리아’는 북부 지역에선 ‘북부동맹’과 연합해 ‘자유를 위한 동맹’으로, 남부 지역에선 파시스트당인 ‘민족동맹’과 연합해 ‘좋은 정부를 위한 연합’으로 선거를 치러 집권에 성공했다. 우파 정당인 전진이탈리아는 북부 이탈리아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극우파 북부동맹은 물론 파시스트당의 후신인 민족동맹과도 손을 잡은 것이다.
한편 1991년 이탈리아 공산당이 좌파민주당과 공산주의재건당으로 쪼개지면서 갈등이 심해진 중도·진보 진영은 1996년 총선에선 전열을 가다듬고 ‘올리브동맹’을 구성했다. 좌파민주당, ‘마르게리타’, ‘가치이탈리아당’ 등 8개 중도·진보 정당이 연합체를 이뤄 예비경선을 치르고, 여기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사람을 후보로 내세웠다. 공산주의재건당은 올리브동맹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집권 뒤 정책 연합을 조건으로 상대 후보가 유력한 곳에는 서로 후보를 내지 않는 방식으로 협력했다. 그 결과 올리브동맹은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다.
이후 선거에서도 좌·우파는 계속 선거 연합을 통해 정권을 주고받았다. 2007년 올리브동맹은 민주당으로, 우파 연합은 ‘자유인민’으로 통합됐다. 이후에도 선거 연합은 계속된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공산주의재건당 출신 등이 새로 만든 좌파 정당 ‘좌파생태자유’ 등과 연합했다. 좌파생태자유 대표이자 아풀리아주 주지사인 니키 벤돌라는 민주당의 지원을 받은 후보와 예비경선을 치러 단일 후보로 나섰고, 본선거에서도 큰 승리를 거뒀다. 가톨릭 신자이자 동성애자인 니키 벤돌라는 ‘이탈리아의 오바마’로 불리며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로 주목받는다. 대중 지지율도 중도·좌파 진영 가운데 가장 높다. 좌파생태자유는 소수당이지만, 지금의 여세를 몰아가면 다음 총선에서 이탈리아는 역사상 처음으로 ‘좌파 가톨릭 게이 총리’를 맞이할 수도 있다. 다음 총선 1년 전인 2012년 민주당과 좌파생태자유 등의 중도·좌파 연합이 베를루스코니에 맞설 총리 후보를 지명하는 경선을 벌이는데, 지금으로선 벤돌라가 이길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나라별 정치문화 차이 감안해야
조국 서울대 교수(법학)는 이렇게 각자의 정당은 유지하면서 연합체를 만든 뒤 경선을 치러 단일 후보를 만드는 과정에 주목한다. 물론 우리나라 정당법은 42조 2항에서 “누구든지 2 이상의 정당의 당원이 되지 못한다”며 복수 당적을 금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당끼리 후보 단일화를 할 땐 경선 대신 여론조사 방식이 주로 활용됐다. 그런데 조 교수는 ‘가설정당(임시정당) 준비위’로 이를 돌파할 수 있지 않느냐고 제안한다. 정당 준비위는 정당이 아니므로 기존 정당에 소속돼 있더라도 현행법상 문제 삼기 어렵다는 논리다. 선거 연합에 공감하는 진보개혁 정당의 정치인과 당원, 시민사회 인사들이 모두 이 준비위에 가입하고 후보 경선을 벌이자는 것이다.
물론 이들 나라의 선거 연합은 참고할 만하지만, 이런 연합이 가능했던 배경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귤도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데, 그 나름의 역사와 제도가 다른 정치는 오죽할까.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가령 이탈리아는 정당 간 예비경선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때문에 선거 연합이 수월하다. 이처럼 나라마다 정치제도와 문화가 다른데, 무턱대고 우리가 따라한다고 해서 정치 연합이 가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특히 유럽 등은 대부분 의회 다수 세력이 곧 집권세력이 되는 내각제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내각제와 달리 우리나라와 같은 대통령제에선 의회와 대통령이 각각 선거를 치러 독자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둘은 견제·독립의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기왕 연합정치 논의가 시작됐다면 제도적 개선책을 고민하는 동시에, 현실적으로 논의에 임하는 각 정당의 자세도 점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윤철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소수당인 녹색당과 연정할 때 녹색 외교가 중요하다는 가치에 합의하고 외무장관이라는 요직을 넘겨준 것처럼, 정치 연합이 성공하려면 가치의 합의와 함께 다수당의 통 큰 양보가 필요하다”며 “정당의 규모나 의석수 같은 지분에 관계없이 서로 연합정치의 파트너로서 동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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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개혁 진영은 정치 연합의 수준과 범위를 놓고 백가쟁명을 벌이고 있다. 핵심은 두 가지다. 정책 연합에 기초한 선거 연합이냐, 통합정당이냐? 진보정당은 민주당·국민참여당과 함께할 것이냐, 차별성을 강화할 것이냐?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 지난 1월9일 진보신당은 당원 500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벌여, ‘새로운 진보신당 건설에 함께해야 할 정치세력’이 누군지를 물었다. ‘함께할 세력이 없다’, 즉 독자생존해야 한다고 답한 사람은 응답자의 10.4%, ‘사회당까지만 함께해야 한다’는 응답은 18.2%, ‘민주노동당과 사회당까지 함께 가야 한다’는 응답은 26.6%였다.
국민참여당이나 민주당을 놓고는 어땠을까? 진보신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비정규직법 등의 문제를 들어 이들 정당이 ‘진보대통합’의 파트너로는 부적합하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국민참여당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응답은 24.2%로 ‘민주노동당·사회당까지’라는 응답과 엇비슷했고, ‘민주당까지 함께 가자’는 의견은 16.8%로 독자 노선을 주장하는 이보다 많았다. 이 결과를 놓고 진보신당 안에선 “놀랍다”는 평가가 나왔다. 진보의 독자 세력화 성향이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진 진보신당 당원의 40% 이상이 ‘개혁세력과 함께 살림을 차리자’는 의견을 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현재 진보 정당과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는 ‘진보정치 대통합과 새로운 진보 정당 건설을 위한 연석회의’를 출범시키고, 올해 안에 새로운 진보 정당 건설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민주당은 이인영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민생·복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범국민 연대와 야권연합 추진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최고위원은 복지동맹에 기반한 진보개혁 통합정당 구성을 주장하고 있다.
‘진보-개혁’과 ‘진보+개혁’ 가운데 어느 쪽이 현실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중요한 건 어느 쪽의 의견이 관철되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서민과 노동자의 마음을 움직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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