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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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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만 높이되 얻는 게 없는 PSI

핵제재 효과와 무관한 PSI 참여 선언으로 긴장만 고조…
상황 따라 북 ‘행동’ 나설 가능성도
등록 2009-06-04 05:56 수정 2020-05-02 19:25

“자학적 대북정책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전격 실시한 이튿날인 5월26일 오전 정부가 서둘러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를 공식 발표한 것을 두고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PSI에 참가한다고 북이 추가 핵 생산을 못하는가? 아무 상관없다. 남북해운합의서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우리 영해를 통과하는 의심스런 북 선박을 검문검색할 수 있다. PSI 전면 참여로 이제 검문검색을 요청하는 선박에 대해선 무조건 응해주겠다는 대외적인 약속을 한 셈이 됐다. 미사일이나 핵무기 관련 물품이 나온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어쩔 것인가? 무기용과 민간용 이중으로 사용 가능한 물품도 있을 테고. 이런 상황이라면 북은 극렬 반발할 테고, 결국 갈등만 높일 뿐 우리가 얻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난 2007년 10월14일 일본 남부 요코스카항 앞바다에서 열린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모의훈련 도중 미국·오스트레일리아 등 각국 병사들이 대량살상무기 의혹 물질을 실은 선박을 장악한 뒤 선원들을 심문하는 장면을 연출해 보이고 있다. 사진 REUTERS/ KIM KYUNG-HOON

지난 2007년 10월14일 일본 남부 요코스카항 앞바다에서 열린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모의훈련 도중 미국·오스트레일리아 등 각국 병사들이 대량살상무기 의혹 물질을 실은 선박을 장악한 뒤 선원들을 심문하는 장면을 연출해 보이고 있다. 사진 REUTERS/ KIM KYUNG-HOON

부시 행정부의 맞춤형 대북봉쇄 정책

PSI는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와 그 운반 수단을 비롯한 관련 물질의 확산을 차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미국 주도의 느슨한 국제공조 협의체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인 2003년 5월 말 공식 발족됐지만, 우리 정부는 남북관계에 끼칠 파급 등을 고려해 그동안 전면 참여를 망설여왔다. 북의 반응이 워낙 격렬했기 때문이다. 실제 북한은 “남한이 PSI에 전면 참여할 경우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경고해왔다. 올 들어서만도 지난 3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담화 등을 통해 몇 차례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과민’한 반응에는 이유가 있다. 따져보자.

지난 2002년 12월9일, 아라비아해를 거슬러 예멘으로 향하던 북한 화물선 서산호를 스페인 군함 2척이 나포했다. 페데리코 트리요 당시 스페인 국방장관은 “서산호에 실린 4만 포대의 시멘트 더미 밑에 컨테이너 23개가 숨겨져 있었다”며 “그 안에서 스커드미사일 완제품 15기, 고성능 재래식 탄두 15개, 미확인 화학물질 83드럼 분량과 기타 미확인 무기 등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서산호’ 사건이다.

‘적대행위 금지’ 정전협정 위반 논란

미 국가안보국(NSA)은 서산호가 북을 출발하기 전부터 스커드미사일 등이 선적되는 것을 포착하고 이를 추적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라크 침공 준비가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미 정보당국은 미사일 구매국이 이라크일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스페인 해군에 서산호 나포를 요청했다. 하지만 서산호 나포 소식이 알려진 직후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은 “북한에 4100만달러를 주고 미사일을 구매했다”며 강력 반발했다. 서산호는 합법적인 무역신용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서산호를 미군기지가 있는 인도양의 디에고가르시아섬으로 예인하던 미 해군은 결국 나포 이틀 만에 서산호의 예멘행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체면을 구긴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사건 직후 ‘대량살상무기와의 전투에 관한 국가안보보고서’를 발표하고, 이른바 ‘악의 축’으로 지목한 북한과 이란, 이라크에 대한 예방적 선제공격 전략을 명시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31일 부시 대통령은 폴란드 크로코프를 방문한 자리에서 PSI를 공식 출범시키기에 이른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PSI를 촉발시킨 계기도, 그 목표도 북한”이라며 “PSI는 출발부터 사실상 부시 행정부의 ‘맞춤형 대북봉쇄’ 정책이었다”고 지적했다.

남쪽의 PSI 전면 참여 발표에 대한 북의 반응은 예상대로 격하게 터져나왔다. 북한은 5월27일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명의로 성명을 내어 남쪽의 PSI 전면 참여를 “국제법은 물론 교전 상대방에 대하여 ‘어떠한 종류의 봉쇄’도 하지 못하게 된 조선 정전협정에 대한 란폭한 유린이며 명백한 부정”이라며 “(이로써) 전쟁도 평화도 아닌 우리나라의 불안정한 정세는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를 극한 상황에로 치닫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민군 판문점대표부가 나선 이유는 뭘까? 판문점대표부는 1994년 북한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화할 것을 요구하면서 기존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해 만든 기구다. ‘정전협정’을 걸고 넘어가겠다는 얘기였다.

북쪽은 그동안 PSI에 따른 육·해·공 봉쇄가 ‘육상·해상·공중에서 일체의 적대행위 금지’를 규정한 정전협정 14~16조 위반이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특히 정전협정 제15조는 “육지에 인접한 해면을 존중하며 항구에 대해 어떤 종류의 봉쇄도 하지 못한다”고 못박고 있다. 하지만 PSI는 대량살상무기 관련 물품을 실은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에 대한 정선·임검·압류 등의 조치를 규정하고 있다. 이게 ‘군사적 강제조치인 봉쇄’라는 게 북의 논리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이 때문에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5월11일 내놓은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의 현황과 쟁점’이란 제목의 현안 보고서에서 “한국의 PSI 완전 가입을 이유로 북한이 추후 도발 행위를 국제법적으로 정당화시키려고 할 경우에 대비한 대응 논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판문점대표부가 성명에서 ‘정전협정 구속력 상실’과 ‘군사적 행동’을 경고함에 따라, 한미연합사령부는 이튿날인 5월28일 대북 정보감시태세인 ‘워치콘’을 3단계에서 2단계로 한 등급 높였다. 일부에선 “북이 사실상 전쟁을 선포한 것 아니냐”는 극단적인 해석도 내놓고 있다. 일견 격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성명문을 꼼꼼히 뜯어보면, 조금 다른 해석도 가능해 보인다. 북이 강조한 내용은 크게 3가지다.

첫째, PSI 전면 참여를 북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한다고 했다. “그 어떤 사소한 적대 행위도 우리 공화국의 자주권에 대한 용납 못할 침해로 락인하고 즉시적이며 강력한 군사적 타격으로 대응할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말의 수위는 높지만, 문장 자체는 ‘조건문’이다. ‘적대 행위’가 있으면, 강격하게 ‘대응’하겠다는 게다.

둘째, “더 이상 정전협정의 구속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미국의 현 집권자들이 대조선 압살 책동에 열이 뜬 나머지… 괴뢰들을 끝끝내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에 끌어들인 상태”이기 때문이란 게다. ‘사실관계’가 틀린 말이다. 미국이 끌어들인 게 아니라, 한국 정부가 자발적으로 전면 참여를 결정했다. 남쪽이 아니라 미국을 겨냥한 주장으로 읽히는 이유다.

셋째, “서해 북방5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의 법적 지위와 주변 수역을 항해하는 선박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고 위협했다. 서해교전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다만 여기서도 해석의 여지는 남겨뒀다. “우리도 필요하다면”이라거나, “일단 우리를 건드리는 자들은”이란 전제를 깔고 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은 이렇게 지적했다.

제2 서해교전이라도 나면 어떻게…

“북의 성명을 곱씹어보면 선제적으로 ‘도발’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조금 적극적으로 해석해, 이 정도의 말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은 없을 수도 있다. 북으로선 상당히 신중하고 절제된 입장을 밝힌 셈이다. 대응을 하기에 앞서 그 의도를 면밀히 검토해봐야 한다. 넘겨짚고 섣부르게 대응해선 안 된다. 자칫 위기를 키울 수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의 그늘이 그 어느 때보다 짙다. 긴장감은 끝없이 고조된 상태다. ‘상황’이 만들어지면, 북이 ‘행동’에 나설 공산이 커 보인다. 이 전 차관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북의 ‘오판’을 막기 위해선, 남도 ‘오판’을 피해야 한다는 게다. 일촉즉발, 엄중한 상황이다. 신중해야 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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