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명박계와 박근혜계 사이의 분위기가 사뭇 화기애애해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은 박근혜계 좌장을 자처하는 김무성 의원을 만났다. 연초만 해도 미국에 체류 중인 이재오 전 의원의 국내 복귀에 강력히 반발했던 김 의원은, 이 전 의원이 3월 중순 귀국하기로 확정됐는데도 “달라진 모습을 기대한다”며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 전 의원은 중국에서 만난 정두언 의원에게 “당분간 정치 일선에 안 나서겠다”고 말했다. 이상득 의원과 박근혜계에 두루 던지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사실상 한나라당 계파 갈등의 핵심 축이던 ‘이상득-이재오-김무성’ 관계에 변화가 감지되면서, 양쪽이 화해의 길로 들어서는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온다. 정말 그럴까?
“이재오 신중한 스타일로 변신”
‘분란 유발자’로 낙인찍혔던 이재오 전 의원은 측근들이 “미국에서 1년 지내더니, 돌다리가 깨질 정도로 두드려보는 신중한 스타일로 변했다”고 표현할 만큼 한껏 몸을 낮추고 있다. 그는 1년 동안의 미국 경험을 바탕으로 (가제)이란 책을 집필할 계획이다. 법원 판단을 예단할 순 없지만,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의 의원직 상실형 확정판결로 오는 10월 자신의 지역구(서울 은평을)에서 재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명예를 회복할 채비도 한다. 그의 한 측근은 “조기 전당대회 출마니 뭐니 말이 많지만, 이 전 의원은 자리에 욕심을 내서 뭐에 뛰어들 생각이 전혀 없다. 적정한 시점이 되면 역할이 주어질 것으로 보고,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위해 뒤에서 조용히 돕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적어도 의원직을 되찾을 때까진 누군가의 ‘표적’이 되는 활동은 자제하겠다는 얘기다.
이 전 의원의 복귀와 관련해 박근혜계 의원들은 모두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가 돌아오는 것이 마뜩잖지만, 이명박계의 움직임에 일일이 대응하면 박근혜 전 대표의 ‘계파 수장’ 이미지만 강화된다는 우려가 크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무성 의원의 반응은 이와 미묘한 차이가 있다. “우리 모두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이 전 의원도 넓은 세상(미국)에 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을 것”이라며 “달라진 모습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이 전 의원은 상대방을 죽이는 게 철학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돌아오는데 박근혜계가 두 번 죽을 수 있나? 신발끈을 동여매고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경론을 펴던 김 의원이었다.
김 의원은 2월21일엔 허태열·서병수 의원 등 부산 지역 박근혜계 의원들과 함께 이상득 의원을 만났다. 서로 소 닭 보듯 했던 이들이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김 의원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번 만남이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이라 생각한다. 서로 만나서 얘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 모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나라당 안에선 김 의원의 이런 태도가 박근혜계 좌장으로서의 입지를 지키려는 시도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최근 당 안에선 박 전 대표가 김 의원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돌았다. 지난 2월4일엔 박근혜계 의원 모임을 공식화해 당과 국정 운영에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김 의원의 주장에 박 전 대표가 직접 “(김 의원) 개인 의견을 말한 것일 뿐”이라며 선을 긋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 의원 처지에선 ‘적’과 손잡고 ‘화합 행보’를 하면서 자신의 정치력을 보여주는 게 역으로 박근혜계 안에서 주도권을 유지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상득 의원과 만난 직후 ‘김무성 원내대표설’이 급속도로 퍼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의원이 김 의원한테 차기 원내대표직을 제안했다는 얘기다. 김 의원은 이를 극구 부인하고 있다. 그는 “(이 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그런 말도 없었고, 나도 원내대표 경선에 나설 생각이 전혀 없다. (단독 추대 형식에 대해서도) 가정을 해서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명박 직계인 한 초선의원도 “여당이 대통령이 일할 수 있는 법안 하나도 제대로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박근혜계 원내대표를 원하겠느냐. 원내 사령탑을 박근혜계에 넘긴다는 건 사실상 원내를 포기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내에선 벌써 “김 의원이 권영세 의원에게 러닝메이트인 정책위의장을 제안했다” “여야와 청와대를 경험한 김 의원이 가장 적합한 차기 원내대표감”이라는 말까지 나도는 상황이다.
김무성 원내대표설 급속 확산그렇다면 이상득 의원은 왜 김 의원에게 우호의 손길을 내미는 것일까? 이 의원에게도 계파 갈등 해소라는 명분은 중요하다. 지난 1년 동안 이명박계는 구심점을 잃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 다른 소리를 냈다. 박근혜계 의원들은 방관자적 태도를 보이면서 국정 운영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 만일 김 의원을 연결고리 삼아 양쪽이 화학적 결합을 할 수 있다면, 이 의원은 당의 원로로서 제 역할을 했다고 새롭게 평가받을 기회를 얻는 셈이다.
‘김무성 원내대표 카드’는 이상득 의원이 ‘비공식 권력’을 독점적으로 유지하는 데도 유용하다. 정권 창출에 공동 지분이 있는 이재오 전 의원이 돌아오면, 이 의원은 인사권을 핵심으로 하는 자신의 권력을 어떤 형태로든 나눠줘야 한다. 이명박계 재결집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 전 의원 쪽으로 힘이 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상득 의원으로선 어떤 경우든 달갑지 않다. 하지만 이 전 의원과 ‘상극’인 김무성 의원이 원내 수장이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힘들이지 않고도 이 전 의원을 견제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박근혜계의 한 의원은 “이상득 의원이 우리한테 얼마나 적대감이 강한지 모른다. 원내대표를 준다는 말도 믿기 어렵지만, 설혹 준다 해도 그게 얼마나 순수한 생각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계파 갈등 해소 이상득 명분론양쪽이 연출하는 ‘다정한’ 모습은 이뿐만이 아니다. 박근혜계 의원들의 대거 낙천을 주도한 것으로 지목됐던 정종복 전 의원은 최근 경북 경주에 선거사무실을 열고 4월에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재선거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의 대선 경선캠프 안보특보 출신으로, 지난 연말 박 전 대표가 출판기념회에까지 참석해 ‘선거 지원’ 논란을 일으킨 바 있는 정수성씨는 애초 이 지역의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소속 출마로 가닥이 잡히는 분위기다. 평소 같으면 양쪽이 불을 뿜어댈 만한 사안이지만 애써 충돌을 피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아직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여당이 계파의 밥그릇 문제로 자중지란을 일으키기엔 경제 상황이 엄중할 뿐 아니라, 날카롭게 발톱을 세울 만한 큰 선거가 없기 때문이다. 양쪽 의원들도 공통적으로 “지금은 전쟁을 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10월 재·보궐 선거와 내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거치면서 공천 줄다리기, 선거 책임 문제 등이 불거지면, 서로를 향한 뿌리 깊은 불신은 또다시 한나라당을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말 박근혜계 의원들의 연구모임인 ‘선진사회연구포럼’ 송년회에서 한 참석자가 농담으로 던졌다는 건배사 “창당 준비 완료!”는 농담으로 끝날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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