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박하게 들려도 하는 수 없다. 한반도 북녘 땅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은 크게 네 가지로 모아진다. 우선 핵개발 프로그램이다. 장거리 미사일도 빼놓을 수 없다. 누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뒤를 이을 것인지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여기에 식량위기나 탈북자 등 인도주의적 문제를 추가할 수 있겠다. 까놓고 말해, 이들 문제가 아니라면 북한에 관심을 가질 만한 이유는 딱히 없을 듯싶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한반도 남녘 땅에선, 물론 상황이 전혀 다르다.
취임 뒤 첫 순방지로 아시아를 택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2월19일 밤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1박2일이라지만, 네 번째 방문지인 중국으로 향하기까지 체류 시간은 21시간 남짓에 불과했다. 그새 분주히 움직인 그가 방한을 통해 남긴 메시지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스티븐 보즈워스 전 주한 미 대사를 대북특사로 임명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둘째, 북한을 향해 남북 대화에 나서고 미사일 발사 등 ‘도발’을 자제하라고 촉구했다. 셋째,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언급한 북한의 ‘후계 구도’ 관련 발언이 있다. 각각의 메시지가 향하는 방향과 담고 있는 내용은 조금씩 달라 보인다.
먼저 보즈워스 특사 임명 발표다. 클린턴 장관은 20일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한 공동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북한을 상대하는 데는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6자회담의 다른 참가국들과 논의한 끝에 스티븐 보즈워스 전 대사를 대북특사로 임명했다”고 밝혔다. 보즈워스 전 대사가 대북특사로 임명될 것이란 소식은 이미 몇 차례 언론에 공개됐다. 그럼에도 이를 방한 기간에 ‘공식화’한 것은 분명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북-미 대화의 본격화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클린턴 장관은 이날 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대북특사 임명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며 “(보즈워스 특사는) 나뿐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고를 할 것이며, 가장 고위급에서 대북 대화를 주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바마 행정부가 북-미 대화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있는지를 강조하는 한편, 대북정책에서 미국의 ‘진정성’을 구체적으로 내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선 핵·미사일 문제 해결, 후 북-미 관계 개선’을 고집하던 조지 부시 행정부와 달리, 오바마 행정부는 출범 이전부터 ‘북-미 관계 개선을 통한 핵·미사일 문제 해결’도 가능하다고 공언해왔다. 고위급 대북특사 임명은 이를 실행에 옮기겠다는 일종의 ‘선언’인 셈이다.
보즈워스 특사는 지난 1997년 11월 말 주한 미 대사로 부임해 부시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1년 2월 초까지 3년2개월여간 서울에서 활동했다. 이 기간에 남과 북은 6·15 정상회담을 했고, 북과 미는 조명록 차수-올브라이트 국무장관 교차 방문으로 급속히 다가섰다. 이에 앞서 그는 1995년부터 2년여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무총장을 맡아 경수로 협상을 이끌기도 했다. 북한 핵 문제를 포함해 한반도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란 얘기다.
눈길을 끄는 것은 특사 임명에 앞서 그가 지난 2월3일부터 7일까지 민간대표단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다는 점이다. 물론 혼자가 아니었다. 모턴 아브라모위츠 전 국무부 차관보, 리언 시걸 동북아안보협력프로그램 국장, 그리고 ‘북한통’인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주 주지사의 수석고문인 토니 남궁 박사 등이 방북단에 포함됐다. 북쪽 처지에선 자신들에게 ‘우호적’이라 느낄 만한 얼굴들이다. 본격적인 접촉에 앞서 북-미 간 모종의 ‘사전 조율’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게 한다.
특사 포함 미 민간대표단 북한 방문“북한은 한국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한국을 비난함으로써 미국과 ‘다른 형태’의 관계를 얻을 수 없다.” 대북특사 임명 공식화로 ‘의지’를 밝혔다면, 이어질 대화는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서도 밝히는 게 순리다. 클린턴 장관은 먼저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1718호에 따라 북한은 탄도미사일을 비롯한 관련 활동을 중단해야 한다”며 “6자회담에 피해를 주는 모든 도발적 행동을 종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본격 대화에 앞서 ‘판’을 흔들어선 안 된다는 점을 북쪽에 강조한 것으로 읽힌다. 이어 “북한 미사일 문제를 6자회담 의제에 포함시킬 것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는 “미국은 동맹국과 함께 6자회담을 어떻게 추진하는 것이 가장 북한에 맞는 방식인지 논의할 것이고, 통일된 방식으로 모든 우려 사항에 대처하려 한다”고 말했다. 북으로선 듣기에 싫지 않을 ‘메시지’일 터다.
이명박 정부에 보내는 신호는 없었을까? 두 번째 순방지인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언급한 ‘후계 구도’ 관련 발언에서 실마리를 풀어보자. 〈AP통신〉 등의 2월19일 보도를 종합하면, 클린턴 장관은 우선 “후계 문제를 둘러싼 내부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지도체제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북한과 인접 국가 간에 긴장이 고조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 지도부의 변화가 핵무기 해체와 관련한 논의의 진전을 더디게 하고 있다”며 “누가 김정일 위원장의 뒤를 이을 것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감안할 때,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전략을 신속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파장을 부를 발언이었다.
상당수 국내 언론은 “클린턴 장관이 공개적으로 북한의 후계 구도를 언급한 것은 그만큼 북한 상황이 긴박하다는 방증”이란 분석을 내놓았다.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굳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후계 구도’를 언급해 북쪽을 자극할 필요까진 없었다”며 “외교적 ‘배려’가 부족했던 것 같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지금으로선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협상 전략을 보여줌으로써 미사일 발사를 포기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그래야 6자회담 재개도 가능해지는데, 후계 구도 관련한 언급은 전략적 메시지의 혼선을 부를 수 있는 부주의한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조금 다른 해석도 나온다. 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은 클린턴 장관의 발언을 “북쪽의 후계 구도에 대한 평가를 한 게 아니라, 후계 구도로 이행하면 협상이 어려워질 것이란 점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며 “후계 문제가 본격화하기 이전에 북쪽과 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해 조속히 협상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이 전 차관은 이어 “표면적으로 보면 북한이 금기시해온 후계 문제를 거론한 것 자체에 대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북쪽 역시 ‘문장’ 파악에 익숙하기 때문에 조기 협상에 무게를 둔 발언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민감한 ‘후계 구도’ 발언, 남한 겨냥?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국책연구기관의 외교·안보 전문가는 “미국은 북한이 ‘후계 구도’에 대한 언급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조심해왔다”며 “굳이 서울로 향하는 기내에서 이를 언급한 것은 북쪽보다는 남쪽 정부를 겨냥한 측면이 짙어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가 외신 보도를 따 전한 클린턴 장관의 발언 내용을 살펴보면, 겉으론 한국의 ‘입장’과 ‘기대’를 말하지만 실상은 미국의 ‘결심’과 ‘요구’를 에둘러 전달한 것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클린턴 장관은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후계 구도는 어떻게 형성될 것인지, 또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등에 대해 많은 우려를 하고 있는 한국 입장에선 지금이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며 “한국은 비핵화와 핵확산 금지에 관한 논의가 정상을 되찾도록 미국이 최대한 노력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2월20일 한-미 외교장관 공동회견에서 클린턴 장관은 ‘후계 구도’ 발언과 관련한 질문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끄는 ‘지금의 북한’이 대화 상대임을 새삼 분명히 했다. 외교부가 홈페이지에 올린 회견 장면을 보면, 클린턴 장관은 “우리가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북한 정부와 상대하고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며 “지금의 북한 정부가 6자회담을 통한 대화에 복귀할 수 있도록 여타 6자회담 참가국들과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려는 부연인 셈인데, 설명의 대상은 북한뿐 아니라 남한도 포함될 수 있을 듯싶다.
지난해 중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이 불거진 데 이어, 최근엔 3남 김정운이 후계자로 지명됐다는 ‘설’까지 힘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 안에서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뒤 득세했던 ‘북한 붕괴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는 말이 외교·안보 전문가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몇몇 국책연구기관을 중심으로 ‘북한이 무너지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다는 전언도 있다. 촘촘한 정보 분석이나 구체적인 정책 평가는 없었다. 그러니 ‘왜, 언제, 어떤 식으로 북한이 무너질 것’이란 근거가 있을 리 없다. 이를 두고 고위 당국자 출신의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기독교식 예정조화설에라도 기댄 듯, 맹목적인 ‘낙관론’만 난무한다”고 전했다. 청와대 안팎에서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란 게다.
맹목적 낙관론과 전쟁불사론 사이그새 위기의 수위는 높아만 간다. 이상희 국방부 장관은 2월20일 국회 남북관계발전특위 전체회의에 출석해 북한이 서해에서 남쪽 함정을 공격하면, “타격 지점에 분명히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해안포나 미사일 등으로 공격을 한다면, 그 발사 시설이 있는 북한 영토가 대응 공격의 목표가 된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전쟁불사론’이나 마찬가지다. 셈법이 뭘까? 북이 전면전 위험을 감수하진 않을 거란 계산이다. 이럴 경우 북한 군부는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다. 남북이 군사적 충돌까지 나아가면, 미국은 동맹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북-미 관계에도 제동이 걸린다.
무엇보다 보수가 환호할 게다. ‘공안 정국’ 조성으로 ‘좌파 척결’을 도모해볼 만도 할까? 정부·여당으로선 피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다. 따지고 보면 청와대가 퇴행적 대북정책을 고집하는 것도, ‘보수층 이탈’이란 최악의 상황을 우려한 탓이다. 정권 출범 이전부터 대북정책은 국내 정치의 볼모였다. 새삼 외교와 안보를 말하는 것도 덧없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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