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대선 패배 복기하며 ‘내년까지 몸조심 하자’는 한나라당… 당내 변화·개혁에 대한 공감대 넓어졌지만 합의점 쉽진 않을 듯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열린우리당이 참패한 것은 한나라당이 반사이익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이 잘해서 그런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희망이 없다.”
5·31 지방선거가 끝난 뒤 한나라당 대권 주자 가운데 하나인 이명박 서울시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자만할 만도 하다. 부정할 수 없는 한나라당의 완전한 승리였다. 이 시장의 안방인 서울을 보자. 25곳 구청장은 모두 한나라당의 몫이 됐다. 지역구 시의원의 96석을 싹쓸이했다. 비례대표를 포함해 광역의원의 96%가 한나라당이다. 도 이런 쏠림 현상에 민망했던지 ‘한나라당의 1당 독재’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서울시의회는 확실히 ‘한나라 의회’가 됐다.
“대중은 골리앗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대로 가면 별 이변이 없는 한 내년 대선도 필승일 기세다. 당장 한나라당이 집권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이 시장의 발언은 과장된 표현이라기보다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한나라당 의원과 당원의 상당수는 그의 발언에 감성적으로 충분히 동의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은 이 시장의 발언이 나온 바로 다음날 “한마디로 착각도 유분수”라고 면박을 줬다. 이어 “자만심을 보이는 순간 한나라당에 쏠렸던 기대의 눈길은 싸늘하게 변하고 만다. 그것이 민심이다. 겸손이 더욱 필요한 때”라고 훈계했다. 모양새는 좀 이상했다. 한나라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을 당내에서조차 역할이 그리 크지 않은 재선 의원이 들이박은 꼴이다. 보수적인 정당인지라 평소 위계와 모양새를 중시하는 한나라당에서 이명박계나 중진 의원들은 이상하게도(?) 심 의원을 탓하지 않았다. 바로 지난 두 번의 대선 패배에서 얻은 ‘학습효과’와 그에 따른 이성적 반성 때문이다. 이 시장의 발언은 결국 일부 당원들의 지지를 받았을지 모르겠으나 분위기 파악을 못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한나라당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5·31 뒤 자연스럽게 자만 경계령이 내렸다. 지방선거 승리에 도취되지 말고 대선까지 남은 1년6개월 동안 살얼음판을 걷듯 신중하자는 것이다.
이같은 분위기를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2002년을 돌아봐도 그렇다. 당시 6·13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압승했다. 서울시 의원의 90%를 차지했다. 이회창 불패론은 날개를 달았다. ‘지금 이대로 가면 이긴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불과 여섯 달 뒤 치러진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졌다. 한나라당으로선 안주론의 한계를 뼛속 깊이 깨닫는 또 한 번의 교훈이었다.
이번에 한나라당의 승리는 지방권력의 1당 독점이라고 할 만큼 일방적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5·31에서 광역의원 정당 득표율이 53.8%를 기록했지만, 4년 전과 비교하면 사실 1.7%포인트의 상승에 불과하다. 접전 지역에서 모두 이겼기 때문에 승리가 돋보였을 뿐 한나라당에 대한 평균적 지지가 크게 높아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박근혜 대표 피습 사건 효과를 빼면 구조가 크게 달라졌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어쨌든 한나라당은 경험적으로 지방선거 압승이 2007년 정권 탈환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되레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경계와 경고가 당 안팎에서 심심치 않게 들린다. 괜한 엄살이 아니다. 박형준 의원은 “오히려 지방선거 압승은 한나라당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압승을 챙겨준 국민들은 한나라당에 더 많은 것을 기대할 것이고, 이는 거꾸로 한나라당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더 큰 비판의 화살이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마디로 그는 “대중은 골리앗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정리했다.
왜 쓸데없는 개혁 얘기냐?
이같은 인식은 다음번 심판의 대상이 한나라당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나온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승리가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무능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짙다. 국민들이 잘해보라고 밀어준 정당과 정치집단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거나 잘 못했을 경우 여지없이 심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임태희 의원은 “다음번 심판의 단두대에 서는 것은 거의 모든 지방권력을 손에 쥔 한나라당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한나라당이 “안주하지 말자”는 소극적 자만 경계론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지 여부다.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론은 이제 계파를 초월한 지배적인 언어와 분위기가 됐다. 하지만 한 발짝 더 나아가야 변화와 개혁이 있다. 그 중요성을 김형준 국민대 교수는 “대선에서 유권자들의 선택 기준이라고 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란 바로 변화와 개혁이다. 안정을 강조하는 한나라당이 과연 시대정신을 얼마나 잘 읽고 따라갈 수 있을지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변화는 당장 위기에 처한 열린우리당의 과제일 뿐 아니라 한나라당의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더 변화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은 당내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해왔다. 끊임없이 당 쇄신을 외쳐온 소장개혁파의 목소리는 지분을 넓히려는 전술이거나 잘하고 있는 당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해당 행위로 비쳐졌다. 임태희 의원은 “지방선거 압승으로 더 이상 변화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막아야 한다. 변화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해당 행위로 평가받는 분위기가 팽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당내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방향에 대한 논의를 꺼리는 분위기가 많고, 합의점을 찾아가기란 더욱 쉽지 않아 보인다. 안타깝게도 당장 7월11일로 예정된 전당대회에서 변화와 개혁이 중심 화두가 되긴 어려울 전망이다. 지방선거 승리의 들뜬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데다 ‘공정한’ 대선 후보 관리용 대표를 뽑아야 한다는 당위에 매몰된 탓이다. 한나라당의 한 보좌관은 “지역에 내려가면 마치 한나라당 세상이 된 것 같고, 주위에서도 당을 욕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다 보니 ‘왜 자꾸 쓸데없이 변화와 개혁 얘기를 꺼내냐. 당에 도움이 안 되는 얘기니 그만두라’는 분위기도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소장파 등 20여명이 나섰다
물론 움직임도 있다. 소장개혁파를 대표하는 ‘수요모임’과 중도 성향의 ‘국가발전전략연구회’ ‘푸른모임’, 초선 의원 모임인 ‘초지일관’ 소속 의원 20여 명이 당 개혁을 위해 전당대회까지 한시기구 형태의 모임(당의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는 모임)을 구성하기로 했다. 이들은 △합리적 수권대안 정당 지향 △미래지향적·개혁적 지도부 선출 △당내 지역주의 타파 △노선, 정책 경쟁 지향 △대선 후보 간 대리전 지양과 대선 후보들의 중립 표방 촉구 등 5개의 전당대회 원칙을 발표했다. 진영 의원은 “정치적 형태와 양식을 갖고 변화와 개혁을 얘기해선 안 된다. 정책과 본질에서 실질적 내용의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잃어버린 10년’을 끝낼 열쇠는 의외로 보수의 본능을 불편하게 자극하는 변화와 개혁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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