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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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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여, 어른인척 하지 말라

등록 2007-01-04 00:00 수정 2020-05-03 04:24

아이만의 문제가 아닌 감정 표현, 특히 30대 이상 남성들이 서툴러…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인정하며, 그 정체를 파악하는 자세부터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5살 난 딸을 두고 있는 직장인 김준석(39)씨는 평생 시원하게 울어본 기억이 한 번도 없다. 중학교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재수 끝에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너무 예쁜 딸을 얻었을 때도 사람들 시선을 피해 눈물 한두 방울 흘렸을 뿐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드러내지 말라고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항상 ‘사내자식은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어요.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거나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는 게 제가 배운 감정과 감정 표현의 전부라고 할 수 있죠. 회사에서 스트레스 많이 받아요.

업무에서 동료에게 밀리면 불안하고 윗사람들이 저보다 후배를 칭찬하면 질투도 나요. 가끔씩 야근을 할 때 회사에 혼자 앉아 있으면 말할 수 없이 고독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와이프에게도 설명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집에서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아요. 가장 힘든 것은 딸에게 제가 딸아이 덕분에 얼마나 행복한지를 말해주기가 참 힘들다는 점이에요.”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른들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특히 ‘남자가…’ ‘어른이…’로 시작되는 무차별 감정 거세 교육에 익숙한 대한민국의 30대 이상 남성들은 감정 자체에 낯설어한다. 기쁨이나 희열 등 긍정적인 감정도 묻어두고 분노나 질투, 불안, 죄책감, 슬픔 등의 감정도 덮어둔다. 이렇게 해결되지 않은 감정은 심리적 스트레스로 돌아온다. 심리적 스트레스로 인해 상담소 문턱을 넘는 어른들이 늘고 있는 것도, 서점에 감정과 관련된 자기계발 서적이 쌓이고 있는 것도 지금까지 어른들이 감정의 문제에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텍스트해석연구소의 유헌식 소장은 “감정은 삶의 맛”이라고 단언한다. 유 소장은 “감정은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가치인데 감정의 문제가 너무 오랫동안 무시돼왔다”며 “특히 어른이 되면 감정을 감추고 표현하면 안 되는 것으로 여겨왔다”고 말했다. “성장한다는 것은 지금을 느낄 줄 아는 것인데 우리는 항상 어른은 감정 표현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여겨왔어요. 이성은 이성이고 감정은 감정인데 지금 우리는 성장과 성숙의 지표를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감정을 억누르고 사는 것이 어른은 아닙니다.”

감정에는 드라마나 줄거리가 있다. 감정을 느끼는 상황의 앞뒤에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경험이 있다. 사람마다 경험과, 경험이 주는 의미가 달라도 그 감정을 일으키는 심리적 원인은 비슷하다. 감정의 실체에 대해 아는 것은 감정으로 다가가는 첫걸음이다. 분노는 나 또는 나의 것에 대한 모욕적이고 불쾌한 언행이 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분노를 표현해 자신이 그 일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느끼고 있느냐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를 상대방에게 제공할 수도 있고,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다. 불안은 불확실한 위협이 있을 때, 공포는 신체적 행복에 대한 구체적이고 갑작스러운 위험과 직면할 때 느낀다. 슬픔은 복구 불가능한 상실이 일어났을 때 다가온다. 또 목표를 성취하는 방향으로 진전을 이뤘을 때 행복을 느낀다.

개인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을 지혜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먼저 감정 자체를 그대로 느끼고 인정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한다. 김혜남신경정신과 김혜남 원장은 (갤리온 펴냄)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슬픔 안에서 굳이 어른인 척하지 말자. 우리는 슬픔을 감출 줄 알아야지 그걸 다 드러내면 나약하고 못난 사람이라고 배우며 자란 것이다. 슬픔을 이기는 방법은 슬픔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슬픔은 강물처럼 흘러간다.”

유헌식 소장은 감정을 있는 만큼 느끼는 방법을 제안했다. 기쁨이 있다면 기쁨의 정체를 들여다보고 딱 기뻐할 만큼만 기뻐하는 것이다. 다른 감정도 마찬가지다. 지난 2002년 월드컵은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감정적인 혼란에 빠져 있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월드컵 경기가 그토록 기뻐할 만한 일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무턱대고 터져나온 전 국민적 환호는 우리가 평소 감정 표현의 계기를 얼마나 찾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반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 개인적 감정의 표현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인터넷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사회적인 감정 표현은 극단적으로 나오고 있다. 딱 그만큼, 존재하는 만큼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감정 표현의 지혜다.

자기 안에 존재하는 개인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의 심리학자 래저러스 부부는 (문예출판사 펴냄)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감정은 개인적 의미의 산물이다. 개인적 의미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세계에 대해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분노, 불안, 죄책감, 행복감, 긍지, 애정 등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삶의 사건과 조건들에 부여하는 의미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감정 밑에 깔려 있는 개인적인 의미들을 이해하자. 그러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생기는 감정들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더 잘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런 감정들이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방해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우리는 삶을 좀더 능숙하게 운영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수월한 감정 표현 ‘나 전달법’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나 전달법’(I-Message)이다. ‘나 전달법’은 주어를 ‘나’로 하는 대화 방식으로 이를 통해 자기 감정을 먼저 표현하는 훈련을 할 수 있다. 회사에서 일로 인해 후배나 동료와 부딪힐 때 ‘너 전달법’(You-Message)을 쓰면 “너 때문에 일을 다 망쳤잖아, 너는 왜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냐?”라고 말을 한다. 자기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같은 상황에서 ‘나 전달법’을 사용하면 대화가 달라진다. “내가 너에게 이 점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구나.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아”라고 말하면 자기 감정을 드러내고 상대방과 공감의 폭이 넓어진다. 부부나 친구,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나 전달법’은 더 수월한 감정 표현을 하게 해준다. 이런 문제를 겪는 어른이라면 교육 프로그램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마음사랑 심리상담센터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대화 훈련 프로그램인 ‘체인지’(CHANGE)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습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실제로 관찰한 것과 느낌 등을 있는 그대로 자각하도록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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