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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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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일자리, 일인가 복지인가

재정지원 직접 일자리 95만 개 중 64만 개…

복지 성격 명확히 해야
등록 2019-12-11 01:36 수정 2020-05-07 04:44
12월4일 노인 일자리 신청이 시작된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사무소가 일자리 상담으로 북적이고 있다.

12월4일 노인 일자리 신청이 시작된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사무소가 일자리 상담으로 북적이고 있다.

12월4일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분지에 갇힌 안개가 오전 내내 짙다. 7100명쯤 되는 인구 가운데 1445명이 노인이다. 안개를 뚫고 ‘양평군 종합 사회복지관’이라 쓰인 조끼를 입은 노인들은 집게를 들고 찻길 따라 걷는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지평천 둑 위에는 다섯 노인이 서 있다. 계수나무 수백 그루가 노인들 뒤로 실개천을 따라 가지런히 심겨 있다.

둑 위를 서성이는 다섯 노인은 한동네 사람이지만, 나이에 따라 지역공동체 일자리 사업, 공공근로 사업, 노인 일자리까지 각자 다른 정부 일자리 사업(재정지원 직접 일자리)에 참여한다. 면사무소에서 한 조로 묶어줬다. 목사, 은행 지점장, 농부, 택시 운전사, 건설 노동자까지 젊었을 때 한 일은 각양각색이다. 60대부터 80대까지 스무 살 가까이 나이 차이도 난다. 그래도 그런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서로들 “어깨에 힘을 주지 않아” 마음이 잘 맞는다. “집에 있으면 티브이나 보고 누워 있을 걸, 나와서 몇 시간이라도 이 사람들이랑 재밌게 얘기할 수 있는 게 일단 참 좋죠.”(정만수(가명)·81) 67살 강철수(가명)와 72살 박명주(가명)가 투덕거리다가 “이 형님은 왜정 때 소학교 다닌 사람”이라고 놀려대는데도 정만수는 빙그레 웃고 말 뿐이다.

노인인구 급증 따른 구조 대응 성격

이 노인들, 무엇을 하는 걸까. 모여서 무언가 의미 있는 걸 한다. 열심히 하지 않는 날은 어딘지 계면쩍다. “여기 둑길에 사람들 제법 와요. 계수나무가 쫙 심겨 있는데, 우리가 이걸 가꿔요. 지금은 겨울이고, 추워서 좀 설렁설렁 하고 있네요.”(박명주)

돈을 받는다. “공공근로 하는 사람은 일한 만큼 최저시급 기준으로 받고, 노인 일자리 하는 사람은 27만원 받고요. 일하는 시간은 8시간, 6시간, 격일로 5시간, 3시간까지 다 달라요.”(김진하(가명)·63)

다만 이 활동을 일이라고 봐야 할지 자원봉사라고 봐야 할지, 받는 돈을 임금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복지수당이라고 여겨야 할지는 헷갈린다. “일이면 좀 지속성이 있어야 하는데 될지 안 될지도 모르니까 계획을 세울 수 없죠. 그렇다고 우리가 다른 일자리로 넘어갈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복지면 힘든 사람부터 주는 것일 텐데, 공공근로 쪽은 이력을 좀 따지는 것 같기도 하고.”(강철수)

김진하는 “일단 없는 것보다 훨씬 좋고, 잘한 정책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일한다고도,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고도 선뜻 얘기하기 애매하다. 때로 일 같아서, “너무 편히 보낸 날이나 ‘노인 일자리 퍼주기’ 같은 기사를 본 날이면 눈치가 보인다는 얘기를 나눈다”. 그래서 뭐라도 일감을 찾아보려고 애쓴다. 복지라고 생각하면, “사정은 변한 게 없는데도 일 안 한 달은 지원이 일절 끊기는 것이 또 이상하다”.

재정지원 직접 일자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분류하는 정부 일자리 사업 6개 항목 가운데 하나다. 주로 경제위기를 잠깐 버텨주는 한시적 성격과 민간 일자리로 이동을 준비시키는 경과적 성격을 지닌다. 2019년 한국에서 의미는 사뭇 달라져 있다. 핵심은 노인이다. “단순히 한시적, 경과적인 성격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노인 인구 급증에 따른 구조 대응 성격이 강하고 앞으로 중요성은 더 커질 것 같다.”(장현석 고용노동부 일자리정책 평가과장) 올해 95만 개 재정지원 직접 일자리 가운데 64만 개가 노인 일자리다. 내년 74만 개로 늘린다. 애초 노인만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닌 공공근로나 지역공동체 일자리 사업 등에도 노인이 다수 포진했다. 직접 일자리는 잠깐 버틴다고 나아질 리 없는, 민간 노동시장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노인을 위한 사업이 돼간다. 이쯤 되면 “기초연금, 국민연금과 더불어 노후 소득 보장의 중요한 한 축이 돼버린 상황”(서정희 군산대 교수)이다.

일자리 강조 탓에 혐오 번져

여기서, 고민은 시작된다.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고 계수나무를 관리하는 이들의 활동은 ‘일’인가 ‘유급 봉사’인가. 정부도 답은 모른다. 일단 88%에 이르는 노인이 만족하는 사업이니만큼 “실질을 봐야 한다”(장현석 과장)고도 말한다. 다만 전체 고용지표를 좌우할 만큼 규모가 커졌다. “2월에서 10월 사이 월평균 전년 대비 30만5천 명 늘어난 취업자 가운데 10만 명 정도가 노인 일자리 사업 참여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정동욱 통계청 고용통계과장) 규모가 전체 노동지표에 영향을 미치자 논란도 따라 커졌다.

고용과 맞물려 노인 일자리가 이야기되니, 혐오가 번지기 시작했다. ‘1시간만 일하다 가는 노인’ ‘쓰레기 줍는 노인’을 향해 비판의 날이 섰다. 복지 제도였다면 나올 리 없는 비판이다. 정부는 “노인 일자리를 비판하는 것은 어려운 노인들을 그대로 방치하자는 주장과 같다”(황덕순 청와대 일자리 수석, <한겨레> 인터뷰)고 항변해본다. 하지만 ‘일을 했느냐’가 소득을 지원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필요성보다 최소한의 근로능력이 있느냐에 따라 지원 여부를 가르는 특성 탓에 제대로 된 복지 제도라고 보기도 어렵다. 고현종 노년유니온 사무처장은 “복지로서 노인 일자리 성격을 명확히 하지 않고 70대 중반을 넘어선 노인들에게까지 큰 의미가 없는 노동 성과를 강조하고 고용 성과로 홍보하는 정부 태도 탓에 빚어진 문제”라고 말한다. 노인 일자리 대부분(약 50만 개)을 차지하는 사회활동 지원사업(공익형) 참여자의 평균연령은 76.1살에 이른다.

노인들의 근로자성 문제도 숨어 있다. 노인 일자리 참여자는 최저임금법, 근로기준법 같은 노동 관계법 적용을 일부만 받거나 적용받지 않는다. 정부는 공익형 노인 일자리의 경우 ‘봉사활동’이라고 일단 표현해뒀다. 노동시간·노동기간을 줄이며 사회보험 논란도 벗어나려 한다. “소극적으로 회피하는 전략일 뿐 근본적인 불씨는 남아 있다.”(장우찬 경남과학기술대 교수) 실제 법적인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배움터 지킴이, 동사무소 유급 자원봉사자 등이 근로자성 인정을 요구한 소송이 있었다. 법원의 판단은 아직 사안에 따라 엇갈린다. 박윤섭 노무법인 의연 노무사는 “엄밀히 따지면 근로자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모범적 사용자로서 정부 역할에 비춰서도 근로자성 인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다만 “그렇다고 모든 노인 일자리를 근로자로 인정하는 것은 재정 문제로 인한 대상 감소 같은 문제도 얽혀 있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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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 복지’의 함정

왜 노인 일자리는 오롯이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일과 복지 사이를 헤맬까. 노인 일자리가 만들어지던 시기 ‘생산적 복지’ 담론이 함정이었을 수 있다. 노인 일자리가 탄생한 건 한창 신자유주의와 일을 통한 복지가 세계를 휩쓸던 2004년이다. 복지 걸음마 단계인 우리나라에서도 근로장려금(EITC) 도입, 고용보험 확대처럼 굵직한 소득지원 제도가 대개 일을 대가로 주어지는 식으로 짜였다. 서정희 교수는 “필요한 사람에게 대가 없이 지급하는 현금급여에 반발이 워낙 컸고, 정부 도움을 받으려면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노동능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노인에게도 이런 논리가 적용된 것은 어색했다”고 되짚는다. 기초연금 같은 공공부조 성격의 복지제도를 대폭 강화하기보다, 좀더 타협이 쉬운 노인 일자리를 늘리는 방식으로 노인 소득지원이 이뤄지는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노인 일자리 성격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채 도입 당시 3만5천 개 정도이던 노인 일자리는 어느덧 20배 넘게 불었다.

전문가들은 답안을 내놓아보지만, 해결이 쉽지 않은 것도 안다. 해법을 말하는 목소리에 한숨이 깊다. “공익형 일자리처럼 70대 이상이 주류인 일자리는 현금급여 형태의 복지와 풍성한 노인 활동 프로그램 창출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노인 일자리는 근로자성을 제대로 인정해야 한다.”(서정희 교수) 다만 재정 여건과 이미 70만 개 이상으로 불어버린 노인 일자리에 기댄 노인들이 느낄 불안을 고려하면 지금 구조를 근본부터 뒤흔들기 쉽지 않다. “굳이 일했는지 안 했는지만 평가할 게 아니라, 노인들의 어울림과 사회참여 자체에 수당을 제공해야 한다”(고현종 사무처장)고도 말한다. 하지만 ‘일 이외의 사회활동’을 상상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살고, 늙어온 노인이 많다. 이들에게 ‘일’이라고 이름 붙은 사회활동 이외에 다른 만족감을 줄 수 있는 활동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현실을 인정하며 현재 법적인 개념조차 없는 복지와 일자리 사이에 낀 노인 일자리를 규정할 새로운 제도를 만들자”(박승섭 노무법인 의연 노무사)는 주장도 나온다.

다섯 노인은 이른 점심을 먹으러 출발한다. “특별히 큰마음 먹고” 9천원짜리 한식뷔페에 가기로 했다. ‘밥값은 무조건 더치페이’ ‘모여 있을 때 정치 얘기는 금물’ 같은 나름의 규칙을 정해놨다. 과일을 먹네 마네 문제로 언쟁하다가 웃고, 태진아 아들 가수 이루가 인도네시아에서 인기 많다는 정보에 솔깃해하며 각자 담아온 음식을 넘긴다.

일자리 신청에 온 동네 들썩

노인들이 밥을 먹는 사이 지평면사무소는 북새통을 이룬다. 이날부터 내년 노인 일자리 사업 신청이 시작됐다. 이즈음이면 온 동네가 들썩인다. “무척들 하고 싶어 하세요. 거동이 가능한 노인분들이면 대부분 신청하신다고 보면 될 거예요. 돈을 벌러 나오시는 분도 있고, 생애 끝자락에 뭔가 의미 있는 걸 해보겠다고 말씀하면서 오시는 분도 있고요.”(김원칠 지평면사무소 복지팀장) 복지 권리로 모두에게 주어질 수도 있었던 월 몇만원의 돈과 사회활동의 기쁨을, 세상이 차갑게만 바라보는 ‘일자리’로 받고자 노인들이 무리지어 면사무소 창구에 앉고, 탈락과 합격을 가늠하며 마음 졸일 계절이, 지평면에도 돌아왔다.

글·사진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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