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2014년 상반기 대졸 신입 공채 인적성검사에 응시하기 위해 취업준비생들이 고사장에 들어가고 있다. 류우종 기자
“과거제도는 대규모 공개 시험을 거쳐 엘리트를 채용하는 ○○ 시스템의 원형이기도 했다. 이 시스템은 민주주의보다 900년 이상 먼저 이 땅에 왔다. 고려 광종이 중국에서 들여왔다. (중략) 21세기 대한민국의 ○○제도는 조선 시대의 과거제도와 얼마나 다를까?”(, 장강명, 2018)
○○에 들어갈 이름은 무엇일까요. 짐작하셨겠지만 ‘공채’입니다. 공개 채용, 줄여서 공채 그게 바로 제 이름입니다. 한국과 일본에서만 존재하는 특이한 제도, 과도한 사회적 비용 낭비와 불합격자들을 좌절시키는 시스템, 고도성장기를 떠받친 주춧돌, ‘흙수저들’이 기댈 수 있는 그나마 공정한 제도… 저를 수식하는 말들은 극과 극입니다.
퇴사는 1년 내내, 입사는 1년 두 번?그래도 1년에 두 번, 봄·가을 정장을 차려입은 청년들이 필기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업들에게 저는 ‘천덕꾸러기’가 됐습니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 변화에 공채는 더는 채용 방식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이 퍼진 것이죠.
결국 2월12일 현대·기아자동차(현대차)는 10대 그룹 중 처음으로 2019년 신입사원 공채를 폐지하고 상시 채용으로 채용 방식을 바꾼다고 발표했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62년 만입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존재감이 흐려지는 건 섭섭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살아온 이야기는 많은 분이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제가 살아온 62년은 한국 사회 산업구조와 노동·취업 시장의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또 앞으로 우리 사회의 노동시장과 일터 문화가 어떻게 바뀔지 가늠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현대차 채용 누리집에 들어가봤습니다. ‘[R&D] 연료전지시스템 설계·수행직무’ ‘신입 [경영지원] 교육 기획 및 운영·수행직무’ 등 현업 부서별 직무에 따라 채용 공고가 각각 올라와 있습니다. 현대차 관계자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나를 버리려 하느냐고. 그는 채용 공고에서 드러난 것처럼 ‘현업 부서’를 강조했습니다. “현업 부서에서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이 퇴사하거나 다른 부서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1년에 두 번 공채를 할 경우 업무 공백이 발생합니다. 현업 팀에서 인사 부서에 요청하겠지만 한두 개 팀이 아니라 모든 부서에서 인력 충원을 요청하잖아요. 바로 충원되기 쉽지 않죠. 수시 채용을 할 경우 신입사원이든 경력사원이든 현업 부서에 최적화된 사람을 뽑을 수 있습니다.”
이는 어느 조직이든 겪는 일반적인 문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현대차의 설명을 들어보면 과거처럼 이러한 문제를 방치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제조업이 다 그렇듯, 자동차산업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자율주행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기술(ICT)과 자동차의 결합, 친환경 자동차 개발, 카셰어링(공유 차) 등 공유경제 같은 최근 경향에 뒤처지는 순간 생존 자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현대차만 해도 수소차와 전기차 개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죠. 과거처럼 인사 부서에서 연간 채용 규모를 일괄적으로 정하는 비탄력적인 채용 시스템으로는 지속할 수 없다는 게 현대차의 판단입니다. 각 부서의 특수성에 따라 인력을 그때그때 뽑겠다는 것으로, IT 기업들에서는 이미 하고 있는 방식이죠.
현대차의 설명을 듣다보면 왜 한국 기업이 저를 선호하다 이제는 찬밥 대우를 하는지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 중심에서 직무 중심으로, 우수 인력들을 무조건 확보하는 ‘그물형 채용’에서 필요한 인력만 확보하겠다는 ‘낚시형 채용’으로 변화하는 한국의 ‘채용 역사’를 엿볼 수 있습니다.
IT 바람으로 계륵, 대기업 직무적성 검사 도입저는 1957년 1월 태어났습니다. 삼성물산공사가 국내 민간 기업 최초로 공개 채용을 도입했습니다. 한국전쟁 복구 사업이 진행되면서 제가 필요해진 것이죠. ‘학연·지연·혈연을 배제한 공정한 인사 제도 도입’이 목표였다고 합니다. 그때 1200명이 지원해 27명만 합격하는 높은 경쟁률을 보였습니다. 시험 과목은 영어·한문·상식이었습니다. 어떤 업무든 맡길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를 필기시험과 면접으로 뽑는 공개 채용의 틀이 이때 마련된 것이죠. 1960~70년대 국가가 산업 성장을 주도하고 대기업들이 잇따라 출현하면서 저를 찾는 기업이 늘어갔습니다.
1980년대로 들어가며 저는 전성기를 맞습니다. 전두환 정부가 넘쳐나는 재수생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신입생을 졸업 정원보다 30%가량 더 뽑으면서 이후 대규모 구직자들이 취업시장에 쏟아졌습니다. 넘쳐나는 대졸 인력을 대규모로 채용하기 위해 좀더 안정된 채용 제도가 필요했습니다. 이때 영어·전공·상식을 시험 과목으로 대기업들이 상·하반기(6·12월)에 대규모로 채용하는 공채 방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전성기는 짧았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IMF)와 2000년대 들어 불어온 IT 바람에 기업들에게 저는 ‘계륵’이 됐습니다. 또 전 사회적으로 노동시장 유연화가 진행되면서 비정규직이 대규모 양산되고, 아예 공채 시스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구직자도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중견·중소 기업은 사실상 공채보다 상시 채용으로 바꾸는 움직임을 보였고 대기업들도 상시 채용 비율을 늘리거나, 그룹 공채를 없애고 계열사 공채로 전환했습니다. 또 학력과 영어 성적 같은 단순한 스펙보다 종합적으로 구직자를 평가하겠다며 ‘삼성 고시’ ‘현대 고시’라는 직무적성검사·인적성검사를 도입했죠.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기업 646곳의 인사 담당자에게 ‘2019 신입 채용 방식’을 조사해 2월14일 발표한 자료를 보면 공채 비율은 대기업 59.5%, 중견기업 44.9%, 중소기업 31.8%로, 상시 채용 비율은 대기업 21.6%, 중견기업 33.3%, 중소기업 45.6%로 나타났습니다.
올해 대기업이 밝힌 공채 모집 계획은 지난해 조사보다 8.1%포인트 줄었고 수시 채용 계획은 9.8%포인트 늘었다고 합니다. 현대차의 공채 폐지 선언은 대기업도 이제 제 손을 놓겠다는 신호로 해석됩니다. 당장 삼성·SK·LG 등 다른 대기업들은 상반기 채용을 예정대로 하지만, 이후 현대차의 선택에 영향받을 수 있습니다. 4대 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그룹 공채’를 하는 SK도 이미 상시 채용과 공개 채용 비율이 7 대 3으로 제 영향력은 미미합니다.
그런데 대기업들이 그동안 저를 쉽게 놓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대기업들의 채용 규모는 정부 일자리 정책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과거 정부에서는 (정부로부터 언질을 받은) 대관 쪽에서 채용 규모를 늘려달라는 푸시(압박)가 강했다. 매년 전년보다 채용 규모나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고 털어놓습니다. 대기업 채용을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합니다. 정기 공채 때마다 10만 명이 지원하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이 크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저를 놓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저신뢰 사회, 최소한의 공정성“나 같은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나요?” 유병재의 말은 취준생 사이에서 여전히 입에 오르내린다. tvN 《SNL 코리아》 화면 갈무리
또 저와 이별할 경우 채용 규모 위축, 채용 과정의 공정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와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당장 취업준비생(취준생)들은 “채용 규모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직무 분야로 뽑게 되면 스펙을 다시 쌓아야 하는데 결국 중고 신입(다른 회사를 다닌 구직자들)들이 유리하다”고 우려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방송인 유병재씨가 TV 프로그램 콩트에서 “아니, 무슨 다 경력직만 뽑으면 나 같은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나?”라고 한 것이 여전히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채용 시장 변화에 따른 취준생들의 불안이 반영돼 있습니다. 현재 취업시장에서 대졸자들과 다른 회사를 2~3년 다닌 중고 신입들의 경계가 흐려진 지 오래입니다.
취준생 최아무개(27)씨는 “기업에서 자꾸 경험을 요구하는데, 일반적인 취준생들은 인턴 경험 말고 직무 경험을 하는 게 쉽지 않아 답답하다”고 합니다. 대기업 취업을 준비 중인 정아무개(25)씨는 “공채만 기다려온 사람들에게는 손해가 될 수밖에 없다. 또 상시 채용을 낼 수도 있고 안 낼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걱정합니다. 기존 전형인 현대자동차인적성검사(HMAT)가 폐지되고 현업 부서가 목소리를 낼 경우 학연·혈연 등이 영향을 끼칠 여지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옵니다.
2014년 삼성전자는 저를 대체하기 위해 ‘대학 총장 추천제’를 도입하려다 대학 서열화와 지역 차별 논란에 휩싸이며 유보한 선례도 있습니다. ‘채용 비리’가 수시로 불거지는 등 ‘저신뢰 사회’에서 시험을 통과하면 합격할 수 있는 제가 최소한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흙수저’들에게는 시험을 통해 그나마 좋은 일자리로 진입하는 관문이 될 수도 있죠. 현대차 관계자는 “채용 규모는 지난해 수준(8천여 명)에서 줄지 않을 것이다. 또 현업 부서에서 채용을 주도하더라도 인사 부서에서 최종 검증을 한다”고 취준생들의 불안을 달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취준생들도 저를 예전처럼 간절한 눈빛으로 보진 않는 것 같습니다. CJ그룹 신입사원 입문 교육을 담당했던 임홍택씨가 쓴 책인 는 “90년대생들은 기존 세대와 다르게 기업의 종신고용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낮다. 반대로 기업에서 개인의 미래와 가치 상승에 대한 관심은 높다. 여기서 기존의 경직된 인사 제도에서 벗어나 회사와 개인의 필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인력을 운영할 필요가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인크루트가 2월19~20일 구직자 1144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해 2월22일 발표한 결과를 보면 현대차 신입 공채 폐지에 대해 찬성 50%(매우찬성 13%, 찬성에 가까움 37%), 반대 50%(매우 반대 12%, 반대에 가까움 38%)로 찬반이 팽팽하게 엇갈립니다. 구직자들의 찬성 이유는 ‘공채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구직대비를 할 수 있을 것’(36%) ‘연중 지원기회가 늘 것’(28%) ‘공채보다 채용전형이 짧아 빠른 취업이 가능해질 것’(17%), ‘경쟁률이 줄어들 것’(11%) 등의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대 이유로는 ‘채용규모 자체를 줄이겠다는 것’(41%) ‘수시모집이라 일정 파악, 구직 대비가 전보다 어려울 것’(29%) ‘수요가 있는 일부 직무에 대해서만 뽑을 것’(22%) 등이 나왔네요. 기타 답변으로 ‘채용의 공정성을 신뢰할 수 없음’, ‘중고신입들을 뽑지 그냥 신입은 입사하기 힘들 것’ 등도 나왔다고 합니다.
채용시장과 사회안전망 갖춰져야이직과 퇴사로 자기 꿈을 키우려는 취준생들에게 저는 거추장스러운 제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의 위인 가운데 역사적으로 재평가된 인물을 재조명하라’ 같은 주제로 역사 에세이를 쓰는 등 직무와 상관없는 시험을 보기 위해 불필요한 ‘스펙’을 쌓거나 공부해야 하는 취준생들을 보면 ‘웃프기도’ 하고요.
하지만 한국 사회와 제가 이별하기 위해서는 전제돼야 할 게 있습니다. 채용 제도의 공정성 확보는 물론이고,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다른 직업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채용시장과 사회안전망이 갖춰져야 합니다. ‘직무’와 ‘성과’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결국 모든 게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요.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한국 인력채용 방식의 특성분석 연구(한국산업인력공단, 2016)
한국 공채문화의 사적 전개 과정과 시대별 특성 비교분석에 관한 탐색적 연구(이종구·김홍유,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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