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환경연대가 8월24일 기자회견을 열어 ‘일회용 생리대 부작용 규명과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순결한 백합’을 뜻하는 ‘릴리안’ 생리대를 제조한 생활용품회사의 이름은 깨끗한나라(주)다. ‘화이트’ ‘순수한면’ ‘시크릿데이’(비밀의 날) ‘위스퍼’(은밀히 말하다) 등 생리대 이름은 유난히 깨끗함이나 순수함, 비밀스러움을 강조한다. 생리대 광고는 청순한 이미지의 20대 여성 모델을 내세운다.
하지만 정작 사회적으로 생리를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김연지(29·가명)씨는 “처음 생리대를 쓸 때 엄마가 ‘안 보이게 가지고 다니라’고 했다. 생리통 이야기를 할 때는 친구들끼리 목소리를 낮췄다. 산부인과에 갈 때도 수치스럽고 주위 시선이 신경 쓰였다”고 말했다. “월경에 대한 터부(금기)는 인류 문화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월경이라는 주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상황은 월경에 관한 정보의 양과 질에 영향을 주며 정보 접근성에도 영향을 준다.”(박이은실, )
정보 부족 속에 공포가 돈다그런데 은밀하게 속삭이던 낮은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급기야 분노로 터져나왔다. 생리대에서 유해 성분이 검출됐다는 의혹과 그로 인한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여성환경연대가 발표한 생리대 휘발성유기화합물(VOCs) 조사 결과 연구를 맡았던 김만구 강원대 교수(응용화학)가 8월 초 가장 많은 유해물질이 검출된 생리대로 ‘릴리안’의 실명을 공개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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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안’ 생리대로 피해를 입었다는 집단소송 신청자는 2만 명을 넘어섰다. “생리대를 쓸 때 항상 축축해 찝찝하고 건조했다”(곽나현·26), “생리대를 쓰지 않으니 앓던 질염이 나아졌다”(홍혜은·29) 등 구체적인 피해 사례도 잇따른다. 여성들은 면생리대 제작법, 해외 생리대 직구 방법 등을 공유하며 불안해하고 있다. 심지어 생리대를 태우면 나오는 검은 연기로 화학물질의 유해성 여부를 검증할 수 있다는 가짜뉴스까지 나돈다. 분노와 불안은 공포로 번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일회용 생리대와 생리컵 등의 전수조사 결과를 9월 발표할 예정이다.
여성학자 박이은실씨는 “여자들끼리 한자리에 모이면 생리대에 대한 공통된 불만을 호소한 경험이 한두 번쯤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생리대의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여성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여성환경단체 ‘지구를 위한 여성의 목소리’(WVE)는 2014년 미국 피앤지(P&G)사의 생리대 제품에서 휘발성유기화합물질이 검출됐음을 발표한 뒤 생리용품에 담긴 모든 성분을 공개하도록 의무화하는 법 제정 운동을 이끌고 있다. 프랑스 정부도 생리용품의 안전성 논란이 커지자 지난 5월 성분검사를 진행했다.
생리대 정보가 봇물처럼 쏟아져나온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문제는 이로 인해 혼란이 가중된다는 것이다. 생리대 독성물질 검출을 공개한 김만구 교수 연구팀을 둘러싼 의혹이 대표적이다. 다른 생리대 제품들에서도 휘발성유기화합물이 검출됐는데 김 교수 팀에서 ‘릴리안’ 이름만 공개한 것이 여성환경연대 운영위원으로 있는 유한킴벌리 임원의 영향 때문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유한킴벌리는 생리대 판매 1위 기업이다. 이에 대해 여성환경연대는 8월26일 “(유한킴벌리는) 생리대 유해물질 검출 실험과 공개 여부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으며, 실험에 기업 후원도 받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안전성 공론화 시급한 여성용품8월3일 김만구 교수 팀이 발표한 연구의 신뢰도도 도마 위에 올랐다. 식약처는 전문가 8명이 참여한 ‘생리대 안전 검증위원회’를 열어 여성환경연대와 김 교수 연구팀의 조사를 검토한 결과 “상세한 시험 방법 및 내용이 없고 연구자 간 상호 객관성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아 과학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8월30일 발표했다. “생리대 접착제로 주로 사용되는 스틸렌부타디엔공중합체(SBC)는 발암물질로 분류할 수 없는 성분”이라고도 지적했다. 대한의사협회도 8월31일 “내부 간담회를 거친 결과 휘발성유기화합물로 인한 인체 유해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생리대의 유해성 여부를 단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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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전문가는 “김만구 교수 연구팀이 생리대 24개를 8개씩 나눠 하나의 시료로 만들어서 실험했다고 했다. 그런데 표본이 너무 적고 같은 팩에 들어 있던 생리대를 썼는데도 오차 범위가 평균값보다 7배 이상 된다. (이 점을 고려하면) 연구 결과를 신뢰하기 어렵다. 안전성에 대한 이슈 제기는 좋지만, 불필요한 공포를 일으키는 것은 사회적 비용 낭비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만구 교수는 8월31일 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지구를 위한 여성의 목소리’ 실험법을 참고해 생리대 착용 뒤 공기가 통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해 실험 환경을 설계했다. 미량의 개별 휘발성유기화합물을 질량분석기로 측정할 때 양이 적을수록 오차가 커지는데 분석화학적으로 허용된 범위다”라며 식약처 발표 내용을 반박했다.
이같은 혼란과 혼돈은 생리 문제에 대한 정보 접근성이 떨어지는 현실을 보여주는 증거다. 생리대를 포함한 여성위생용품의 안전성 문제는 그동안 한 번도 공론화된 적이 없다. 유아용 기저귀와 생리대만 비교해봐도 기저귀에는 잔류 농약 함량이 ‘0.5mg/kg 이하’라는 기준이 있지만, 생리대에는 이런 제한이 없다. 환경부의 환경표지 인증에도 기저귀는 포함되지만 생리대는 포함되지 않는다. 여성환경연대는 “이번 사태를 여성위생용품 속 유해물질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위생용품에는 생리대뿐 아니라 여성청결제, 질세정제, 탈취제 등이 있다. 여성청결제는 2010년 기존 ‘의약외품’에서 ‘화장품’으로 분류 기준이 바뀌며 관련 시장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식약처의 까다로운 규제를 받던 의약외품과 달리 화장품은 간단한 신고만으로도 판매가 가능하다. 생리대처럼 안전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조현희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여성청결제는 여성의 음부를 보호해주는 상주균을 함께 죽일 수 있다. 청결제 등 화학물질을 사용해 씻어내는 것은 대부분 좋지 않다. 화학물질 침투를 유발하는 비데나 팬티라이너, 세정제 사용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 공중위생협회나 국립환경보건과학연구소도 질세정제의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생리를 왜 숨겨야 하나요생리대 광고에 등장하는 생리혈은 항상 ‘파란색’이다. 깨끗함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이다. 영국 여성용품 제조업체 ‘보디폼’은 2016년 생리대 광고에 처음 붉은 피를 등장시켰다. 광고 속 여성들은 뛰고, 등산하고, 발레를 하다 다쳐서 붉은 피를 흘린다. 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활동을 계속한다. 생리대는 깨끗하고 순수하지 않아도 괜찮다. 여성의 건강을 해치지 않고 안전한 게 먼저다. 은밀하지 않게 공개적으로 생리대 문제를 계속 공론화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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