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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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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재벌의 씨는 따로 있다?

외국 대기업에선 가족 승계 찾기 힘들지만 국내 10대 그룹 중 9곳에서 3세 역할 커지고 있어…

리더십·능력 검증되지 않은 채 넘겨받으면 기업의 불확실성 높여
등록 2014-05-29 16:58 수정 2020-05-03 04:27

“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니. 왕씨는 500년씩이나 해처먹은 임금질을 내는 하면 아니 되는 거니.”
이성계가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에서 이성계는 ‘역성혁명은 안 된다’는 정몽주의 만류에 “내 더 잘하고, 내야말로 백성을 더 잘 보살피겠다는데 네가 뭔데 안 된다는 거냐”고 대꾸했다.
이성계 같은 이는 한국 대기업 집단(재벌) 내에는 없다. 한국 재벌 총수는 극히 적은 지분을 가지고도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리고 경영하지만 도전을 받지 않는다.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때도 주주나 임직원 가운데 반론을 펼치는 이를 찾기 힘들다. 재벌그룹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후계자들의 경쟁은 사라지고, 자녀들이 독점 상속하는 장면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지고 있다. 익숙한 ‘3세 경영 시대’의 도래는 어쩌면 활기를 잃고 있는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불안 요소인지 모른다.
‘재벌 3세 경영 시대’를 둘러싼 논의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5월10일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부쩍 활발해지고 있다. ‘포스트 이건희’ 시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 회장의 세 자녀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사장 등 총수 일가 3세의 행보를 지켜보는 눈도 더욱 늘어났다. 국내 재벌 가운데 1위(자산 기준)인 삼성그룹의 승계 과정은 국내 재벌들이 어떻게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세습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재벌 3세 시대는 이미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 재벌 역사는 해방 전후 창업주가 기업을 일으킨 데서 시작했다. 창업주 밑에서 함께 일한 2세는 정부 주도 개발경제 속에서 기업을 키워내고 그룹을 물려받았다. 창업 뒤 수십 년이 흐르면서 이제 3세들이 재벌그룹을 이어받을 시기가 된 것이다.

이재용, 정의선, 정기선, 김동관…

대표적인 주자로는 삼성그룹의 이재용 부회장 남매를 비롯해 현대자동차그룹의 정의선 부회장이 있다. 정의선 부회장의 사촌동생인 현대중공업그룹의 정기선씨는 지난해 수석부장으로 회사에 들어왔다. 한화그룹도 김승연 회장이 감옥에 다녀온 뒤 아들 김동관 한화큐셀 마케팅실장의 이름이 부쩍 언론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10대 그룹 가운데 재벌이 아닌 포스코를 제외한 9곳 대부분에서 3세의 역할이 커지고 있는 상태다.
반면 외국 대기업에선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게 일반적이지 않다. 미국 경제지 이 올해 선정한 ‘세계의 존경받는 기업’ 10곳을 보면 가족 승계 기업을 찾기 힘들다. 구글과 아마존 등 창업한 지 얼마 안 된 정보기술(IT) 기업을 뺀 애플, 코카콜라, 월트디즈니, 페덱스, 제너럴일렉트릭(GE) 등 나머지 기업은 후계자를 가족 위주로 결정하지 않는다.

재벌그룹을 이어받을 3세 경영인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부회장, 정기선 현대중공업경영기획팀 수석부장. 김동관 한화큐셀 마케팅실장, 박세창 금호타이어 부사장(왼쪽부터). 한겨레 자료

재벌그룹을 이어받을 3세 경영인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부회장, 정기선 현대중공업경영기획팀 수석부장. 김동관 한화큐셀 마케팅실장, 박세창 금호타이어 부사장(왼쪽부터). 한겨레 자료

지난해 한국을 찾은 제프리 이멀트 GE 회장에게 ‘가족이 경영권을 승계하는 기업 대물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당시 이멀트 회장은 “GE 안에서 절대 제 가족은 후임자가 아니다”라며 웃었다. 이멀트 회장은 차기 경영자가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해 “GE 같은 큰 기업을 이끌려면 글로벌한 스케일이 필요하고 강력한 기술 수준도 필요하다. 소비자가 가진 관심 사항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채용할 때 지식을 보는 게 아니라 앞으로 학습할 가능성을 본다”고 소개했다.

이처럼 경영권을 물려받을 후계자의 그림이 명확한 것은 오래전부터 최고경영자(CEO) 후보군을 정해 준비시키는 GE의 경영 방침 때문이다. GE는 오랜 기간 CEO 후보군을 경쟁시켜 최적의 경영자를 찾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멀트 회장도 1982년 GE에 입사한 뒤 치열한 경쟁을 뚫고 2001년 회장 겸 CEO로 취임했다.

27살 입사, 34살 등기이사, 42살 사장

물론 서구 기업이라고 해서 가족경영 기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인사조직 컨설팅회사인 헤이그룹의 이승은 이사는 “한 연구에 의하면 미국 내 S&P 500에 속한 기업 가운데 3분의 1 정도의 기업이 가족경영에 의한 기업(family owned business)이고, 이들은 경쟁 업체에 비해 우수한 성과와 이익, 낮은 이직률을 보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서구의 많은 가족경영 기업도 가족 내에서 승계를 시도하지만 실패로 끝난 경우가 많다. “한국보다 승계 계획을 체계적으로 준비한다는 미국·유럽 등 서구 기업들도 가족 내 후계자 선정 및 준비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고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이재용 부회장 등 재벌 3세가 경영권을 승계하는 게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어떤 조건 속에서 승계하는가를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단순히 창업자의 후손이 승계하는 것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지분 비율 이상의 권리를 주식회사에서 행사하는 것과 후계자의 비전과 리더십이 승인받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면 국내 재벌 3세들은 이런 물음에 답할 준비가 돼 있을까? 일단 재벌 3세가 대기업에 입사해 승계 과정에 들어가는 과정은 대체로 비슷하다. 외국 명문 대학과 경영학석사(MBA) 등을 거친 뒤 컨설팅 업계에서 경력을 쌓고 아버지 회사에 부장급으로 입성한다. 화려한 이력을 통해 고속 승진에 대한 일반 직원들의 거부감을 없애는 것이다. 컨설팅 업체에서 일하다 현재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이아무개(34)씨는 “컨설팅 업계에서는 좋은 집안 자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능력보다 이들을 통해 아버지 기업의 일감을 따오거나 나중에 고객으로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컨설팅 업체의 의도가 깔려 있다”고 말했다.

3세들은 이른바 ‘경영수업’도 일찌감치 받는다. 기업의 핵심 부서 등에 배치된 뒤 2~3년 만에 한 단계씩 점프하는 초고속 승진을 이어간다. 경제개혁연구소가 2012년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국내 20대 그룹 2~3세들의 평균 입사 연령은 27살이다. 이들은 입사 뒤 7년 만인 34살에 등기이사를 맡고 42살엔 사장 자리에 올랐다. 보통 30대 중반에 과장을 맡는 임직원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승은 이사나 김상조 소장이 지적한 것처럼, 국내 재벌 3세들이 철저한 준비를 하거나 비전을 내놓을 만한 능력을 검증받고 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국내 재벌 문화에서 이들에게 경영에 필요한 역량을 철저하게 체계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경영학자나 경영컨설턴트 사이에서 의문이 많이 제기된다. 10대 그룹에 다니는 한 회사원은 “총수 아들보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도 아들에게 더 깍듯하게 대하는데 뭘 잘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2세 경영, 30대 재벌 중 16개 부도

대기업을 키워낸 경영 능력이 유전되는 것도 아니다. 예종석 한양대 교수(경영학)는 “기업에서 말하는 경영수업이 대기업을 경영할 만한 능력을 갖추는 데 유용한지 모르겠다. 포드(미국의 자동차 회사)처럼 2세가 경영을 이어받았다가 실패한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경영에는 이른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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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는 재벌 총수가 창업자에서 2세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한 차례 심한 홍역을 앓은 경험이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수많은 재벌이 무너졌다. 쌍용(김석원), 동아(최원석), 삼미(김현철), 신동아(최순영), 쌍방울(이의철), 한보(정보근), 새한(이재관) 등 당시 기준 30대 재벌 가운데 16개가 부도났다. 김상조 소장은 “2세는 공통적으로 아버지가 하지 않은 것을 성공시키고 싶어 하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무리한 사업 확장을 했고, 그 결과는 외환위기 때 드러났다”고 했다.

다행히 외환위기에서 살아남은 재벌은 덩치를 키우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삼성의 경우가 그랬다. 이건희 회장은 외환위기 전 자동차·영화 등 문화 콘텐츠에 도전했지만 실패를 맛봤다. 하지만 외환위기 속에서 살아남은 삼성은 아버지 고 이병철 회장이 시작한 삼성전자의 매출액이 1997년 18조원에서 2013년 228조원으로 확대되면서 굴지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외환위기 뒤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고, 정몽구 회장의 국외 진출 전략이 성공하면서 세계 판매량 5위의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럼 재벌 3세는 이런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처럼 ‘성공’을 내세운 리더십을 갖추기란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가 예전처럼 무역장벽을 통해 국내에서 기업이 성공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줄 수도 없다. 기업 간 경쟁 무대도 전세계로 확대됐다. 내수 시장은 이미 성숙해 있어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 이상 매출을 급속도로 끌어올리기도 힘들다.

더구나 검증 안 된 CEO의 등장은 기업의 가장 큰 적인 불확실성을 높인다. 예종석 교수는 “결과론적으로 보면 지금 재벌은 덩치가 커지고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창업주 때나 2세 때는 독점이든 정경유착이든 운이 좋아 기업을 키운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다르다. 그러나 이를 지켜본 재벌 3세가 그룹 경영권을 맡는 것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엄청난 부담을 느껴야 한다”고 지적했다.

2세의 독점·정경유착 보고 자란 3세들

이승은 이사도 “가족경영 기업이 동종 업계 내에서 더 많은 수익률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은 단기적인 성과보다 회사의 생존에 더 초점을 맞추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기업이 가진 숙제와 동일하게, 가족경영 기업도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그리고 이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후계자를 키워내느냐에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다”고 전망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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