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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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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문제는 ‘세계경제’야!

신흥시장 불안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존 세계경제의 레짐이 근본적으로 와해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착시현상
등록 2014-02-13 15:06 수정 2020-05-03 04:27
연초부터 일부 신흥국에서 불거진 금융위기의 바람이 국제 금융시장에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경제의 기초체력이 취약한 몇몇 나라들이 위기의 주범으로 꼽히는 중이다. 이에 대해 현재의 신흥시장 불안정은 단지 신흥시장만의 원죄나 취약국의 개별 리스크로 평가절하할 수 없으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존 세계경제의 레짐(Regime)이 근본적으로 와해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착시현상이라는 내용의 글을 소개한다. _편집자

세계경제의 선순환에 대한 기대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해 들어 국제 금융시장이 또다시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이다. 타이와 터키 등 세계경제의 ‘주변부’에서 시작된 정치 불안이 어느새 ‘신흥시장 불안’이라는 단골 메뉴로 모습을 바꿔 국제 금융시장, 나아가 세계경제 향방의 복병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5~6월, 역시 신흥시장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한 차례 대대적인 충격을 경험한 지 불과 6개월 만의 일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두 가지 악순환

때마침 ‘세계의 돈줄’인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지난 1월 말 추가로 양적완화 규모를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바라보는 시장의 분위기는 지난해 말 연준이 처음으로 양적완화 축소의 길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자신감이 가득하던 것과는 딴판이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내심 신흥시장 불안을 빌미로 연준이 양적완화 축소를 자제하지 않을까 기대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세계경제의 새로운 기둥’ 중국도 흔들리고 있다. 얼마 전 중국의 한 신탁회사가 부도 위기에 내몰리면서 이른바 ‘그림자금융’의 위험이 부각되기 시작한데다, 한동안 순풍을 타던 경기회복세마저 최근 다시 주춤해진 탓이다.

이런 가운데 대외 자금 조달이나 수출 의존도가 높고 대내적으로 펀더멘털이 취약한 신흥시장을 중심으로 자금 이탈이 확산되면서 관련 시장의 주가나 환율, 금리가 요동치고 있다. 특히 그동안은 신흥시장 불안이 일부 취약국에만 집중되는 모습이었으나, 점차 미국과 중국 등 세계경제의 G2에서 몰아친 역풍과 한데 맞물리면서 글로벌 차원의 광범위한 불안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실제 신흥시장 불안이 재부각되던 1월 중순만 해도 미국 증시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기도 했으나, 이마저도 최근 급격한 조정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대외 교역이나 자금 흐름 측면에서 신흥시장 의존도가 커지고 있는 한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신흥시장이 이제 국제 금융위기의 새로운 진원지로 자리매김하는 것일까? 본래 신흥시장은 원죄 의식이 강한 곳이다. 국제 기축통화를 발행하지 못하는 탓에, 세계경제의 번영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달러화 등의 경화를 벌어들이거나 빌려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세상이 뒤숭숭할 때면 대부분 ‘내 탓이오’라는 자괴감에 빠지기 쉽다. 물론 1980~90년대 신흥시장의 거듭된 위기처럼, 무분별한 해외 차입이나 각종 포퓰리즘으로 얼룩진 경제 체질 등 내부의 구조적 취약성이 치명적 질병으로 드러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제로는 미국의 대규모 금리 인상이나 국제 자금 흐름의 역진적 재조정 등 외부 환경의 악화와 맞물린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의 신흥시장 불안 역시 자체 펀더멘털의 취약성이나 정치 불안 등의 탓으로만 돌리긴 힘들다. 오히려 그 근저에서 작동하는 세계경제의 흐름 변화, 혹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내재적 취약성에 눈길을 돌릴 필요성이 더 커 보인다. 일단 이와 관련해 오늘날 세계경제가 재화와 서비스의 교역 선순환, 또 자금 흐름의 선순환에서 벗어나, 위기의 확산 및 전파라는 악순환에 빠진 것은 아닌지 곰곰이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실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충격→후유증→재조정’으로 이어지는 두 가지의 악순환 경로가 확인된다.

뉴노멀 세계경제의 ‘카나리아’

우선 위기의 작동 과정에서 드러난 경로인데, 2007~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발 금융위기가 자금 흐름의 직접적 연계로 인해 대서양 건너 유럽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고, 이어 2008~2009년에는 유럽의 자금 회수 여파로 동유럽 신흥시장, 특히 한국에서도 광범위한 유동성 경색을 초래했다. 두 번째보다 큰 악순환은 위기 이후의 지지부진한 회복세를 포괄하는 경로다. 2007~2009년 미국에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2010~2012년 위기 대응 과정에서 유럽의 재정위기로 넘어가더니, 지난해부터는 반복적인 신흥시장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언제나 위기 충격의 재조정 과정에서는 신흥시장이 주요 타깃이 되고 있다.

이처럼 악순환의 반복은 오늘날 세계경제가 직면한 근본적인 취약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지금의 신흥시장 불안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른바 ‘정상화’보다는 ‘뉴노멀’(New Normal·새로운 정상)을 좇고 있는 세계경제의 취약 고리, 다시 말해 기성 경제 레짐(Regime)의 와해를 배경으로 한 ‘탄광의 카나리아’일 뿐이다. 신흥시장 불안을 단순히 신흥시장의 원죄나 취약국의 개별 리스크로 평가절하해선 안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신흥시장 불안의 진짜 동인은 세계경제의 ‘장기정체’(Secular Stagnation) 위험이다. 얼마 전 국제통화기금(IMF) 콘퍼런스에서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이 제시했던 장기정체 테마는 이미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부터 세계경제가 성장의 근본적인 한계, 즉 만성적 수요 결핍이라는 제약에 직면했다는 논리다. 유일한 의존처는 중앙은행의 대규모 유동성 공급이었으나, 부동산 거품의 붕괴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로 제1막이 끝났다. 지금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중앙은행의 유동성 투입에 의존한 자산가격 회복 혹은 거품 전략이 선진국, 또 신흥경제의 경제성장을 지탱해온 것이다. 하지만 연준의 출구전략이 단계적으로 추진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유동성 주도의 성장이 과연 얼마나 지속 가능할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신흥시장 불안이 점차 글로벌 불안으로 확산될 징후를 보이는 것도 이런 연유다. 최근 미국의 경기 재둔화 우려나 중국의 자금시장 경색 조짐은 이처럼 근저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계기로 평가된다. 이런 가운데, 한동안 국내외 금융시장에서 각광받던 테마, 즉 신흥국에서 선진국으로, 채권 등 안전자산에서 주식 등 위험자산으로 국제 자금 흐름의 체계적인 선순환을 뜻하는 ‘글로벌 로테이션’ 기대도 퇴색되고 있다. 나아가 요즘 중국은 신흥경제나 세계경제의 ‘안전판’보다는 차라리 ‘지뢰밭’에 가까울 정도로 온갖 불확실성이 넘쳐나고 있다.

연초만 해도 세계경제는 이제야 선순환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기대로 충만해 있었다. 유럽 재정위기는 물론 미국의 국가채무 불안, 나아가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 등 각종 악재를 딛고 선진 경제를 중심으로 세계경제가 그야말로 정상화의 길에 들어설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지난해 봄 세상을 들쑤셨던 신흥시장 불안도 우려와 달리 치명적인 상흔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저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고름을 제거하는 정도였다고 할까?

장기정체 위험에 주의 기울여야

새해 벽두부터 다시 몰아친 신흥시장 불안은 이러한 안도감에 진지한 현실 검증을 요구하고 있다. 어쩌면 최근 관심을 끌었던 선진 경제의 부활보다 지금의 신흥시장 불안이 세계경제의 뉴노멀에 더 부합하는 진짜 얼굴인지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2012년 이후 선진국 증시에 뒤처져온 신흥국 증시의 회복보다는 최근처럼 선진국 증시의 하향 조정이 더 일관된 수렴의 방향이 아닌지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 고용 및 수요 부양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연준 의장의 취임도 출구전략이라는 전대미문의 과제에 직면해 연착륙을 자신하기 힘들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지난해 신흥시장 불안이 정말 느닷없는 충격이었다면 이번은 이미 익히 알려진 재료들이며 신흥국 간에, 위기국과 우량국 간에 차별화의 여지도 꾸준히 쌓여온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만 신흥시장 불안에 접근하는 것은 일종의 근시안 혹은 착시가 아닐까? 오히려 그 근저에 도사린 세계경제의 불확실성 지속, 특히 장기정체 위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지난해 신흥시장 불안을 통과하면서 이른바 차별화 테마가 주목받았던 우리나라 역시 이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장기 저성장의 위험은 우리에게도 이미 긴박한 현안이기 때문이다.

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경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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