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이병철 선대 회장이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 효시다. 한국 재계 1위의 거대 재벌로 성장한 74년의 역사 동안 빛나는 영광의 순간과 함께 수많은 위기도 겪었다. 1987년 이병철 회장이 죽기 이전의 최대 위기는 1966년 계열사인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꼽힌다. 이병철 회장은 일시적인 경영 퇴진과 함께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했다.
삼성 특검, 다시 최대 위기 ‘뇌관’으로
아들인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이후에는 2007년 10월 김용철 전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의 양심선언으로 시작된 비자금 사건이 최대 위기였다. 삼성 특검 수사를 통해 4조원이 넘는 삼성생명과 삼성전자의 차명주식(이하 차명주식)이 드러나고 이 회장이 아들·딸의 경영권 불법 승계 과정에 개입한 혐의도 밝혀졌다. 결국 이건희 회장은 국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경영 퇴진 선언을 해야 했다.
하지만 삼성 특검은 사실상 삼성을 최대 수혜자로 만드는 모순된 결과를 낳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차명주식이 모두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재산이라는 이건희 회장의 주장을 특검이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이 회장은 차명주식을 세금 부담 없이 자신의 명의로 바꾸었다. 또 경영권 불법 세습 논란이 법적으로 마무리돼,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등 자녀들의 3세 승계 작업도 본격화할 수 있게 됐다. 불법 비자금 조성과 정·관계 로비 의혹도 모두 무혐의 처리됐다. 한마디로 앓던 이가 모두 빠져버린 격이다. 이건희 회장도 2년 만에 경영에 복귀했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2012년 2월14일. 삼성가의 장남인 이맹희(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부친)씨는 동생인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상속재산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부친인 이병철 선대 회장이 물려준 차명주식 중에서 자신의 몫을 돌려달라는 요구다. 뒤이어 이 선대 회장의 차녀인 이숙희(구자학 아워홈 회장 부인)씨도 동생을 상대로 같은 소송을 제기했다. 이 회장은 이를 계기로 수조원이 넘는 천문학적 규모의 세금이 부과될 처지에 놓였다. 소송 결과에 따라서는 지배구조가 급변하며 삼성의 경영권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위기 상황이다. 이 회장에게 전화위복이 됐던 삼성 특검이 다시 최대 위기의 ‘뇌관’으로 돌변하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건희 회장에 대한 세금 부과 가능성은 두 갈래로 제기된다. 첫째는 과세 당국인 국세청이다. 이맹희씨의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화우 관계자는 “국세청이 지난해 이맹희씨 등에게 ‘이병철 회장의 차명재산이 2008년 12월 이건희 회장 명의로 넘어갔는데 상속인들이 지분을 포기하고 이 회장에게 증여한 것이냐’는 취지의 공문을 보냈다”고 말했다. 만약 상속인들이 이건희 회장에게 차명주식을 증여한 것이면 증여세를 물리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건희 회장은 차명주식의 상속권은 25년 전에 이미 정리가 끝났고, 과세 시효가 지나 세금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이 회장은 지난해 6월 이맹희씨의 아들인 이재현 CJ 회장 등에게 ‘선대 회장의 재산은 상속 당시 분할이 결정됐고, 모든 상속인은 다른 상속재산에 대해 어떤 이의도 없다’는 내용의 문서를 보내 “이 문서에 서명 날인해 서울지방국세청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화우 관계자는 “국세청이 이건희 회장에게 2조원 정도의 증여세를 부과하려고 하니까, 삼성 쪽에서 1987년 이병철 회장이 사망한 뒤에 형제들끼리 차명주식은 이 회장에게 주기로 합의했다는 확인서를 쓰라고 요구한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세금을 안 내도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건희 증여세, 국세청의 선택은?삼성의 희망사항은 이맹희씨 등의 소송 제기로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 차명주식에 대한 선대 회장의 유서가 존재하지 않고, 이 회장 형제 간에도 상속재산 분할협의가 없었음이 드러나, 다른 형제들 몫의 차명주식까지 자신의 명의로 전환한 이 회장은 증여세 부담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게 됐다. 화우 관계자는 “이맹희씨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가지도 못했고, 이숙희씨는 유산을 한 푼도 받지 못했는데 무슨 합의가 있었겠느냐”며 “있지도 않은 내용의 합의서를 쓰라는 것은 거짓 행위”라고 말했다. 만약 이맹희씨와 이숙희씨가 소송에서 이길 경우 이건희 회장이 형제들에게 증여받는 주식이 축소돼 증여세도 줄어들 수 있다. 대신 차명재산을 물려받게 되는 이맹희씨 등은 상속세를 내게 될 가능성이 있다.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의원실 쪽에서는 이와 별도로 ‘명의신탁 증여의제’에 따른 증여세 부과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의원은 3월1일 “이건희 회장이 이맹희씨 등 형제들 소유의 삼성생명 주식을 자신의 명의로 바꾼 것은 상속증여세법상 ‘명의신탁 증여의제’에 해당돼 증여세 부과 대상이 된다”고 주장했다. 명의신탁 증여의제(상속증여세법 45조의 2)는 명의신탁이 이루어지면 실질적 증여 여부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증여로 간주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뜻한다. 실제 소유자(이맹희·이숙희)와 명의자(이건희)가 다른 경우에는 명의자로 등기(주식 명의개서)를 하면 실제 소유자로부터 증여받은 것으로 봐서 과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원실의 이상민 보좌관은 “이맹희씨 등이 이건희 회장에게 차명주식을 실제로 증여했는지와 상관없이 증여의제로 과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캐스팅보트 쥔 신세계 이명희
지금까지 밝혀진 삼성생명 차명주식은 모두 968만여 주(지분율 51.75%)로,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이 회장이 1998년 12월 임직원 명의의 차명주식을 주당 9천원에 사들이는 형식으로 명의 변경한 299만여 주다. 둘째는 같은 시기 에버랜드가 임직원들에게 같은 가격으로 사들인 344만여 주다. 마지막은 2008년 12월 이 회장이 특검에서 밝혀진 차명주식을 명의 변경한 324만여 주다. 이정희 의원 쪽은 삼성생명 주식 가치를 주당 70만원씩(1999년 삼성자동차 채권단의 손실보전을 위해 채권단에 출연했을 당시 평가액)으로 계산하면 증여세가 2조3천억원(가산세 20% 포함)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 회장이 자기 명의로 바꾼 삼성전자 차명주식 225만여 주(보통주 기준 지분율 1.52%)까지 포함할 경우 증여세는 더 늘어나게 된다. 국세청은 이 회장에 대한 과세 가능성 관련 질문에 “개별과세 정보는 밝힐 수 없다”는 답변만 내놓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소송 결과에 따라서는 단순한 재산상의 손실 차원을 넘어 삼성의 경영권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이맹희씨는 에버랜드가 매입한 차명주식 344만여 주와 관련해서는 일단 100주만 돌려달라고 청구했다. 화우 관계자는 “재판이 진행되면 에버랜드가 갖고 있는 삼성생명 주식에 대해서도 정확한 상속 비율에 따라 청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맹희씨 등이 소송에 이겨 에버랜드가 삼성생명 주식을 내놓게 되면 삼성의 지배구조가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 삼성의 지배구조는 ‘이건희 회장의 자녀들→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다른 삼성 계열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맹희씨가 승소하면 에버랜드의 삼성생명 지분은 19.34%에서 2.11%로 줄어든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도 20.76%에서 10.56%로 줄어든다. 삼성문화재단·삼성전기 등의 계열사 우호지분(10.99%)을 모두 합치면 친이건희 지분은 23.66%가 된다. 반면 이맹희씨는 8.5%, 이창희·순희씨는 각각 6.02%, 이인희·숙희·명희씨는 각각 2.3%를 갖게 된다. 외관상 경영권 위협이 안 될 것처럼 보이지만 CJ그룹과 신세계그룹이 기존에 갖고 있는 삼성생명 지분 3.5%와 11.07%가 복병이다. 결국 이맹희씨 등 CJ그룹은 12%, 이명희 회장 등 신세계그룹은 13.37%의 삼성생명 지분을 갖게 된다.
이맹희씨의 소송 제기 직후 삼성 쪽은 “나머지 형제들은 (이건희 회장의 상속권을 인정하고 소송을 걸지 않는 것으로) 깨끗이 정리됐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숙희씨의 추가 소송으로 그것은 삼성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게 드러났다. 삼성가 상속권자는 모두 7명이다(넷째딸인 이덕희씨는 대상이 아님). 이맹희씨와 이숙희씨는 이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이인희(첫째딸) 한솔그룹 고문과 이순희(셋째딸)씨는 소송 불참을 선언했다. 이창희(차남) 전 새한미디어 회장의 유족들은 이건희 회장과 관계가 좋지 않아 소송 참여 가능성이 높다는 게 재계의 관측이다. 이명희(다섯째딸) 신세계 회장의 태도는 유동적이다. 신세계 관계자는 “우리는 소송의 당사자가 아니고, 그럴 생각도 전혀 없다”며 소송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신세계는 차명주식에 대한 상속권을 포기하는 확인서에 서명했는지는 “말할 수 없다”며 답을 피했다. 사태를 관망하며 향후 태도를 정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결국 친이건희 세력과 친이맹희 세력이 3 대 3으로 팽팽한 가운데, 이명희 회장은 유보적인 셈이다. 이 구도로 보면 친이건희 진영의 삼성생명 지분은 31.98%이고, 친이맹희 진영은 20.32%가 된다. 결국 이명희 회장이 삼성 전체의 경영권 판도를 결정하는 캐스팅보트를 쥐게된다. 만약 이명희 회장이 큰오빠인 이맹희씨 편에 서면 대권의 향방이 뒤바뀐다. 이맹희씨로서는 25년 전 부친에 의해 부정당한 장자 승계권을 되찾을 수도 있게 되는 셈이다.
베스트가 워스트로?또 다른 뇌관은 이건희 회장이 자신의 명의로 전환한 삼성전자 차명주식 225만 주다. 현 시가(주당 120만원)를 기준으로 무려 2조7천억원어치에 달한다. 이맹희씨는 일단 20주만 돌려달라고 청구했지만 향후 재판 과정에서 상속 비율에 맞춰 바뀔 것이다. 이맹희씨가 승소하면 이건희 회장은 이 지분의 82%를 형제들에게 내놔야 한다. 하지만 삼성으로서는 이런 재산상의 손실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무덤 속에 들어갔던 비자금 의혹의 유령이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범삼성가 관계자는 “삼성생명 차명주식 중에도 상속재산이 아니라 이병철 회장 사후 증자 과정에서 차명으로 관리된 부분이 있다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처럼 삼성전자 차명주식에 대해서도 같은 의혹이 있다”고 말했다. 만약 재판 과정에서 비자금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 삼성으로서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셈이다.
삼성과 이건희 회장은 이번 사태로 이미지에 큰 상처를 입게 됐다. 소송 전망도 유리하지 않다. 소송 당사자인 삼성이나 이맹희씨 쪽(법무법인 화우)은 서로 승리를 자신한다. 소송에 불참해 독립적 위치에 있는 범삼성가의 관계자는 “이맹희씨 쪽에 승소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니냐”고 말했다. 총선·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 재벌 개혁 기운이 한껏 고조되고 있는 주변 환경도 삼성에 유리할 게 없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처럼 법원에서 친삼성 판결을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마지막 희망은 이맹희씨 등의 소송 취하 가능성이다. 쌍방이 이면합의를 통해 대가를 따로 챙기기로 하고, 삼성이 바라는 확인서를 써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맹희씨 쪽에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일축한다. 이맹희씨는 주위에 “(이번 소송과 관련해) 삼성에 매수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건의 발단은 차명재산이 상속재산이라는 이건희 회장과 삼성 구조본의 주장이었다. 삼성 특검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 회장이 차명재산을 독식해 세금도 안 내는 최선의 방안(베스트)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4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는 자칫 최악의 방안(워스트)이 될 수 있는 위기에 처했다. 이건희 회장이 자기 꾀에 넘어간 것일까?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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