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준비된 이어달리기를 보는 듯하다.
계주의 생명은 호흡과 리듬이다. 리듬을 놓치면 자칫 바통을 놓친다. 준비가 그만큼 중요하다. 최근 잇따라 ‘감세 철회 반대’ 의견을 내는 경제단체들은 마치 여러 번 ‘발을 맞춘’ 계주팀을 떠올리게 한다. 경제단체들의 최근 발언은 하나같이 수위가 높았다. 정치 현안에 대해 보통 침묵하는 경제단체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자 여론의 주목도 받았다. 특히 경제단체들이 나흘동안 서로 겹치지도 않고 번갈아가며 무대에 오르면서 리듬감 있는 점강효과를 낳았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재계, “최근 정치권의 포퓰리즘성 행태”</font></font>첫 번째 주자는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이었다. 그는 지난 6월21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일부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감세 철회 움직임에 반대한다”고 분명한 의견을 밝혔다. 한나라당은 앞선 6월16일 의원총회를 통해 법인세·소득세 추가 감세 철회를 당론으로 확정했다. 재계를 대표하는 전경련 회장이 집권 여당의 당론에 대놓고 맞서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뿐만 아니었다. 허 회장은 반값 등록금 문제에는 더욱 톤을 높였다. 그는 “반값 등록금과 같은 정책들은 면밀한 검토 없이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활자화하지 않았다면 귀를 의심할 만한 말이었다. 반값 등록금은 집권 여당의 공약이다. 특히 현직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지난 5월 당권을 쥔 뒤 “부자 정당의 오염을 씻겠다”며 제시한 핵심 정책이었다. 게다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정책을 발표하는 ‘핫’한 의제다. 허 회장의 발언은 정치권 전반에 던지는 폭탄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는 “앞으로 선거를 앞두고 쏟아지고 있는 포퓰리즘성 정책에 대해서는 재계 의견을 제대로 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이 정도는 맛보기란 말이었다.
바통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이어받았다. 마침 6월2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한진중공업 노사 문제에 대한 청문회 개최를 결의했다. 경총은 바로 성명을 내고 “(국회가) 노사 문제에 개입하려는 불공정한 행보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그런데 하필 성명 안에는 이런 문장이 함께 담겼다. “정치권의 이번 결정은 최근 계속되고 있는 정치권 포퓰리즘적 행태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민간 영역에 대한 정치권의 무분별한 개입을 초래하는 선례가 될 것.” 정치권의 의제인 반값 등록금을 굳이 ‘최근 정치권의 포퓰리즘적 행태’로 묶어 비수를 한 번 더 던진 셈이었다.
세 번째 주자는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회장이었다. 대한상의가 낸 자료를 보면, 그는 6월23일 경북 구미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무상급식 실시와 대학 반값 등록금은 사회복지가 잘돼 있는 선진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드문 사례다. …상속세제와 같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고율의 과세는 기업인의 의욕을 저하시키고 조세기피 현상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무상급식과 반값 등록금, 감세 정책을 싸잡아 비판했다.
마지막 주자로는 허창수 회장이 다시 나섰다. 허 회장은 6월24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오늘날 중요한 정책결정에서 (정부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순수하고 분명한 원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경제부처 주무장관 앞에서도 그는 할 말을 분명히 했다. “경쟁국은 상법과 공정거래법 등을 경제원리에 맞게 신중하게 운용하고 있다. 반면 우리 내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3일 전 정계를 정면으로 비판한 데 이어, 이날은 정부에 대해 아예 면전에서 날을 세웠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섭섭할지 몰라도 발끈할 이유 없어</font></font>그는 국회의 출석 요구도 거부했다. 허 회장의 6월21일 발언이 언론을 타자, 국회는 대·중소기업 상생을 위한 공청회에 출석하라고 허 회장에 통보했다. 관례적 수준을 넘은 그의 발언의 ‘진의’를 듣겠다는 취지였다. 결국 국회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허 회장 쪽의 반응은? 불참 통보였다. 허 회장은 전경련 간부의 입을 빌려 “허 회장이 직접 참석하는 것보다 내부 전문가가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4일 동안 계속된 재계의 정부 비판 ‘릴레이’의 피날레였다.
재계가 이례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대기업들의 불편함이 있다. 최근 반값 등록금, 무상급식, 감세 철회 논의는 대기업들에 분명히 거슬리는 소재다. 대부분 세금 부담이 늘어나는 식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감세를 철회하면 바로 대기업의 세율 혜택이 사라진다. 반값 등록금, 무상급식 등 복지 정책도 대기업에 대한 세금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정치권에서 미래 복지 재정 수요를 충당코자 검토하는 안이 부유세, 법인세 최고세율 구간 신설, 사회복지세 등이다. 내용과 명목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대기업과 부유층을 대상으로 세금 부과액을 늘리는 안이다. 대기업의 불편한 심기는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의 말 속에도 녹아 있다. 그는 최근 복지제도에 대해 “국민과 기업의 세금 부담이 늘어나는 결과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물론 재계의 민감한 반응의 속내는 한 발짝 더 들어가볼 필요가 있다. 대기업들이 이해가 걸린 문제에 항상 이렇게 강하게 반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업들, 특히 대기업들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갈 정도로 아쉬운 상황도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반대다. 주요 대기업들은 지난 4년 동안 전반적인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호시절’을 보냈다.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시스템을 보면, 매출액 기준 상위 30대 기업의 매출은 2007년 404조5864억원에서 지난해 630조4963억원으로 불었다. 4년 사이 사업이 55.8% 확장했다. 영업이익도 2007년 30조7326억원에서 지난해 53조2591억원으로 73.3% 늘었다. 외형 성장뿐만 아니라 내실도 확실히 챙겼다는 말이다. 대기업의 눈부신 성장의 배경에는 정부의 기업친화적 경제정책이 있었다. 정부의 고환율, 감세, 저금리 정책 세트는 수출 중심 대기업의 약진을 돕는 확실한 도약대였다. 게다가 경제단체들이 문제 삼는 감세 정책 철회는 정확히 말하면 기업에 대한 부담이 늘리는 것이 아니다. 2012년으로 예정된 감세 계획을 취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래의 세금 혜택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대기업 처지에서는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받기로 한 게 취소된 것’이다. 섭섭할지는 몰라도, 발끈할 이유는 없다. 경제단체들의 격앙된 반응에는 ‘과장’이 섞였다는 짐작이 쉽게 간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비판 대상에 따라 날이 달라 </font></font>그렇다면 경제단체들이 왜 이렇게 민감할까. 물론 정확한 이유를 파악할 길은 없다. 다만 몇 가지 힌트는 있다. 허 회장이 6월21일에 한 말을 찬찬히 보면 실마리가 잡힌다. 여권의 반값 등록금 정책을 ‘즉흥적’이라고 대놓고 평가절하한 그가 청와대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아니, 말을 높였다. 그는 현 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 기조에는 변화가 없다며 “대통령께서도 만날 때마다 더 잘하라고 격려해주시며, 기업도 어느 정도는 고통 분담 차원에서 분담을 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반값 등록금과 감세 정책 철회를 놓고 청와대와 한나라당 지도부가 갈등을 보여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허 회장은 심지어 논란을 낳았던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개념이 구체화되지 않아 뭐라 언급하기가 곤란하다”고 말을 아꼈다. 그의 비판의 날은 대상에 따라 크게 달랐다. 더구나 그가 반값 등록금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던 기자회견은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경제단체들의 ‘공세’는 그의 기자회견을 기점으로 시작됐다. 여권의 한 의원은 “경제계의 이런 반발에는 우리 정부(내부)의 부추김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의원의 말과 정황을 종합하면, 경제단체들의 약속된 이어달리기를 연출한 ‘감독’은 따로 있다는 뜻이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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