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이건희 회장이 경제학을 다시 공부해야 하는 이유

동반성장위, 이건희 삼성 회장이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라고 따진 이익공유제 사례 제시… 롤스로이스·헐리우드 등 이익공유제 통해 협력업체와 공생해
등록 2011-06-02 18:30 수정 2020-05-03 04:26
»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의 많은 대기업들이 협력사와의 동반성장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이익공유제’를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익공유제를 부정하는 이건희 삼성 회장과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 등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힘들게 됐다. 2010년 삼성그룹의 호암상 시상식에 나란히 참석한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당시 국무총리)과 이건희 삼성 회장(가운데). 한겨레21 정용일

»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의 많은 대기업들이 협력사와의 동반성장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이익공유제’를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익공유제를 부정하는 이건희 삼성 회장과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 등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힘들게 됐다. 2010년 삼성그룹의 호암상 시상식에 나란히 참석한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당시 국무총리)과 이건희 삼성 회장(가운데). 한겨레21 정용일

이건희 삼성 회장이 경제학을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 한국 최대 재벌의 총수인 이 회장이 경제학을 가르친다면 몰라도, 배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 회장이 자초한 일이니 누구를 탓하기도 어렵게 됐다.

이 회장은 지난 3월11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단회의에 참석했을 때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내가 어릴 때부터 기업가 집안에서 자랐고 학교에서 경제학 공부를 계속해왔는데, 그런 얘기는 들어보지도 못했고 이해가 안 가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작심한 듯 쓴소리를 했다. 그는 또 “(초과이익공유제를)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 사회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자본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공산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절제되지 않은 표현까지 동원했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은 이에 대해 “초과이익공유제는 시장경제 원리에 결코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정 위원장은 경제학 교과서인 의 지은이다. 이 책은 1982년 초판이 나온 이후 29년간 7번째 개정판이 나올 정도로 경제학도들의 애독서다. 경제개혁연대도 “전후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끈 비결 중 하나인 일본식 하도급거래의 핵심 요소가 대·중소기업 간 호혜적 협력과 상호 신뢰에 기반을 둔 성과공유 또는 이익공유임을 부정하느냐”며 이 회장에게 경제학 공부를 다시 할 것을 권한 바 있다.

이익공유제 통해 위기 극복, 판매 증가

과연 어느 쪽의 말이 진실이었을까?

자동차 마니아로 유명한 이건희 회장이 5월26일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으로 출근할 때 탄 차는 세계 3대 명차 중 하나인 롤스로이스의 신형 모델이다. 국내 판매 가격이 부가세를 포함해 7억원을 호가한다. 롤스로이스는 1907년 영국에서 설립돼 명품 자동차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항공기 엔진 제작사업의 적자로 1971년 회사가 자동차 사업과 항공기 엔진사업으로 분리된다. 항공기 엔진사업은 영국 정부가 국유화했고, 자동차 사업은 독일의 BMW에 팔리는 비운을 맞았다. 당시 롤스로이스는 민간 항공기 시장의 점유율이 낮은 상태에서 강력한 상대인 미국 GE 등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신형 항공기 엔진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10억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연구·개발비 조달이 관건이었다. 이때 묘안으로 떠오른 것이 협력사와의 ‘이익공유제’다. 롤스로이스와 협력사들은 ‘위험 및 판매수입 공유 파트너 계약’(이하 판매수입공유제·Revenue Sharing)을 맺었다. 항공기 엔진 개발에 공동 투자해서 성공하면 투자 비율에 비례해 판매 수입을 나누기로 한 것이다. 롤스로이스는 엔진 개발 투자 부담을 줄이고, 협력사들의 연구·개발 능력까지 활용할 수 있게 된 덕분에 신형 엔진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협력사들도 막대한 판매 수입을 분배받아 큰 이익을 거두었다. 이후 판매수입공유제는 롤스로이스가 항공기 엔진을 개발할 때 표준사업모델로 자리잡았고, 오늘날 세계 2위의 항공기 엔진 제조사로 발돋움하는 밑거름이 됐다. 롤스로이스는 2013년 상업 비행 예정인 ‘에어버스350’ 엔진 개발 프로젝트에서는 협력사의 투자 기여도를 종전의 30%에서 40% 수준으로 더욱 높였다.

미국의 대표적 비디오 대여체인사업자인 블록버스터는 이익공유제를 유통서비스업에 확대 적용했다. 블록버스터는 비디오 공급사업자로부터 개당 65달러에 비디오를 구입한 뒤 3달러에 고객에게 빌려준다. 따라서 손익분기점에 도달하려면 비디오 당 대여 횟수가 평균 22회를 넘어야 한다. 비디오 가격이 비싼 것은 비디오를 구입하지 않고 빌려보는 소비자로 인한 판매 감소 보상까지 포함됐기 때문이다. 비디오 대여사업의 특징은 손님들의 수요가 비디오 출시 초기에 정점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블록버스터는 비싼 비디오 가격 때문에 출시 초기 다량의 비디오를 구매하는 게 큰 부담이었다. 이로 인해 손님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고, 이는 대여수입 손실로 이어졌다. 이때 블록버스터와 비디오 공급사업자 사이에 판매수입공유계약을 맺는 방안이 해결책으로 제시됐다. 공급사업자는 비디오 가격을 8분의 1 수준인 8달러로 대폭 낮추었다. 이에 따라 블록버스터가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수 있는 대여 횟수가 22회에서 6회로 줄었다. 블록버스터는 비디오 출시 초기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해 소비자에게 대여할 수 있게 되자 수입이 급증했다. 대여 수입의 일부를 비디오 공급사업자에게 나눠주더라도 결과적으로 이익이 더 늘어났다. 비디오 공급사업자도 판매 가격을 낮추었지만 대여 수입의 일부를 배분받음으로써 전체 이익이 늘어났다. 블록버스터는 1998년 판매수입공유제를 도입한 뒤 24%에 그쳤던 시장점유율이 4년 만에 두 배 수준인 40%로 치솟았다.

네덜란드·오스트레일리아 등 다양한 이익공유제

동반성장위원회는 5월24일 ‘창조적 동반성장사업 연구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열고, 이런 내용이 담긴 동반성장모델 개발에 관한 연구용역 결과를 공개했다. 연구용역의 책임자인 홍장표 부경대 교수는 “이익공유제는 공동으로 만들어낸 이익을 기여도에 따라 공정하게 배분함으로써 참가자들의 자발적인 노력 동기를 유발하고 이익도 최대화할 수 있어 선진국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시행되고 있다”며 “이익공유제 모델들은 각각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한국은 산업·사업 특성과 중소협력사의 역량을 고려해 가장 적합한 모델을 개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이익공유제는 미국 주요 대학의 경제학과 경영학 교과서에서 다양하게 다뤄지고 있다.

기업 간 이익공유제를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은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산업이다. 미국 영화산업 태동기인 1920년대 할리우드는 영화배우와 제작사, 배급사 간 협력을 촉진하고자 이익공유제를 도입했다. 이는 현재까지 할리우드의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후 기업 간 이익공유제는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네덜란드 등 여러 선진국과 제조·건설·유통서비스·인터넷·프랜차이즈 등 다양한 사업 분야로 확산됐다.

이익공유제 모델도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유 대상이 되는 이익에 따라 판매수입공유제, 순이익공유제, 목표초과이익공유제 등 다양한 형태로 시행된다. 순이익공유제(Net Profit Sharing)는 네덜란드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의 건설업체들 간에 널리 활용되는 모델이다. 한 예로 복수의 건설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사를 하는 경우, 비용을 사전에 보상하고 사업이 끝난 뒤 미리 합의한 비율에 따라 건설사 간에 손익을 공유한다. 1990년대 초반 네덜란드의 원유·가스 추출업에서 시작돼 석유화학플랜트 건설사업으로 확대됐는데, 건설사 간 상호 협동과 감시가 활발해지면서 공사 기간 단축과 비용 절감, 품질 향상에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 목표초과이익공유제(Target Profit Sharing)는 대기업이 협력사와 합의해 목표이익을 미리 정한 뒤, 달성하면 목표초과분을 공유하고 달성하지 못하면 손실을 분담하는 방식이다. 미국의 크라이슬러·캐리어(에어컨 제조업체) 등이 고객서비스, 품질, 원가에 목표를 정하고 목표초과분에 대해 협력사들에 보너스를 지급하는 수익공유플랜(GSP·Gain Sharing Plan)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삼성 계열사도 실제로는 하고 있어

이익공유제가 나라 밖에서만 시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눈여겨보면 우리 주변에서도 이익공유제 시행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터넷 쇼핑몰과 포털(검색엔진) 간의 ‘제휴마케팅’이다. 대다수 인터넷 쇼핑몰업체는 네이버·다음 같은 인터넷 포털이나 검색엔진에 광고를 내고, 이를 통해 얻은 판매 수입의 일정 비율을 나눠준다. 이익공유제 중에서 판매수입공유제와 유사한 방식이다. 이런 제휴마케팅은 이제 인터넷 쇼핑몰업체뿐만 아니라 카드사(롯데·삼성·신한카드), 대형 서점(교보문고·리브로·삼성북스닷컴·영풍문고), 오픈마켓(G마켓·11번가·옥션), 인터넷(QOOK·SK브로드밴드), 중고차(SK엔카·엔카중고차)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인터넷업체들을 이용해 더 효과적인 광고가 가능하고, 마케팅 비용을 실적에 연동함으로써 비용 면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터넷 종합쇼핑몰인 ‘아마존닷컴’의 경우 매출의 30% 이상을 제휴마케팅을 통해 달성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건희 회장은 이처럼 다양한 국내외 사례를 정말 몰랐을까? 더욱이 국내 제휴마케팅 시행업체 중에는 삼성 계열사도 포함돼 있다. 이 회장뿐만 아니라 대다수 보수 언론과 경제단체, 학자들조차 이구동성으로 “반시장적” “듣도 보도 못한 제도” “절대 실행 불가능한 제도” 등으로 (초과)이익공유제를 공격한 것을 보면 정말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경제학을 더 공부해야 하는 사람은 이 회장뿐만이 아닐 수도 있다.

사정이 딱하게 된 것은 MB 정부 동반성장 정책의 주무책임자인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이다. 그는 처음부터 정운찬 위원장을 향해 “(이익공유제는) 애초에 틀린 개념이고 현실에 적응하기도 힘들다”며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그의 이런 언행은 결국 정 위원장의 사퇴 파동을 초래하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정 위원장이 청와대의 설득으로 업무에 복귀하고 이익공유제를 계속 추진하기로 하자 사태는 간신히 봉합됐다. 하지만 동반성장의 주무장관이 국내외에 다양한 이익공유제 사례를 몰랐다는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최 장관은 이익공유제 시행 사례를 몰랐던 게 아니라, 알고서도 딴소리를 한 것 같다. 5월24일 동반성장위와 지식경제부 간에 벌어진 소동은 그럴 개연성이 높음을 보여준다. 정 위원장은 당일 동반성장위 고위 간부에게 크게 화를 냈다. ‘창조적 동반성장사업 연구 TF’에 보고된 국내외 이익공유제 시행 자료를 언론에 배포하라는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반성장위의 한 관계자는 “평소 온화한 성격의 정 위원장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알면서도 반대하는 최중경 장관”

동반성장위는 그날 낮 12시와 1시 사이에 언론에 세 차례 전자우편을 보냈다. 첫 번째인 12시32분에는 참고자료(이익공유제 시행 사례)를 보내니 보도에 협조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11분 뒤인 12시43분에는 보도 취소를 요청하는 전자우편을 보냈다. “실무적 착오로 보도자료가 잘못 송부되었다”는 것이었다. 3분 뒤에도 똑같은 내용의 우편을 보냈다. 이는 언론에 자료를 배포하라는 정 위원장의 지시를 어긴 명백한 항명 사태라고 할 수 있다. 동반성장위가 정 위원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은 지식경제부의 명령 때문이다. 동반성장위 직원들 대부분은 지식경제부와 유관기관에서 파견나온 사람들이다. 동반성장위 관계자는 “TF가 열리기 전부터 지식경제부가 보고서 내용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며 “최 장관의 지시로 보고서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식경제부는 차관을 TF 회의에 직접 참석시켜 보고서 내용을 반박하려는 시도까지 했으나, 정 위원장의 제지로 무산됐다. 결국 최 장관은 정 위원장의 복귀 이후 겉으로는 이익공유제 추진에 반대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으나, 뒤로는 정 총장과 이익공유제의 발목을 계속 잡아온 것이다. 최 장관의 경우는 경제학을 다시 공부한다고 해서 생각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동반성장위 TF의 한 관계자는 “최 장관은 이익공유제를 잘 몰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반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이명박 정부가 진정으로 동반성장을 추진할 의지가 있는지 조만간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