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정유사 간 휘발유값 전쟁이 재점화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명박 대통령이 휘발유값 적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당일인 1월13일, SK이노베이션·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 등 4개 정유사와 SK가스·E1 등 2개 액화석유가스(LPG) 수입사, 일부 주유소에 대한 가격담합 조사에 전격 착수했다. 또 18일에는 민관 합동 ‘석유가격 평가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휘발유값 거품 제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초비상에 걸린 정유사들은 청와대의 눈치를 보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가격 인하를 검토하고 나섰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가 급등기마다 마녀사냥식 ‘정유사 때리기’를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이냐며 강한 불만을 나타낸다.
100일 이상 연속 오른 휘발유값
“미친 휘발유.”
국내 휘발유값은 1월20일 현재 ℓ당 1827.80원으로, 지난해 10월10일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100일 이상 연속 상승했다. 사상 최고치였던 2008년 7월 셋쨋주의 1949원과는 불과 100여원 차이다. 일부 서울 도심 주유소들의 가격은 이미 ℓ당 2천원을 넘은 지 오래다. 국제 휘발유값(싱가포르 현물시장 기준)도 1월19일 현재 배럴당 106.30달러로 역시 고공행진 중이다.
국민의 휘발유값에 대한 이미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비싸다”는 것이다. 에너지관리공단이 서울 시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94.3%가 “휘발유값이 높다”고 말했다. 한국의 휘발유값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는 중간 수준이다. 2010년 12월 5주차 한국의 휘발유값(고급휘발유 기준)은 ℓ당 1999원으로, 회원국 중 14번째로 높다. 독일(2218원)·영국(2189원)·프랑스(2164원)·일본(2022원)은 모두 우리보다 비싼 반면, 미국(999원)·캐나다(1426원)는 싸다.
“체육학과 나온 주유소 사장님 아들.”
최고의 신랑감이나 애인감을 가리키는 우스갯소리다. 그만큼 ‘주유소 사장님’은 한때 숨은 알부자의 상징이었다. 이는 곧바로 주유소가 폭리를 취한다는 따가운 시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정유업계 관계자들은 다 흘러간 얘기라고 일축한다. 정유사의 한 고위 임원은 “아버지는 소장, 어머니는 경리, 아들은 주유원으로 일해도 가족 3명의 한 달 순수입은 500만원 정도”라며 “정유사 직영주유소 소장의 월급이 200만원 정도에 불과하고, 정유사 직원들이 퇴사하면서 너도나도 주유소 개업을 희망하던 것도 옛날 얘기”라고 말했다. 정유사 직원들의 높은 임금도 정유사들의 폭리를 보여주는 간접 증거로 거론된다. 국내 정유사 중 직원 연봉이 가장 많은 곳은 GS칼텍스다. 2009년의 경우 남자 직원들의 평균 연봉이 7184만원에 달한다. 하지만 정유사들은 이에 대해서도 고개를 젓는다. 대규모 장치산업인 정유업은 다른 업종보다 종업원 수가 적어, 전체 매출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낮다는 것이다.
휘발유값 전쟁의 배경에는 구조적 문제가 놓여 있다. 공정위는 국내 정유업계를 대표적인 독과점, 비경쟁시장으로 꼽는다. 정유시장은 1997년 가격 자유화를 거쳐, 1998년에는 주유소와 석유정제업이 개방돼, 외형적으로는 완전히 자유화됐다. 하지만 신규 진입시 대규모 투자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다른 산업에 비해 진입장벽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에 따라 국내 정유시장은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등 4개사가 사실상 100% 장악하고 있다. 극소수 대기업이 지배하는 독과점시장일수록 업체 간 담합 가능성이 커지고, 소비자의 피해 위험성도 높아진다. 한철수 공정위 사무처장은 “정유업계는 서로의 눈빛만 보고도 담합이 가능한 시장”이라고 설명했다. 1997년 석유 수출입 등록요건 완화 이후 석유수입사가 급증하면서 2002년 말에는 39개에 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독립 석유수입사는 내리막을 걷기 시작해 현재는 휘발유시장 점유율이 1%도 안 될 정도로 유명무실한 상태다. 정부 관계자는 “대형 정유사들이 유통시장을 장악한 것이 독립 석유수입사가 발을 못 붙이는 요인이 됐다”고 분석했다.
2000년대 이후 정유사 담합 제재는 모두 네 차례 있었다. 2000년 5개 정유사의 군납유류 입찰담합(과징금 1901억원), 2001년 정유 5개사의 독립 수입업체 판매 방해 및 주유소 판매가격 강제, 2007년 정유 4개사의 가격담합(과징금 526억원), 2009년 4개 정유사와 2개 LPG 수입사의 LPG 가격담합(과징금 6689억원) 등의 사건에 부과된 과징금 총액은 9116억원에 달한다. 정유업계는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기 배만 채운다는 비판적 시각에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국내 정유사의 매출 규모가 수십조원에 달하지만, 이익률은 매우 박하다는 것이다. 한 예로 정유업계 2위인 GS칼텍스의 경우 2005~2009년 5년간 연평균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23조5천억원과 8565억원으로, 매출액영업이익률은 4%다. 다른 일반 제조업체에 비하면 박한 편이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전체 매출 중에서 내수용 정유사업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영업이익률은 2~3% 수준으로 더 내려가고, 아주 실적이 좋은 해도 4%를 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주장을 그대로 믿기 힘들다고 말한다. 정유사들에 대한 현장조사에서 휘발유값 관련 자료를 모두 수거해가고, 1994년 석유가격 고시제 폐지 이후 정유업계가 한 번도 내놓지 않은 휘발유의 원가 정보를 제출하도록 압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는 정유사 간 가격담합 외에도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나는 휘발유값의 거품 여부이고, 둘째는 국제유가가 오를 땐 빨리 많이 오르고 반대로 내릴 때 천천히 조금 내리는 이른바 ‘가격 비대칭성’이다.
정유사들은 휘발유값 판매가격 결정 구조로 볼 때 가격 거품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지난해 12월 중 전국 주유소의 휘발유 평균 가격인 ℓ당 1771.07원을 기준으로 가격 구조를 살펴보면 정유사 세전공급가, 유류세, 주유소 유통비용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먼저 정유사 세전공급가부터 살펴보자. 국내 휘발유값의 연동 기준이 되는 국제 휘발유값은 ℓ당 721.87원(전체 가격 대비 40.8%)이다. 여기에 정유사 유통비 등 판매관리비를 합치면 25.57원(1.4%)이다. 이 둘을 합치면 총 747.44원(42.2%)이 나온다.
다음은 휘발유에 붙는 각종 세금이다. 먼저 기본이 되는 교통에너지환경세(교통세)가 ℓ당 정액과 탄력세를 합쳐 529원이 붙는다. 또 교통세에 137.54원(교통세의 26%)의 주행세와 79.35원(교통세의 15%)의 교육세가 붙는다. 여기에 부가세를 합치면 898.75원(50.7%)이다. 수입가의 3%인 관세와 ℓ당 16원인 부과금은 35.26원(2%)이다. 결국 휘발유에 붙는 총세금은 934.01원(52.7%)이 된다. 세금이 절반을 넘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지막은 주유소 부문이다. 주유소의 유통비와 마진, 카드 수수료, 부가세를 모두 합치면 89.61원(5.1%)이다. 결국 휘발유값은 대략 ‘정유사 42:세금 53:주유소 5’로 구성된다. 이를 근거로 SK 관계자는 “휘발유의 ℓ당 마진은 10~30원 수준에 불과하다”면서 “정유사들이 설령 노마진(이익 제로) 선언을 해도 소비자가 휘발유값 인하를 체감하기 힘든 구조”라고 말한다. GS칼텍스 임원도 “내수용 정유사업의 영업이익이 ℓ당 7원 정도에 불과한데 무슨 가격 인하 여지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하지만 정부의 시각은 좀 다르다.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2008년 주유소의 마진에 대한 실태 파악에서 ‘ℓ당 100원 정도’라는 답변을 들었는데, 실제로는 100원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정유사들의 마진도 재확인 대상이다. 국내 휘발유값의 연동 기준인 국제 휘발유값에는 이론적으로 이미 정유사들의 정제마진이 포함돼 있어, 정유사들이 별도 마진을 챙겼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정유사 42 : 세금 53 : 주유소 5가격 비대칭 문제는 좀더 큰 논란거리로, 그동안에 여러 차례 의혹이 제기됐다. 공정위는 2009년 외부 연구용역을 통해 이를 검토한 적이 있다. 당시 연구에서 국내 휘발유값이 국제 휘발유값과 비교 시점에 따라 일부 비대칭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정유사들은 국내 휘발유값이 국제 휘발유값(싱가포르 현물시장 가격)을 기준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원유 도입가에 따라 결정되고 있는 것도 드러났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이런 사실들만 가지고 정유사들이 폭리를 취한다고 주장하기에는 불분명하다고 밝혔다. 결국 일부 가격 비대칭 문제의 소지가 있지만 정유사들이 폭리를 취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애매한 결론이 난 것이다. 정부는 이번에 이런 의문점들을 소상히 파악해보겠다는 생각이다. 공정위 한철수 사무처장은 “국내 유가 결정 기준이 무엇인지, 국내 유가와 기준 유가 간의 움직임이 일치하는지,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문제 소지는 없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정유사들은 휘발유값의 절반 이상이 세금이고, 정유사나 주유소 마진은 크지 않은 상황에서 소비자가 가격 인하를 체감할 수 있도록 하려면 결국 세금 부분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부는 대책에서 유류세 인하는 배제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가채무가 급증하고 재정건전성 악화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세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류세 감면은 어렵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2008년과 같은 (고유가) 위기가 아니므로 유류세 인하를 검토할 상황이 아니다”면서 “유류세 인하는 비상 계획이 가동될 때나 취해지는 조치”라고 밝혔다. 이는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 내정자가 지난 1월18일 청문회에서 “서민 생활이 어려워지면 재정부 장관에게 유류세 인하를 적극 검토하도록 요구하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부정적인 뜻을 밝힌 것이다. 정부는 두바이유가 배럴당 120~140달러를 웃돌았던 2008년 3월에 유류세 탄력세율을 한시적으로 10% 내렸으며, 석유제품 관세율도 3%에서 1%로 인하한 바 있다.
기획재정부는 우리나라 유류세가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편이 아니고 종량세이기 때문에 유가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는 주장도 편다. 또 석유 소비를 줄여야 하는 판국에 세금까지 낮출 경우 오히려 석유 수요를 증폭시킬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정유업계에서는 우리와 비슷한 나라들과 비교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정유사의 한 임원은 “휘발유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이 53%로, OECD 평균인 56.8%보다는 낮지만, 이웃 일본의 45.4%보다 높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휘발유값이 높은 데는 소비자의 책임도 있다는 주장을 편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기름값이 오르면 자동차 운행을 자제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면서 “소비자가 주유소 간 기름값 차이에 둔감한 것도 가격경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정유사의 한 관계자도 “한 예로 서울 강남 서초역 인근에 500m 정도 거리에 SK와 GS 주유소가 있는데 휘발유값이 ℓ당 100~200원 차이가 난다”면서 “휘발유값이 비싼 주유소의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좋긴 하지만, 비싼 가격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는 얘기는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정유사와 주유소 간 휘발유값 경쟁 유도를 위해 유가정보 사이트인 ‘오피넷’을 개설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큰 효과가 없다는 얘기다.
세금 인하될 가능성 낮아이번 휘발유값 전쟁에서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가격 인하가 이뤄질 것으로 낙관하긴 힘들어 보인다. 휘발유값의 일부 거품을 빼더라도 그 폭은 ℓ당 100원 수준을 넘기가 쉽지 않다. 또 국가재정을 감안할 때 세금 인하가 이뤄질 가능성도 높지 않다. 자칫 소리만 요란했지 실속은 없을 경우, 정부가 물가 불안 심리를 잠재우기 위해 ‘보여주기식 쇼’를 벌였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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