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 우위에 있는 유저가 징징대는 것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결국 재협상에 들어갔다. 외교통상부는 지난 10월10일 보도자료를 내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브뤼셀에서 열린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서명 행사에 참석한 뒤 귀국길에 미국 요청에 따라 7일 오후(현지시각) 파리에서 드미트리어스 마란티스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와 비공식 협의를 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미국은 자동차 분야에서 기존 협정문 조항의 일부 수정까지 요구했다. 사실상 재협상이 시작된 셈이다.
이를 두고 정치권은 갑론을박 중이다. 현재 체결된 한-미 FTA를 조속히 비준하자는 쪽(한나라당·자유선진당)과 한국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줄 수 있는 한-미 FTA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민주노동당)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또 다른 한쪽(민주당)은 재협상을 하되 독소조항을 없애자는 주장과 기존대로 처리하자는 주장이 섞여 있다.
e스포츠협회와 블리자드의 해묵은 논쟁이런 상황에서 최근 불거진 시뮬레이션 게임 를 둘러싼 저작권 갈등은 한-미 FTA의 독소조항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 잘 보여준다.
한국e스포츠협회는 지난 10월14일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10∼11 시즌’이 10월16일부터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를 개발한 미국 게임업체인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와 이 업체로부터 독점 계약권·방송권 등을 넘겨받은 그래텍이 “e스포츠협회가 우리의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는 와중에 나온 것이다.
이번 갈등은 2007년부터 시작됐다. 블리자드는 e스포츠협회가 자신과 협의 없이 게임대회를 주최해 기업들의 후원을 받고 케이블 방송사에게서 중계료를 받는 것은 저작권 침해라고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 e스포츠협회는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e스포츠협회는 e스포츠가 축구처럼 공공성을 띠고 있어 이를 중계하는 것은 저작권 침해가 아니며, 프로리그 개최로 가 인기를 얻으면서 블리자드도 이익을 얻었다고 반박해왔다.
갈등은 올 들어 블리자드가 를 출시하면서 더욱 커졌다. 블리자드는 지난 5월 그래텍과 자사 게임의 대회주최권·방송권 등에 대한 3년 독점계약을 맺었다. 또 e스포츠협회의 프로리그에 대해 8월까지만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e스포츠협회가 협상에 적극적이지 않아 협상이 중단됐다는 점도 덧붙였다. 이후 e스포츠협회는 다시 협상에 나섰지만 양쪽의 의견차만 확인했을 뿐 큰 진전은 없었다.
결국 e스포츠협회는 그동안 주최해온 프로리그를 강행하기로 했다. e스포츠협회 관계자는 “원저작권자로서 블리자드의 권리는 일부 인정하지만 그 요구가 지나치게 커 수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그래텍의 최유진 홍보팀장은 “e스포츠협회가 대회를 강행하는 만큼 법적 대응까지 포함해 블리자드 쪽과 향후 대응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정치권도 이런 상황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나라당 허원제 의원이 주최한 ‘e스포츠 콘텐츠 저작권 쟁점과 해결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블리자드와 e스포츠협회 쪽 입장을 대변하는 토론자들이 논쟁을 벌인 가운데 정부와 정치권도 이에 대한 개입 뜻을 밝혔다. 허 의원은 “지난해 발의한 ‘e스포츠 진흥에 관한 법률안’을 통해 e스포츠의 발전을 꾀하겠다”며 사실상 e스포츠협회의 손을 들어줬다. 법률안은 ‘공표된 게임물은 e스포츠대회의 종목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 해당 게임물의 출처를 명시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이미 발표된 게임의 경우 저작권과 상관없이 게임 관련 단체가 대회를 주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역시 이번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10월에 전문가들로 TF팀을 구성해 이르면 11월까지 유권해석을 내놓는 등 조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갈등 조정도 제소 대상
이런 움직임은 가 국내 e스포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다. 는 1998년 출시된 이후 10년 이상 e스포츠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올 5월 현재 437명의 프로게이머 가운데 259명(59.3%)이 관련 리그에서 뛰고, 프로게임단 12개 모두 를 주종목으로 한다.
정부는 지난 6월 ‘e스포츠 이노베이션 2.0’이라는 중·장기 발전계획을 내놓으면서 올해부터 5년간 정부 예산 320억원을 비롯해 지자체 예산, 기업 후원 등 총 590억원을 e스포츠에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가 저작권에 발목이 붙들릴 경우 e스포츠의 발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된다. 정부와 정치권은 이런 상황에 주목하면서 갈등 조정과 법안 처리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미 FTA가 발효되면 정부와 정치권의 움직임에 강력한 제동이 걸릴 수 있다. 국회에서 새 법률을 만들어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정부가 저작권에 대한 조정안의 수용을 강제할 경우 미국 업체라도 우리 정부를 제소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미 FTA는 상대방 국가에 투자한 기업 또는 개인이 저작권 등 지적재산권을 침해받았을 때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상대방 국가 정부를 제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바로 ‘투자자-국가소송제’(ISD·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 조항이다.
2004년 ‘블리자드 코리아’라는 한국법인을 설립한 블리자드는 이미 투자자 지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저작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큰 허원제 의원의 법률안이 통과될 경우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에서 한국이 패소할 경우 상당한 금액의 손해배상금을 물어줘야 하고, 이를 거절할 경우 상대국인 미국은 보복관세를 물릴 수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송기호 변호사는 “현재는 국회나 정부가 기존 저작권법에 예외 사항을 두도록 관련 법을 개정하거나 새 법을 만들더라도 해외 저작권자가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다”며 “FTA가 발효되면 국회가 만든 법이 해외 투자자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으면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에 제소될 수 있어 입법 주권이 훼손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투자자-국가소송제는 한-미 FTA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차라리 재협상으로 독소조항 폐기를”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는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뿐만 아니라 주한 미국 대사관 쪽에서도 참석했다. 그만큼 지적재산권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미국은 한-미 FTA 재협상까지 고려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 정부는 “재협상은 없다”는 입장에서 “협정문을 수정하는 재협상은 없다”고 말을 바꾸는 등 갈수록 미국의 압력에 끌려다니는 모습이다. 경제평론가 정태인씨는 “한-미 FTA에는 투자자-국가소송제 외에도 어떤 분야든 한번 개방하면 되돌릴 수 없는 래칫(Ratchet) 조항을 비롯해 독소조항이 많다”며 “미국에 끌려 재협상을 할 것이라면 차라리 독소조항을 포함해 전면적 재검토를 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