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정에서 사용되는 물질은 모두 알려져 있고, 역학조사에도 제출됐으며, 근무하는 직원들도 알고 있습니다.”(2010년 4월2일 삼성전자 공식 트위터)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온양공장에서 일했던 박지연(23)씨가 급성백혈병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 게 지난 3월31일. 당시 박씨의 죽음을 둘러싸고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의 유해 화학물질 관리실태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위 글은 박씨의 발인이 있던 지난 4월2일 삼성전자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당시의 논란에 대해 해명한 글의 일부다. 그리고 6개월 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의 위험성을 평가한 서울대 산학협력단의 보고서가 공개됐다. 과연 삼성전자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일까?
지난 9월28일 참여연대는 지난해 서울대 산학협력단(단장 백도명)이 노동부 권고와 삼성 쪽 의뢰로 작성한 ‘삼성 반도체 사업장 위험성 평가 자문보고서’ 가운데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노출평가 부문 자문보고서’를 입수해 공개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의 화학물질 관리 실태가 공식적인 문서에 의해 공개된 것은 처음으로, 지금까지는 사업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림프종 등 난치병에 걸린 노동자들의 현장증언, 삼성이 제작한 업무보조용 ‘환경수첩’(811호 이슈추적 ‘삼성반도체 발암성 물질 6종 사용 확인’ 참조)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드러난 게 전부였다.
보고서를 보면, 경기도 용인 삼성전자 기흥공장(5라인)에서 작업 중 실제로 쓰이는 화학물질은 83종(같은 물질이나 제품명이 다른 것을 포함하면 99종)에 달한다. 하지만 83종이 각각 어떤 물질인지는 보고서에 공개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유해성 유무나 그 정도도 논의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이 자료는 제품 공급업자가 제출한 물질안전보건자료에 의한 것으로 그 정확성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또 이들 화학물질 가운데 10종은 제품 공급업자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성분을 밝히지 않은 물질이었다.
6개월간 가스검지기 경보 46회 발령이에 대해 삼성 쪽은 “납품업체에서 영업비밀을 이유로 삼성전자에 성분을 공개하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던 것”이라며 “공개를 못한 것이지 문제를 숨기기 위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반적인 대기업과 납품업체의 관계를 고려하면 이 해명은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삼성전자는 작업공정에서 쓰이는 화학물질의 유해성 판단을 위해 반도체 공정에서 쓰이는 화학물질을 모두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보고서는 또 83종의 물질 중 평소 측정·관리되고 있는 것은 24종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공급업자가 제출한 자료 이외에 삼성전자 쪽이 화학물질과 관련해 자체 분석을 한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보고서의 ‘가스검지기 설치 현황 및 문제점’ 항목을 보면, 지난 2009년 2월에서 7월까지 6개월 동안 기흥공장 5라인에서만 가스검지기 경보가 46회나 발령됐다. 경보 발령 기간은 10분 이내가 89%였지만, 1시간35분 동안 지속된 날도 있었다. 경보 발생을 원인별로 살펴보면, 생산설비를 유지·보수하는 과정에서 작업 절차를 지키면서 작업해도 잔류 가스의 영향으로 경보가 발생한 경우가 25건으로 가장 많았고, 오작동도 11건이 있었다. 문제는 정상적으로 공정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발생한 누출이 3건, 표준 작업절차를 지키지 않는 상황에서 가스가 누출된 경우가 3건에 이른다는 점이다. 원인이 파악되지 않은 경보 발생도 4건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삼성전자는 “사업장 관리는 법정 기준보다 훨씬 엄격하게 운영되기 때문에 실제 위험한 상황이 아닐지라도 대비하는 차원에서 초기 경보가 발령될 수 있다”며 “가스가 작업자가 근무하는 공간으로 누출돼 작업자의 건강을 위협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현장에 근무했던 한 직원은 “재직 때 유기용제와 가스 누출 사고가 비일비재했고, 많을 때는 한 달에 두세 차례 사고가 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4월16일치 참조).
“23년 동안 유기화합물 냄새 방치”화학물질 관리의 허점은 또 있다. 화학물질 제품 99종 가운데 라인을 이용한 중앙공급 방식으로 공급되는 경우는 32종에 불과하고, 작업자가 병을 이용해 직접 교체 투입해야 하는 물질이 65종, 드럼으로 교체하는 경우가 2종인 사실이 보고서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삼성전자가 지금까지 되풀이해온 “가스와 유기용제는 (안전을 위해) 모두 중앙에서 공급되고 처리가 끝나면 자동으로 빠져나간다”는 주장과 배치되는 대목이다. 보고서에서는 병이나 드럼을 이용해 화학물질을 공급하면 용기의 개폐·분배·보관 등의 과정에서 화학물질이 작업장 내로 누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참여연대는 이번 서울대 보고서와는 별개로 삼성전자의 내부 발간물인 2007년 여름호에 실린 기흥공장 안전그룹장의 기고문을 공개했다. 이 가운데 ‘냄새 관리’라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가스감지 시스템은 구축돼 있으나 유기화합물의 경우 별도의 감지 시스템이 구축돼 있지 않으며 저농도 만성적 유기화합물 냄새로 인한 작업자의 건강 보호와 누출시 발생 원인 파악 및 개선 조치를 위해 2007년 6월에 실시간 모니터링 시스템을 적용했다.” 공장 내부에서 유기화합물 냄새가 지속적으로 났다는 사실을 삼성 쪽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삼성은 “당시 냄새에 대한 조사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더 나은 작업환경을 만들기 위해 냄새를 측정·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냄새가 난다고 해서 모두 인체에 영향을 미치거나 위험한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해명은 ‘모두 위험한 것은 아니다’라는 부분부정의 뜻을 담고 있다. 기흥공장에서 일한 뒤 유방암에 걸린 신송희(31)씨는 “역겨운 화학약품 냄새로 인해 자주 구역질이 났다”며 “나 말고도 구역질을 하는 동료가 많았다”고 증언했다.(811호 이슈추적 ‘삼성반도체 발암성 물질 6종 사용 확인’ 참조)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 활동가 공유정옥(36·산업전문의)씨는 “냄새 관리에 대한 20007년의 문건은 당시 모니터링을 했느냐 안 했느냐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1984년 공장이 생긴 이래로 23년 동안 그런 상황을 방치해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었다”며 “정작 삼성에서는 ‘2007년에 모니터링을 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화학물질이 삼성반도체 공장 노동자에게 노출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직무별 노출 수준 평가를 통해 ‘포토 공정’과 ‘이온주입 공정’의 생산설비 유지·보수 엔지니어, 설비 엔지니어의 화학물질 노출 수준이 ‘중간 혹은 높음’이라고 밝혔다. 순간 고농도 화학물질 노출 위험이 다른 직무보다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생산설비 유지·보수 업무를 수행하는 노동자에 대해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노출 억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머지 보고서도 공개해야이번에 공개된 보고서는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지난해 6~10월 삼성전자 기흥·온양공장, 하이닉스 이천·청주 공장, 엠코테크놀로지코리아 서울·광주 공장 등 반도체 3사의 6개 공장을 대상으로 산업의학, 산업환기, 노출평가, 신기술·신공정, 의사소통 등 5개 분야를 조사한 보고서의 일부분이다.
삼성반도체·LCD, 삼성전기, 삼성전관(현 삼성SDI) 등에서 근무하다가 백혈병 등 희귀질환에 걸렸다고 반올림에 제보한 노동자는 현재 59명이며, 이 가운데 이번 조사 지역인 기흥·온양 공장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44명으로 절반을 넘는다.
참여연대, 좋은기업센터, 한국여성노동자회, 환경정의 등 시민단체들은 “화학물질 노출 관리의 문제점이 확인된 만큼 근로복지공단은 백혈병 등 희귀질환에 걸린 삼성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를 인정하고, 삼성은 이에 합당한 보상과 작업환경 개선에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부와 국회는 유해물질에 대한 정보 공개를 의무화하고, 2008년·2009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시행한 반도체 제조공정 역학조사 결과와 서울대 산학협력단 보고서가 모두 공개되도록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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