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믈리에(포도주 감별사), 보석 디자이너, 축구선수 에이전트, 국제회의 기획가 같은 신종 직업이 뜬다. 삼겹살 가격이 떨어지고 치즈와 버터를 싸게 먹을 수 있다. 벤츠·BMW 등 수입차 가격도 내려간다. 대신 우리나라 자동차와 전자제품은 유럽에서 가격경쟁력을 가져 더 많이 팔리게 된다.’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했다는 소식이 정부발로 국내에 전해지자, 곧바로 언론은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과연 그럴까? FTA에 따른 손익계산서를 위해 주판알을 한번 튕겨보자.
이명박 대통령은 7월13일 오후 EU 이사회 의장국인 스웨덴의 프레드리크 레인펠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뒤 연 기자회견에서 한-EU FTA 협상이 마무리됐다고 공식 선언했다.
유럽에 공장 둔 한국차, 관세 혜택 미미한-EU FTA가 체결될 경우 EU는 지금까지 우리가 FTA를 체결한 지역 중 최대 시장이 된다. EU의 국내총생산(GDP)은 16조9천억달러로, 미국보다 20%가량 더 크다. EU는 인구 4억9천만 명의 거대 시장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와 EU 27개 회원국 사이의 교역 총액은 984억달러로, 1683억달러인 중국에 이어 두 번째다. 일본(892억달러)이나 미국(847억달러)보다도 많다. 한-EU FTA가 한국 경제에 미칠 파장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정부와 민간연구소는 한-EU FTA로 우리나라의 GDP를 단기적으로 2%, 장기적으론 3%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소비자 측면에서 보면 가격이 떨어지는 품목들이 있다. 지난해 EU산 삼겹살 수입 단가는 kg당 4013원이었다. 5~10년에 걸쳐 관세(냉장육 22.5%, 냉동육 25%)가 없어지면 수입 단가는 3210원으로 떨어진다. 지난해 12월 국내산 돼지고기 도매 가격(kg당 4482원)에 견줘 30%가량 싼 셈이다. 유럽산 와인에 붙은 관세 15%는 협정 발효 즉시 철폐된다. 치즈·버터·연유 등에 붙은 높은 관세(20~89%)는 15년에 걸쳐 폐지된다.
수출 측면을 보자. 우리나라 자동차는 유럽에서 더 잘 팔릴까? 자동차의 경우, 한국에서 EU로 수출할 때 내는 관세는 10%이지만, EU가 우리나라에 수출할 때 내는 관세는 8%다. 언뜻 생각하면 우리나라가 더 이익인 것 같다. 하지만 수출에 큰 기대를 걸기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많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현지 공장을 운영해왔기 때문이다. 현대·기아차의 유럽 현지 생산 규모는 70만 대(체코 30만 대, 슬로바키아 30만 대, 터키 10만 대)다. 현재 건설 중인 러시아 공장이 완공되면 유럽 현지 생산 규모는 80만 대에 이른다. 현대차는 체코에서, 기아차는 슬로바키아에서 전략적으로 소형차를 생산하고 있다.
결국 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완성차로 유럽에 들어가는 차는 중·대형과 스포츠실용차(SUV)인데, 유럽에서 이들 차종의 성적표는 시원찮다. 현대차의 싼타페와 베라크루즈, 쏘나타, 그랜저, 제네시스, 에쿠스 등 중·대형 이상 모델은 아직 유럽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나라 안방시장에서 ‘유럽 차의 역습’을 받을 수 있다. 국내에서 팔리는 수입차의 대부분은 유럽산이다. 올 상반기에 많이 팔린 수입차를 보면 BMW·아우디·메르세데스벤츠·폴크스바겐 등 6개 차종이 유럽의 자동차 메이커다. 업계에선 관세가 철폐되면 한 대당 3천만~1억5천만원으로 가격이 떨어질 것으로 본다. 이 경우 현대가 독점하고 있는 그랜저와 제네시스급 시장의 국산차 점유율도 떨어질 수 있다. 여기에다 유럽산 소형차까지 관세 혜택을 받게 돼 우리나라 안방시장을 유럽의 자동차 메이커에 내줄 수 있다는 우려도 뒤따른다.
더 심각한 문제는 EU에 견줘 경쟁력이 떨어지는 농축산 분야다.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7월14일 협정에 따른 국내 농축산업의 피해 규모를 2300억원 수준으로 추정했다. 장 장관이 밝힌 규모는 한-EU FTA 발효 15년을 기준으로 한 연간 농축산업의 생산 감소액이다. 한-EU FTA가 이행되면 우리나라 농축산 업계는 이만큼의 시장을 EU산 농축산물에 내준다는 것이다.
농림부의 낙관적 추정에 비판 일어하지만 정부가 내놓은 피해 규모는 정교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는다. 지난해 우리나라 양돈 산업의 생산 규모는 3조3천억원이다. 대한양돈협회는 대다수 수입육이 유럽에 집중된 만큼 한-미 FTA 타결에 따른 양돈업 피해규모(1조866억원)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고 있다. 양돈협회는 성명서를 통해 “한-칠레 FTA 이후 칠레산 돼지고기 수입량이 83% 크게 증가(1만7365t→3만1808t) 했다”며 “한-미 FTA 타결에 따른 국내 양돈산업 생존대책도 이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EU FTA 타결은 국내 양돈농가의 살 길을 송두리째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반발했다. 이에 대해 장 장관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분석 모델에 따른 추정액이라고 해명했다.
이와 관련해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실은 보도자료를 내어 “400만 농·어민의 희생을 담보로 한 한-EU FTA가 체결될 경우 낙농 분야는 연간 1028억원, 양돈 분야는 4200억원, 수산 분야의 경우 403억원의 피해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또 강 의원실은 “쇠고기 수입은 국제수역사무국(OIE) 기준에 기초한다고 명기함으로써 광우병이 다수 발발한 유럽 일부 국가의 쇠고기 수입 여지를 열었다”고 지적했다. 잘못 꿴 한-미 FTA의 첫 단추가 연쇄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강요하게 됐다는 얘기다.
국민에게 협정 내용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합의부터 했다는 비판도 거세다. ‘밀실회담’이라는 지적이다. 정부가 오는 9월께 공개할 한-EU FTA 합의문에 대해 국민 여론 수렴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협상을 마무리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협화음도 새어나왔다.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레인펠트 스웨덴 총리는 “큰 걸음의 진전이 있었지만 EU는 이를 최종적으로 확정하려면 개별 회원국 모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앞으로 난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미 FTA는 국가 대 국가의 협상인 반면, 한-EU FTA는 27개국 연합체와의 협상이기에 협상단 간 의견 절충 외에 EU 내부의 조율이라는 절차를 한 번 더 거쳐야 한다.
“밀실 회담” 민변 최종 합의문 공개 청구〈AP〉 등 외신은 “EU가 아직 한국과의 FTA에 서명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레인펠트 총리가 말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논란이 일자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과 스웨덴의 에바 비예링 통상장관은 긴급 회동을 통해 “한-EU FTA의 모든 잔여 쟁점에 대한 최종 합의안이 마련된 데 대해 환영한다”는 공동 언론발표문을 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7월14일 외교통상부 장관을 상대로 한-EU FTA 최종 합의문 공개를 정식으로 청구했다. 정보공개법에 따라 외교부는 최종 합의문 공개 여부를 10일 이내에 결정해 민변에 알려야 한다. 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정부가 국민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중요한 국제통상 협상을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최종 합의했다”며 “최종 서명 전에 합의문을 공개해 이해당사자들과 전문가들의 객관적인 평가와 검증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합리적인 여론을 형성해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 이게 바로 민주주의가 아니냐”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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