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곰바우’다(그가 기분 나빠할 수도 있겠다). 느릿느릿 우직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다이내믹 코리아’엔 안 맞는 사람이다. 눈코 뜰 새 없이 팽팽 돌아가는 정보통신(IT) 사회에 그는 안 어울릴 것 같다.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을 항다반사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걸 못한다. 밥을 급하게 먹는다. 결국 체한다. 밥 먹고 차 마시는 당연한 일을 급하게 한 데서 사회적 부조리가 생긴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바로 밥을 제대로 먹는 원칙을 지키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게 아닐까. 단시간에 빨리 돈을 벌기 위한 탐욕 말이다. 벤처 거품은 어떤가. 단기에 돈 벌기 위한 사람들의 머니게임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느릿느릿하다. 시간을 거꾸로 가는 것처럼.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는 존경받는 최고경영자(CEO)로 항상 손꼽힌다.
“앞으로 6개월이 중요하다.” 어눌한 부산 사투리다. 하지만 논리적이다. 안철수 카이스트(KAIST) 석좌교수. 3월2일 대전 카이스트의 기업가정신연구센터 건물 2116호. 그를 만났다.
안 교수는 지금 네 번째 삶을 산다. 의사, 프로그램 개발자, CEO 그리고 교수의 삶이다. 그는 의사 일을 하면서 7년 동안 매일 새벽마다 컴퓨터 바이러스 프로그램 개발에 매달렸다. 1989년 만 27살에 단국대 의대 교수가 됐다. 하지만 95년 의예과 학장도 내던지고 안철수연구소를 세웠다. 2005년엔 CEO도 그만두고 훌쩍 미국으로 간다. 홀로 미 펜실베니아대 와턴스쿨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친다. 지난해 가을학기부터 카이스트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기업가 정신’을 강의하고 있다.
“6개월 안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창업에 내몰리게 될 거예요. 하지만 우리 사회는 기업가 정신으로 창업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벤처 붐 때처럼 많은 이들이 실패로 끝날까 걱정되죠. 사람들이 도전과 모험의 기업가 정신을 가질 수 있는 토양을 빨리 만들어줘야 해요.”
안 교수가 우리 사회를 창업하기 힘든 사회로 규정지은 까닭은 무엇일까? 세 가지 이유였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 그는 분노했다. “사람들은 실리콘밸리가 성공의 요람이라고 착각해요. 아니에요. 실리콘밸리는 실패의 요람이에요. 100개 기업 가운데 1개만이 성공하죠. 하지만 몇 번이나 실패한 CEO가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곳이 실리콘밸리예요. 한국에선 기업하다 망한 사람이 재기하는 게 힘들어요.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하는 부담이 너무 크죠.” 그가 예로 든 것이 ‘대표이사 연대보증제’다. “금융권에서 대출해주면서 대표이사의 연대보증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벤처는 굉장히 힘들어지죠. 벤처기업 설립자들은 거의 100% 경험했을 겁니다.”
대기업 의존 경제 외부 충격에 약해‘중소기업에 대한 사회적 지원 시스템’에 그는 허탈해했다. “대학, 벤처캐피털, 금융권, 아웃소싱 업체, 정부의 연구·개발(R&D) 정책 등이 중소기업의 인프라가 돼줘야 해요. 대학에서 중소기업에 필요한 인력을 잘 제공해주나요? 취약하죠. 벤처캐피털이 능동적 투자를 하나요? 미흡하죠. 오히려 단기 성과에 급급해 투자한 기업을 힘들게 해요. 사회적인 인프라가 있으면 기업가들은 집중해서 일만 하면 돼요. 이런 인프라가 빈약하다 보니 기업가들이 이것저것 신경을 써야 해요. 결국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공정거래 관행’에 그는 아쉬워했다. 안 교수는 중소기업 사장들에게 와닿을 만한 사례를 소개했다. 승진을 앞둔 대기업 임원이 CEO에게 결과를 빨리 보여주기 위해 한 중소기업에 구두로 물건을 주문했다. 중소기업 처지에서 계약서를 써달라고 요구할 수 없어 대기업만 믿고 물건을 만들었다. 그러데 최종적으로 결제를 받지 못했다. 그 중소기업은 계약서도 없으니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대기업이 단기적 이익을 위해 중소기업을 하청업체처럼 부려먹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다. 안 교수는 공정거래위원회나 언론이 그런 부분에 시선을 돌리면 바꿀 수 있는 게 더 많을 것 같다고 했다.
안 교수는 공공기관과 중소기업의 관계도 지적했다. 정부가 예산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소프트웨어 업체에 가격을 깎아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MS) 같은 외국 업체에는 깎아달라는 얘기도 못 꺼낸다. 오로지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들에만 그런 요구를 한다.
그의 대안은 무엇일까? ‘대한민국 포트폴리오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대기업에만 의존하는 경제는 외부 충격에 약하기 때문이다. 위험 분산을 위해서라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균형 있게 키워야 한다는 얘기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생생하게 겪었다. 몇몇 대기업이 흔들려도 다음 세대가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경제 체질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일자리 만들기에서도 정부의 시선은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으로 향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외환위기 이전에 200만 명 수준이던 대기업 고용이, 이제 130만 명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문제는 대기업이 아무리 성장한다 해도, 고용은 계속 줄거나 제자리걸음 수준일 것이라는 점이에요. 4천만이 먹고살 수 있는 일자리는 중소기업에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정부의 일자리 만들기는 중소기업에서 찾아야 해요.”
그는 지금 새싹들을 찾고 있다. 2005년 안철수연구소를 그만두고도 찾아보았지만 안 보였다. 그가 벤처기업을 처음 할 때는 새싹이 많았다. 벤처 1세대 메디슨이 그랬고, 다음커뮤니케이션이나 NHN이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다. 그가 교수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의사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지만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은 자신이 해야 했기에 의사를 그만두었다. CEO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 것도 개인의 성공 경험을 사회 전체와 나누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에게 새싹은 학생들이 아닐까.
시간 걸리더라도 기업가 정신 중요그는 자신을 ‘마이너리티’라고 했다. 뒤에 좀더 따라붙는다. ‘오피니언 리더’. 그렇다. ‘마이너리티 오피니언 리더’다. 노무현 정부 당시 경제부처에서 벤처기업 사장을 모아놓고 ‘제2의 벤처기업 활성화’에 대해 얘기했다고 한다. 그는 그때 벤처보다 기업가 정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안 교수는 “벤처라는 게 엘리트 스포츠와 굉장히 비슷해요. 벤처는 최첨단 기술로 급속도로 성장시키는 거예요. 저는 성과를 내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튼튼한 기업을 만들어가는) 기업가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느 사람도 제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군요.”
왜 그는 기업가 정신을 그토록 강조할까? “풀뿌리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기업가 정신으로 많은 사람들이 창업을 하고 건전한 중산층들이 많이 형성될 수 있거든요. 결국 기업가 정신은 건전한 중산층을 키우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봐요.”
처음 안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서자 한기가 확 느껴졌다. 안 교수는 두툼한 재킷을 입고 있었다. 이날따라 난방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를 하기 위해 윗옷을 벗었다. 기자도 윗옷을 벗었다. 1시간30분 남짓 인터뷰하는 동안 추위를 잊었다. 안 교수는 격정적으로 말하느라, 기자는 그의 말을 받아적느라.
대전=글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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